꽹과리·징·장구·북… 백성의 신명이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5.08.05 18:10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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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 명인 김덕수에게 ‘우리 것’을 묻다

 

“우리 것은 이런 곡선의 절정이 나온단 말이에요”라고 말하며 인터뷰 도중 갑자기 일어나 손을 둥글게 말고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오금질을 한다. 사물놀이 명인 김덕수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교수의 몸짓에는 ‘덩실덩실’이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우아함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곡(曲)’ 속에 ‘직(直)’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사물놀이를 선보일 때의 그는 아무도 쫓아올 수 없는 속도로 장구채를 두드리며 거센 소리를 낸다.

가득 찬 스케줄 속에서 이뤄진 대면이었다. 7월31일 베를린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주가 있고, 8월4~9일 열리는 칠곡 세계사물놀이겨루기한마당도 맡아서 치러야 한다. 8월15일 광복 70주년 행사에서는 서울시청부터 광화문광장까지 2500명의 ‘길놀이’를 선두에서 이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구현할라치면 첫손에 꼽히지만 가장 한국적인 것을 등한시하는 현재를 안타까워하는 것도 첫손에 드는 김 교수다. 그가 머무르는 곳, 전국 최초의 전통연희상설극장인 광화문아트홀에서 7월27일 오전에 만났다.

 

ⓒ 시사저널 박은숙

다섯 살 때부터 무대에 섰다고 들었다.

남사당에서 다섯 살 때 데뷔했다. 대통령상도 받으며 천재 소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남사당 자체가 1964년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가 됐다. 그사이에 (문화재로 지정받을 정도로) 세상이 완전히 변한 것이다. 다섯 살에 데뷔했을 때만 해도 마을에서 마을로 걸어다니며 투어를 했는데 말이다. 그런 속에서 20대 중반쯤 되니까 고민이 되더라. 완전히 생활 속에서 다 없어졌다. 꽹과리, 징, 장구, 북이.

왜 갑자기 사라졌나.

새마을운동과 현대화 때문이었다. 그 전만 해도 잘나가는 스타플레이어로 내가 뽑혀갔는데, 어느 날 이게 딱 끊어지더라. 내가 설 곳이 없었다. 공연을 하려고 하면 잡아갔다. 어떤 조항을 적용받았느냐면 도로교통법 위반, 집시법 위반이었다. 우리가 하면 사람이 모이니까 그랬다.

모든 국악이 같은 상황이었나.

서민의 전유물이 아닌 국악이야 가서 판소리도 하고 페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가야금이나 대금, 거문고가 없었다. 마을 단위로 유일하게 있던 게 꽹과리, 징, 장구, 북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니 어떻게 하면 그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결국 무대 위로 본격적으로 올라와야 했다.

사물놀이를 만든 것도 군사정부 때(1978년)다.

새로운 장르 개발이 필요했다. 전통 음악을 바탕으로 하되, 극장 무대에서 할 수 있는 레퍼토리 말이다. 보통 40~50명이 하던 풍물을 가장 기본인 꽹과리·징·장구·북으로 하자, 그걸로 할 수 있는 모든 짓거리에 ‘놀이’자를 붙였다. 서양 음악 기준으로 보면 ‘타악기 앙상블 그룹’이 만들어진 거다. 무대를 대청마루라고 생각했고 로비를 앞마당, 극장 밖을 바깥마당이라고 여기면 됐다.

사물놀이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나.

지금 우리 한류나 한국 문화의 근본이 정리돼 있나? 가장 한국적인 게 세계적이라고 그러는데 그러면 가장 한국적인 것에 대해 정리가 됐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결국 생활 속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영위되는 게 가장 한국적인 거다.

사물놀이를 들고 해외에 일찍부터 나갔다.

사물놀이를 시작하면서 교육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우리의 신명, 우리의 덩실댐을 어떻게 표기하고 가르칠지를 고민해야 했다. 우리 나름으로 이론을 정립하고 그때부터 교재를 뿌렸다. 외국 공연을 가도 공연과 교육의 비중을 반반으로 두었다.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주로 한국인 교포였나.

아니다. 그 지역 음악대학에서 민족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다. 집중적으로 워크숍을 했다. 가면 황무지다. 일단 악기가 없었다. 악기를 줘야 계속 관심을 가지고 할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장구는 오동나무다. 채는 대나무 뿌리를 쓴다. 장구에는 옻칠을 한다. 옻이 뭔지, 오동나무가 뭔지, 대한민국 자연에서 오는,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사용됐던 가장 오래된 것들을 악기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해외에 갈 때마다 악기를 싣고 가야겠다.

장구를 들고 가려니 장구 값보다 운송료가 더 들더라. 그래서 오동나무는 플라스틱으로, 가죽은 섬유질로 개발해 3등분으로 분리해 가지고 나갔다. 가서 다시 조립했다. 그러기를 대략 10년 정도 했다. 5대양 6대주 다 가서 했다.

그런 고생의 효과는 어떻게 나타났나.

1984년부터 공식적으로 해외 음대 민족음악 칼리지에 사물놀이과가 생겼다. 영국 더럼 대학의 한 교수가 한국에 와서 우리에게 풍물 장구를 오랫동안 배워 갔다. 그 양반이 1984년 더럼 대학에서 사물놀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1978년에 사물놀이를 탄생시켰으니까 딱 6년이 지나서였다.

칠곡에 사물놀이 겨루기를 하러 오는 팀들은 그런 노력의 증거겠다.

결과이기도 하다. 충남 부여의 폐교된 학교를 사물놀이 교육원으로 만들었다. 200명이 묵을 수 있는 시설까지 해놓았다. 21년째다. 흑인이나 백인도 거쳐 갔다. 그동안 아마 1만명 이상 교육시켰을 거다. 이제는 해외 대학에서 사물놀이를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이 막 나오기 시작했다.

선구자 역할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

“진정한 예인이 되려면 물질과 명예에 급급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어렸을 때부터 대한민국 명인 선생님들이 줄곧 가르쳐줬다. 춥고 배고픈 거부터 배워야 된다는 걸 강조하셨다. 그 결과인지는 몰라도 내가 만든 모든 악보와 기록물 등을 다 무료로 오픈했다. 이제는 (저작권료를) 좀 받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웃음)

한예종에서 전통연희과에 적을 두고 있다.

전통연희과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 국악의 뿌리다. 전국에 있는 무속이나 풍물, 탈춤이나 예인 집단의 공연 등이 바로 전통 연희다.

기존의 국악과와 다른 것 같다.

1959년 서울대 음대 안에 처음 국악과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이후 지금까지 전국의 교과과정이 다 똑같다. 거기서 얘기하는 국악은 임금님 앞에서 했던 궁중정악 그리고 산조 같은 거다. 근데 그 과정에서 보면 서양을 따라간다. 오선보를 보면서 국악 관현악이 생기고 악기도 개량됐다. 모순점이 많다.

학생들은 언제부터 가르쳤나.

1982년 모 대학에 출강을 했다. 처음으로 꽹과리·징·장구·북을 가르치는 시간강사로 나갔다. 국악과에 가르치러 갔는데 내가 맡은 과목 이름이 뭐였냐면 ‘특수 타악기’였다. 우리 쪽 세계에서도 아직 양반문화에서 온 것들에 관해 정리가 안 된 것이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사물놀이와 국악은 다른 건가.

우스갯소리로 하면 ‘양반문화-상놈문화’의 차이다. 요즘도 상위 1%를 얘기하지 않나. 다를 게 없는 거다. 그러면 어떤 게 진짜 우리 것이냐는 물음이 남는다. 양반님들 했던 거는 우아하고 고상해서 ‘아악’이라고 하고, 그게 올바른 것이라고 해서 바를 정자를 써서 ‘정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백성들이 했던 것은 속되다고 해서 ‘속악’이라고 한다.

전통연희과가 각별할 것 같다.

국악과가 아닌, 일반적으로 진화돼서 우리가 즐기고 있는 모든 것에 뿌리가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무속을 가르치고 풍물을 가르치고 탈춤을 가르치고, 이런 건 국악과에 없다. 18년 동안 한예종에 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은 10개의 전공 실기 과목이 있다. 그것에 관한 교재를 만들었더니 딱 10권의 교재가 나오더라. 이제는 교재를 통해 전 세계에 전통 연희를 보급할 수 있게 된 거다.

지금까지 많은 것을 이뤘다. 더 이루고 싶은 게 남았나.

옛날 풍물 치는 거나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우리의 근본적인 미학을 꽹과리·징·장구·북을 통해 배우는 거다. 우리 자연을 배우게 되고 그 가락을 해석하게 되면 우리 철학이 나오는 거다. 그래서 마지막 꿈이 있다면 전 세계 퍼블릭 스쿨 음악교실에 꽹과리·징·장구·북이 있길 바라는 것이다.

최근에 보니 콜라보레이션을 많이 했더라.

젊은 애들하고 함께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홍대 앞 카페나 클럽에서 젊은 애들이 하게끔 유도해본 거다. ‘일렉트릭 사물놀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이미 여러 해 전부터 했던 거다. 과거 (신)해철이와는 음악 작업을 많이 했다. 이제는 똑같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신중현 선배가 생각난다.

사물놀이라면 록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7월31일 독일 베를린에 가서는 오케스트라와 협주를 한다. 아직도 도전인 셈이다. 이런 게 마당이고, 이게 최고의 교육이다. 협주하려면 우리 신명과 리듬을 배워야 한다. 에너지의 근본인 리듬이 꽹과리와 징, 장구와 북으로, 100% 우리 가락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거다. 그래서 이번 칠곡 세계사물놀이겨루기한마당에서는 거꾸로 제안했다. 드럼으로 사물놀이 가락을 치면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비트박스를 사물놀이 가락으로 해도 된다.

대회는 잘 준비되고 있나.

참가하는 사람이 많다. 이미 110개 단체가 넘었고, 그중 해외 참가팀이 19개국에서 온다. 비행기 값이 비싸서 조금만 도와주면 더 잘될 텐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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