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얘기해도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었다”
  • 유지민 인턴기자 (.)
  • 승인 2015.08.12 19:20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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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의혹 해당 고교 현장 르포…학교 중앙현관에 징계 내용 가득 게시

 

폭염특보가 내려진 8월6일,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A 고등학교를 찾았다. 아파트 단지와 공원에 에워싸인 학교는 규모가 작았다. 화단 한쪽에 자리한 키 작은 개교 기념 식수가 2년 반 정도 된 학교의 짧은 나이를 알려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낮은 회색 교문이 좁은 틈만 내어준 채 학생들을 드문드문 밀어내기 시작했다. 여느 고3 학생들처럼 방학 보충수업을 마친 모습이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98일 남겨둔 날이었다. 더위와 싸우고 입시와 한창 씨름할 때다. 하지만 입시 준비 말고도 이 학교 학생들에게는 그동안 감내해야 했던 일이 하나 더 있다. 1년 6개월 넘게 지속돼왔던 일부 교사들의 성추행과 성희롱 의혹으로 학교는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13년에 개교한 이 학교에서 교장을 포함한 50대 남교사 5명이 여교사와 여학생을 상대로 상습 성추행 및 성희롱을 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여교사와 여학생이 각각 최소 8명과 20명으로 파악된다. 성희롱 발언 등 간접적인 피해자는 13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 일러스트 정찬동

교육청 특별감사 전까지 지속된 성범죄

개교 3년 차 학교에서 발생한 성범죄는 2년가량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가해자는 교장과 학교 창립 주요 멤버였던 50대 선임교사들이었다. 지난 7월14일 서울시교육청에 민원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 여학생이 특별활동 예체능반을 지도하는 B 교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사실을 학교에 신고했다. 이 교사는 성폭력고충처리위원회 책임교사였다.

시교육청이 특별감사에 착수하자 과거 범행 사실도 드러났다. 올해 부임한 C 교사도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성적 발언을 일삼고 20대 여교사를 성추행한 혐의가 드러났다.  2014년 2월 D 교사는 노래방 회식자리에서 동료 여교사를 성추행해 다른 학교로 전출됐고, 진학·진로 담당이었던 E 교사는 같은 해 2월부터 1년 넘게 여학생 6명 이상을 성추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교장 역시 직무유기와 교사 성추행 혐의로 직위해제됐다.

그러나 학교 내·외부에서는 이 사건을 종합적으로 인지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여학생은 “(남 교사들의 성범죄 사실을) 알고는 있었는데 가해자 선생님이 4명이나 되는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학교 인근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상인도 “많은 학생이 우리 가게를 이용하지만, 그들이 오가며 하는 말에서도 전혀 들은 바가 없다”며 “방송국 차량이 몰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고 전했다.

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던 요인에 대해 강압적인 학교 분위기가 크게 작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입시 위주 분위기와 대학 진학률이 신설 학교로서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교사는 “친밀한 관계형성보다는 벌점제로 학생지도를 했다. 강제전학, 퇴학 조치가 잦았던 것도 같은 이유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는 취재진이 직접 현장을 취재하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중앙현관 내부 오른쪽 벽면에 위치한 터치스크린에선 ‘제4차 대선도위원회 결과’에 따른 징계 내용이 게시되고 있었다. 대략 47명 이상의 학생이 특별교육·교내봉사·사회봉사·출석정지 등의 처분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엄격한 징계 관리로 학생들을 통제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한 관계자는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보통 3월에 전체 인원의 10%를 징계 처리하곤 한다”며 “이 학교의 벌점제는 유독 강력하다”고 말했다. 많은 교육 관계자는 지나친 입시 중심의 학교 운영엔 비교육적인 측면이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교장이 진학·진로 담당 E 교사에게 미온적 태도를 보인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여겨지고 있다. 해당 교사는 3개월간 직위해제를 당했으나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아 그 기간이 모두 지났다. 그사이 E 교사는 교내에서 열린 배드민턴 동호회 행사에 모습을 비쳤다. 학교 관계자는 “학생들 사이에서 ‘학교에 얘기해도 안 되고, 경찰에 고발해도 소용없다. 실망스럽다’는 무기력한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전했다. 성고민 상담교사 마저 가해자인 상황에서 학생들은 더 이상 고충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던 셈이다.

학생자치활동이 미흡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전교조가 학급회의를 진행한 횟수나 회의 주제 등을 확인한 결과, 학생자치활동이 형식적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학생회 활동과 학급회의 등은 학교에서 보장해야 할 학생들의 권리다. 학교의 주인으로서 자발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교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나갈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학생들이 결정권을 행사하는 문화가 교내에 정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직원단체 관계자는 “학생회 활동이 실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결과만 서류상으로 존재한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8월6일 방문한 서울 서대문구 A 고등학교. ⓒ 시사저널 임준선

“학생과 교사 모래알처럼 따로따로 흩어져”

교사들도 큰 교무실에 함께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교무실에 분산돼 있다고 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소통의 장이 형성되지 못한 것이 교사와 학생들이 속으로만 끙끙 앓을 수밖에 없던 또 다른 이유라는 설명이다. 조남규 전교조 서울지부 정책실장은 “교사들끼리도 최근에야 정보 공유가 되고 있다”면서 “학생과 교사가 모래알처럼 따로따로 흩어지는 현상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학부모 측에서도 항의와 우려가 쏟아진다. 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학생들을 더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성평등 의식 형성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학생들은 성추행과 성희롱이 만연하는 현장에 노출돼왔다. 강혜승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참학) 서울지부장은 “교육과정 속에 성평등 교육과 인권 문제가 녹아들어야 한다”며 “학생들이 성인으로 자랐을 때 선진국 수준의 민주시민 의식이 고양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교육단체협의회는 “교육청 수준에서 종합 대책이 세워진 만큼 진행 상황을 꼼꼼히 확인하며 예의주시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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