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PD의 방송 수첩] 극적 구성과 역사적 사실 사이 ‘미묘한 줄타기’
  • 박진석│KBS PD (.)
  • 승인 2015.08.05 18:14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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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은 지금 시대 반영한 가장 현재적인 드라마

 

재미난 여론조사를 봤다. 한국갤럽이 매달 하는 ‘즐겨 보는 프로그램’ 정례 조사였다. 7월 조사에서 KBS1의 대하드라마 <징비록>이 9위에 올랐다고 한다. 1위인 <무한도전>을 비롯해 나머지 9개 프로그램이 모두 예능이었다는 점에서 유일한 드라마, 그것도 사극인 <징비록>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졌다.

한 주에 방송하는 TV 드라마의 편수를 세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지상파 드라마만 해도 20편이 넘고, 케이블 채널과 종편까지 합치면 그 수가 더욱 늘어난다. 가히 ‘드라마 왕국’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복 드라마’, 즉 ‘사극’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점이다. 심지어 업계에선 오랫동안 ‘사극불패’라는 말이 유효했다. 한복 입은 연기자만 나오면 극의 퀄리티와는 별개로 일단 채널을 고정하는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 업계의 판단이었다. 물론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어드밴티지’다.

KBS 대하드라마 의 촬영 현장의 모습.ⓒ KBS 제공

힘든 촬영에 고증까지…진 빠지는 제작진

드라마를 장르적 정의로 구분한다면, 통상 로맨틱코미디·스릴러·추리물 등 극의 성격에 따라 나누기 마련이다. 이런 기준에 따른다면 근현대 이전의 역사적 배경을 지니는 드라마를 모두 통칭해 ‘사극’으로 묶는 것은 조금 이질적이다. 본디 사극이라는 용어가 수년 전까지만 해도 ‘정통 사극’(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변용을 최소화하며 극화한)과 거의 동일시됐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역사물, 가상 역사물, 타임슬립(!), 팩션 등 역사를 소재로 활용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고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면서 사극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지만 막상 지칭하는 단어와 인식은 아직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것 같다.

제작진 처지에서는 통칭 장르 불문 사극이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마디로 찍기가 너무 힘들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떠한 사극이라도 우리가 사는 모습, 사는 배경에서 진행되는 현대물과 달리 모든 걸 창조해야 한다. 의상과 소품, 배경까지 최소한의 리얼리티는 구현해가며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렇다 보니 사극을 찍는 현장은 전국 각지에 흩어진 오픈 세트다.

일단 제작을 할라치면 출발부터 진이 빠진다. 현대물과 비슷한 제작 시간을 확보하려면 최소한 2~3시간은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한밤중에 출발해 현장에서 아침을 맞으면, 배우들은 배우들대로 주·조연 할 것 없이 남자는 피부를 망가뜨리는 인조 수염(수염을 붙이는 풀과 나중에 그 풀을 녹이는 약품이 매우 자극적이다), 여자는 머리를 짓누르는 가체(사극 좀 찍어 봤다 싶은 여배우는 자연스럽게 조선 건국부터 영조 시기까지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생긴다)를 갖춘다. 여기에 시간과 공을 들이고 고유의 미감은 있으되 기능성은 확연히 떨어지는 옛날 복식을 갖춰야 한다. 이러고서 산속, 바닷가, 허허벌판에서 찍다 보면 여름에는 더워 죽고 겨울에는 추워 죽는다.

B팀 연출로 참여했던 <전우치>라는 퓨전 사극에서는 한겨울에 찍던 마지막 주에 마이크 끝에 고드름이 실시간으로 매달려 NG가 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기에 ‘말’을 잘 듣지 않는 옵션이 탑재된 진짜 ‘말’이 출연하고, 화톳불, 화살, 칼, 대포 혹은 화승총이 등장할라치면 크고 작은 안전사고에 대한 위험이 우르르 딸려온다. ‘떼 지어 달려오는 기마부대는 현대전의 탱크와 같았을 것’이라는 역사교양 서적을 읽은 적이 있는데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 오프닝 타이틀을 연출하면서 이 내용을 현장학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전쟁 기록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불과(!) 40마리의 말로도 지축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린다.

배경은 과거, 하지만 가장 현재적인 드라마

이런 육체적 고생은 사극 중에서도, 특히 여전히 정통 사극을 표방하는 대하드라마를 기획하는 것에 비하면 차라리 낫다. 타 채널에 비해 공영방송 역할을 해온 KBS 1TV의 경우 ‘시청자에 대한 역사 교육을 책임진다!’는 자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대하드라마의 기획에서는 극적 구성과 역사적 사실 간에 미묘한 줄타기가 필요하다. 역사에 너무 치우치면 사실의 무게에 짓눌려 극 자체의 완성도는 날아가버린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극적 구성을 강조하다 보면 역사 왜곡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균형감에 대한 문제는 세종대왕, 충무공 이순신, 광개토대왕 등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소재일수록 더욱 뜨거운 감자가 된다.

그럼에도 대하사극이 시청자와 제작진 모두에게 주는 매력은 그것이 역설적으로 가장 현재적인 드라마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면 사회 분위기의 무의식적인 발로이든 대체적으로 대하드라마는 그 드라마가 방영하고 있는 동시대의 어떤 부분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제작비 부족을 이유로 1년 이상 편성이 되지 않았던 대하드라마가 KBS 1TV에서 부활한 것이 2010년 하반기였다. 재개한 시리즈는 일명 ‘CEO’ 시리즈로 삼국의 정복 군주에 대한 3부작이었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이 <정도전>과 <징비록>, 그리고 후속으로 내년에는 <장영실>이 준비되고 있다. 이름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초인적인 영웅 서사에서 인간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위인전의 느낌이 다소 있지만 말이다. <근초고왕> <광개토태왕> <대왕의 꿈> 세 시리즈가 왕조를 중심으로 군왕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였다면 <정도전>과 <징비록>은 국정 그 자체를 고민하고자 한 정치물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불안하고 고단한 시기가 지속될수록 영웅적 리더십을 꿈꾸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다음은 올바른 리더의 존재보다 무엇이 민생을 위한 것인가를 모색하는 ‘정치’ 그 자체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난 5년여 간 대하드라마가 걸어온 길이 우리들의 사회의식 그 자체를 반영하고 있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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