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는 ‘친부의 나라’에 회초리 들었다
  • 김원식│미국 통신원 (.)
  • 승인 2015.08.05 18:06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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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방문해 ‘뒤처지지 말고 스스로 나아가라’ 쓴소리

 

“내가 미국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케냐로부터 여기 미국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3월1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 만찬 모임에서 한 말이다. 2008년 미국 대선 출마 당시부터 오바마에게는 케냐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대통령 출마 자격이 없다는 호사가들의 비난이 잇따랐다. 결국 오바마는 2011년 자신이 하와이에서 출생했음을 증명하는 ‘출생증명서’까지 제출했지만, 집권 2기 임기 후반기로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케냐 출생설’ 음모론에 시달리고 있다.

분노와 트라우마의 대상이었던 케냐

7월24일 케냐의 나이로비 국제공항에 도착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복 여동생인 아무마 오바마를 만나 포옹하고 있다. ⓒ AP연합

그런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친부의 나라인 케냐를 7월24일 방문했다. 사실 오바마에게 ‘케냐’란 나라의 존재는 머릿속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하와이에서 태어난 오바마가 어린 시절을 보낸 나라는 케냐가 아니라 인도네시아였다. 어머니인 스탠리 앤 던햄(미국 캔자스 주 출신)은 하와이 대학 유학 중에 오바마의 친부인 케냐 출신의 버락 오바마 1세를 만났고, 이들은 1959년 결혼해 1961년에 오바마를 낳았다. 하지만 오바마가 채 두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는 하버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이들 부부는 1964년 이혼했다. 오바마의 어머니는 다시 인도네시아 정유회사의 중역과 결혼하는 바람에 오바마는 다섯 살 때 하와이를 떠나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열 살 때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오바마는 1971년 하와이 호놀룰루로 돌아왔고 외조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오바마는 친아버지를 열 살 때 딱 한 번 만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오바마의 아버지는 이후 다시 모국 케냐로 돌아가 원래 있던 부인과 재결합해 오바마의 이복동생들을 낳았다. 케냐 출신 아버지를 둔 오바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양육을 받은 적도 없고 케냐라는 나라에는 가본 적도 없었던 셈이다.

오바마가 케냐를 처음 찾은 것은 만 27세로 하버드 대학 로스쿨에 입학하기 직전인 1988년 중반이다. 5주간 케냐를 여행하면서 그는 아버지의 친척들을 처음 만났다. 오바마가 청소년 시절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얼마나 혼란에 빠지고 고민해왔는가는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펴낸 자서전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 잘 드러나 있다. 오바마는 더 나아가 2008년 미국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자신이 고등학교 때 이미 술과 마약에 빠진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사실 오바마에게 케냐 출신 아버지는 자신을 낳자마자 버린 존재였으며, 그런 아버지가 어머니마저 버리고 하버드 대학에 유학을 한 다음 케냐로 다시 돌아갔으니, 오바마가 청소년 시절 케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전문가들은 오바마가 불우한 가족사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정체성 및 가치관의 충돌을 이겨내며 이를 승화해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뉴욕 컨설팅업체에서의 금융 전문 집필자 자리를 포기하고 시카고로 이주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승화시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였다. 시카고는 당시 제조업 중심지에서 서비스 중심으로 산업 구조가 변모하는 중이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흑인 빈민이 발생했다. 그곳에서 오바마는 교회 단체 등의 조직활동가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른바 변화를 위한 풀뿌리 운동에 적극적으로 발을 담갔다. 조직활동가로 경력을 쌓은 오바마는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변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입법과 정치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고 이는 그가 하버드 대학 로스쿨에 진학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바마는 하버드 대학 로스쿨 진학 직전 난생처음으로 케냐를 방문하면서 자신이 꼭 원대한 꿈(대통령)을 이루고 말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의 케냐 방문을 회상하면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정의로, 분노를 사랑으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뇌했다고 말한다. 즉, 자신의 청소년 시절 분노와 트라우마의 대상이었던 케냐를 방문하면서 이 분노를 사랑으로 바꾸고 자신이 미국에서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공직에 대해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오바마는 1996년 처음으로 선출직 의원 후보로 출마했고, 일리노이 주 시카고 지역구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마치 자신들의 대통령인 양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케냐 국민을 보면서 오바마는 무엇을 느꼈을까. 어찌 보면 케냐로부터 무엇 하나 받은 것이 없는 오바마였고, 원망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더구나 자신이 미국에서 필사적으로 추진해온 여러 차별적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케냐다. 그런 나라를 미국 대통령이 되어서 다시 방문한 오바마의 속마음은 남달랐다. 비록 케냐의 전통 춤인 리팔라를 춰가면서 케냐 국민의 환호에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한편으로는 단호했다. 그는 케냐의 앞길은 케냐 국민들이 이끌어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케냐의 미래는 곧 다가올 것이고 미래를 위해 어려운 선택들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더 나아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아프리카의 구원을 밖에서 구하고 아프리카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돌렸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오바마 “만연한 뇌물, 케냐 성장 막아”

오바마는 특히, 우후루 케냐타 케냐 대통령과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얼굴을 다소 찌푸려가며 케냐에 만연한 여성 폭력과 인종 갈등 문제를 제기했다. 심지어 그는 “만연한 뇌물이 케냐의 빠른 성장을 막는 최대 걸림돌이며, 국가가 성적인 문제로 시민을 차별해선 안 된다”며 부패 문제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금기시되는 동성애 문제까지 건드렸다. 케냐 국민의 환호를 반영하듯 오바마의 이복동생 아무마 오바마는 “오바마는 내 형제이며, 여러분의 형제이고, 우리의 아들”이라며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의 자랑”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오바마의 답사는 냉혹할 정도로 단호했다. 즉, 이제는 제발 뒤처지지 말고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다. 오바마는 “다음에는 양복을 벗고 다시 케냐에 올 것”이라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케냐를 다시 찾을 것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 핵심은 케냐는 자신의 친부의 나라일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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