박동혁 병장은 누가 죽였는가
  •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
  • 승인 2015.07.2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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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평해전 미스터리…당시 교신기록·전투상보 공개해야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데 체계적인 이해가 필요함을 이렇게 역설한다. 한 남자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왜 죽었을까. 먼저 절벽이 솟아나 있고, 거기에 올라가는 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남자가 떨어진 가장 확실한 원인은 지구의 중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건 사건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블로크에 따르면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가장 근접해 있으면서 있을 법하지 않은 가장 특이한 원인(遠因), 즉 근인(近因)을 찾아내야만 한다. 절벽이나 중력의 존재는 원래 있는 것이니 원인이 될 수 없다. 가장 피할 수 있을 법한 특이하고 비합리적인 원인은 바로 ‘실족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 함정에 접근하는 ‘차단기동’ 명령자는?

2002년 6월29일 서해에서 북한 경비정 684호의 기습으로 우리 해군의 참수리 고속정에 승선한 28명 중 6명이 숨지고 19명이 부상한 끔찍한 피해가 있었다. 7월23일 현재 575만명의 누적 관객 수를 기록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 <연평해전>으로 이 사건은 최근 다시 뜨겁게 조명받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박동혁 병장(당시 상병)은 약 130개의 파편이 몸에 박혀 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다가 결국 그해 9월20일 숨을 거두었다. 영화를 보던 관객 중 많은 사람이 이 장면을 보며 울었다. 이렇게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는 영화로 보고 끝나면 된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관객들은 ‘누가 박동혁을 죽였는가’에 대해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박동혁 병장(당시 상병)이 참수리 고속정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영화 의 한 장면. ⓒ NEW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는 감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해에 바다가 형성되어 있고, 거기에 북한이라는 적이 있다는 설명만으로는 적절치 않다. 그것은 원래 있었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날 그 시점에서 가장 피할 수 있었던 특이한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좀 더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이런 의문점은 영화 <연평해전>으로 촉발되었지만, 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의문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북한이 도발하리라는 구체적 정보가 있었음에도 이를 군 수뇌부가 우리 해군의 현장 지휘관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습 공격을 받고 침몰한 참수리 고속정 357정의 정장인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출항 직전 “나는 그런 소리(북한이 기습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 들은 적 없는데”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두 번째는 북한 함정에 접근하는 ‘차단기동’을 명기한 우리 교전수칙의 위험성 문제다. 차단기동이란, 말 그대로 적 함정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한 기동이다. 즉 북한 함정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올 경우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도록 진행 방향을 수직으로 가로막는 것을 말한다. 영화에서 윤 소령은 작전회의 중에 적 함정에 대한 차단기동을 명기한 해군의 교전수칙에 문제가 있다고 항의한다. 그런데도 사건 당일 2함대사령부는 북한 경비정 684호가 북방한계선(NLL)을 지나 남하하자 우리 고속정 252편대(참수리 357, 358호)에 “차단하라”고 여러 번 지시한다. 그래서 북한 함정의 모든 화력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 잘못된 기동인 걸 보면서도 북한 함정에 접근한다.

세 번째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대북 햇볕정책과 안보에 대한 무관심이다. 사건 전날 어선으로 위장해 우리 함정을 정찰하러 NLL을 넘어온 북한의 전투원을 검거하고도 그냥 돌려보낸 것은 북한의 눈치를 본 정치권력 때문이다. 또한 서해에서 교전이 벌어졌는데도 월드컵 축구 폐막식과 한·일 정상회담 참석차 출국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은 안보를 내팽개친 나쁜 대통령의 상징이다. 이 세 가지 정도면 박동혁 병장이 왜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된다. 최소한 영화에서는 그렇다.

2010년 6월3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참수리-357호정 안보전시관’ 개관식에서 참석자들이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 함정의 기습 공격으로 침몰한 고속정 ‘참수리-357호’ 모형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2함대사령관은 ‘적함과 3km 거리 유지’ 지시”

그러나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가설’과 ‘사실’의 차이다. 위 세 가지 원인은 이제껏 군 내부의 어떤 1차 자료나 국가의 공식적 판단을 거치지 않고 일부 언론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일련의 가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즉 전부가 반박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우선 첫 번째 북한의 도발 징후가 묵살돼 일선 전투원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는 주장부터 보자.

그동안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된 이 주장에 따라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유족과 부상자 등 12명은 지난 2012년 김동신 전 국방부장관과 이남신 전 합참의장, 문정일 전 해군작전사령관 등 2002년 당시 군 지휘부 12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유족은 “당시 군은 통신 감청 등으로 북한군의 무력 도발 징후에 관한 ‘매우 민감하고 엄중한’ 특이 징후인 SI(Special Intelligence·특수 정보) 14자를 포착했음에도 예하 작전부대에 전달하지 않았다”며 “이 때문에 일선 지휘관과 병사에게 아무런 대비를 할 수 없도록 한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2년이 지난 2014년 11월 “당시 국방부장관 등이 북한의 공격 감행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일부러 숨겼다는 등의 사정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에서는 “매우 민감하고 엄중한(SI 14자) 첩보 등은 그 내용 자체가 엄중해도 이 같은 첩보를 취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북한이 가까운 시일 내에 도발하리란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었던 것인지에 관해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사정이 존재한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많은 군 관계자 역시 “당시에는 이 정보만이 아니라 수많은 첩보 사항이 혼재되어 있어 특수 정보 하나만을 특정해서 북한의 도발 정보로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필자가 당시 해군본부 관계자들을 취재한 결과 “문제의 특수 정보는 ‘판단된 정보’, 즉 블랙북의 형태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실제로 블랙북 이전의 ‘날 정보’ 형태로 해군본부와 2함대에도 전파되어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라는 뜻밖의 증언이 나왔다. 그렇다면 어쩌면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고 고의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는 영화의 주장은 가설로서는 유효할지 모르나, 팩트(사실)로서는 기각된다. 그 외에 아직까지 국가의 공식적인 판단은 나온 바 없다.

두 번째로 합참 작전예규와 교전수칙에서 명기한 ‘차단기동’에 대한 부분이다. 1999년 제1연평해전의 경우, 우리 고속정이 북한의 어뢰정에 고속으로 충돌하는 ‘밀어내기 기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 이처럼 이상한 작전이 실시된 것은 합참이 해역에서의 작전에 대해 직접 개입한 것으로, 대형 함정으로 북한 함정의 기동로를 막고 우리 고속정이 충돌하는 작전을 말한다. 이에 대해 당시 합참 관계자는 “제1연평해전은 어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 경비정이 엉켜 있는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제2연평해전의 경우 합참은 전혀 작전에 개입하지 않았고 해군 작전사령부 책임하에 2함대사령부가 한 작전”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필자가 당시 문정일 해군작전사령관(후에 참모총장으로 영전)에 문의해보니 “그렇게 저속(시속 6노트)으로 북한 함정에 근접하는 것은 당시 어떤 교전수칙, 어떤 작전지침에도 없었던 일”이라며 “왜 우리 고속정이 그런 기동을 했는지 내막은 2함대사령관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2함대사령관이었던 정병칠 예비역 소장은 2010년에 작고한 상황이다. 필자가 당시 그와 절친했던 예비역 해군 장교들에게 확인한 결과 “정병칠 사령관은 ‘적함과 3km 거리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며 “그 명령이 석연치 않은 사유로 이행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영화에서처럼 정병칠 함대사령관이 상황실에 앉아 있고 고속정 편대에 “차단하라”고 지시하는 장면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진실은 당시 교신기록을 공개하면 쉽게 규명된다. 그러나 해군은 이를 공개하지 않아 의혹을 키우고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진상 제대로 규명돼야

세 번째 북한에 굴욕적인 김대중 정부의 속성에 대한 논란이다. 차마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려운 것이 당시 김대중 정부가 이 사건의 전후 위기관리에 실패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우리 국군 장병이 희생된 만큼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충분히 합당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오전 10시쯤에 교전이 벌어졌는데, 오후 1시가 되도록 2함대가 청와대에는 물론 합참에도 우리 측에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보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합참의장은 오후가 되도록 국방회관에서 식사를 했고, 합참에 아무런 비상사태도 발령되지 않았다. 그나마 제대로 된 위기관리는 오후에 개최된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에서였다. 초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부터 청와대와 국방부 대응의 문제점은 딱히 무엇이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측에서도 전사 장병 영결식에 대통령이 가지 않은 것을 빼고는, 김 전 대통령이 훗날 회고록에서 밝힌 제2연평해전에 대한 북한의 사과 요구, 유족의 청와대 초청 위로, 영결식에 청와대 비서실장 참석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는 그런 감성만으로 좌우될 수 없다. 제2연평해전만큼 온갖 미스터리와 축소·은폐로 점철된 미지의 사건도 없다. 그렇다면 진상을 제대로 규명해야 할 일이다. 당시의 교신기록·전투상보는 다 어디로 갔는가. 왜 공개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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