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강경파, 생존 차원에서 대남 도발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5.08.24 13:38
  • 호수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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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태 향방 따라 김정은이 이들 묵줄 죌 수도

남북 간 군사 충돌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평양 군부 핵심 엘리트들의 움직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남 대립각을 한껏 세우며 일전불사의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배경과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련의 대남 도발 사태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처형 등 군부에 대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숙청 국면에서 불거졌다는 측면에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일 시대의 선군정치에 이어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북한 권력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는 군부 세력의 움직임이 향후 남북 관계의 방향타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이번 남북한 충돌 국면은 지난 8월4일 경기도 파주 인근 비무장지대(DMZ)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목함지뢰가 폭발해 우리 군 부사관 2명이 부상하면서 촉발됐다. 국방부는 대북 응징 차원에서 2004년 6·4 합의에 따라 중단했던 대북 심리전용 확성기 방송을 11년 만에 재개했다. 정부가 공언한 ‘혹독한 대가’가 고작 대북 심리전 방송이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하지만 반응은 뜻밖이었다. 북한 군부는 우리 군의 조치에 발끈해 전방에 설치된 대북 방송용 확성기를 조준 격파하겠다고 위협했다. “대북 심리전은 본질에 있어 우리를 겨냥한 노골적인 침략전쟁 행위”라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우리 군대가 목숨으로 지켜가는 우리 사상과 제도를 허물고 우리 정권과 삶의 모든 영역을 찬탈하기 위한 악랄한 정치·군사적 도발”이라는 북한 조선중앙통신의 보도에서는 절박감마저 드러난다. 북한군 총참모부는 ‘48시간’이라는 시한까지 제시하며 중단을 압박했다.

그리고 8월21일 우리의 방송 스피커를 겨냥한 위협 조치로 보이는 포사격 도발을 실제로 감행했다. 우리 군 당국이 대북 대응 차원에서 북측을 향해 포사격을 가하자 북한 군부는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6월18일 고사포병 사격 경기를 참관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군 강경파 생존 차원에서 도발 수위 높여

잇단 대남 강경 드라이브 국면을 살펴보면 일단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지휘봉을 쥔 것으로 드러난다. 북한군 최고사령관이자 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인 그가 우리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격인 비상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준전시사태 선포 등 국면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지난 2013년 1월 김정은이 ‘국가 안전 및 대외 부문 일꾼 협의회’를 개최해 추가 핵실험 등의 조치를 논의한 적은 있지만 당 중앙군사위를 가동한 것은 처음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정은도 사태를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이 직접 나서 위기지수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배경에 북한 군부 강경파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눈길을 끈다. 그 중심에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자리하고 있다. 대표적인 군부 대남통인 김영철은 1960년대 북한군 15사단 DMZ 민경중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또 남북 고위급 회담과 군사회담 대표를 맡기도 했다. 이번 지뢰 도발도 김영철이 각본을 짜 김정은의 비준 아래 저질렀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박근혜 정부가 김정은 체제의 대남 압박이나 유화 전술에 녹록하지 않은 태도를 취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북한 군부가 목함지뢰 도발이라는 작품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상보다 후폭풍이 거센 데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군부 강경파가 생존 차원에서 도발 수위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장 상황이나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김영철이 상황을 부풀리거나 왜곡해 김정은에게 보고하고 군부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김영철은 8월20일 밤 김정은이 긴급 소집한 비상확대회의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관영 매체들이 전한 회의 진행 소식에는 “적들의 군사적 도발 행위의 경위와 진상, 전반적 적정에 대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정찰총국 보고에 대한 청취가 있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김정은 공포 정치에 극단적 선택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북한 군부 세력의 절박함이 한몫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군부 엘리트층은 최고 지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 후계자 시절인 2010년 3월 자행한 천안함 폭침 도발은 국제사회의 비난과 함께 북한의 발목을 꽁꽁 묶어버렸다. 대북 제재 차원의 5·24 조치는 아직까지도 김정은 체제의 순항을 막는 족쇄가 되고 있다. 연평도 포격 도발이나 무인기 침투 사건 등도 마찬가지다. 은밀한 매설을 통해 타격을 입히고, ‘대북 모략’으로 몰아가려던 목함지뢰 도발도 파편과 CCTV 영상 등이 공개되면서 북한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김정은 제1위원장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에 먹칠을 했고, 남한 내 대북 여론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김정은의 충동적 용인술과 공포 정치도 군부가 강경 일변도로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군부 과외교사로 아버지 김정일이 점지해준 리영호 총참모장은 집권 첫해 김정은에 의해 숙청됐다. 이를 신호탄으로 롤러코스터식 계급 강등과 승진 조치가 이어졌고, 인민무력부장과 총참모장 등 군부 요직이 수시로 교체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김정은의 정책 노선에 이견을 제시하거나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고사총에 의해 무참히 처형되거나 하루아침에 벽지 농장원으로 가족과 함께 추방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대남 온건 노선이나 대화파의 목소리가 살아남기는 어렵다.

북한 군부 강경파의 지뢰 도발로 휴전선에서는 대북 심리전 방송이 전면적으로 재개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체제 유지를 위해 가장 신경을 썼던 중단 합의가 백지화된 것이다. 군부의 어설픈 행동이 이런 결과를 자초한 셈이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의 위협 카드나 압박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제한적인 포격 도발이나 준전시사태 돌입 같은 위협 카드가 더 이상 먹혀들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번 사태의 향방에 따라 북한 군부 강경파들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 김영철 등 군부 핵심이 연출한 대남 도발 시나리오에 뒷심을 실어준 김정은이 향후 사태 진전을 지켜보며 어떤 판단을 내릴지가 관건이다. 북한의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거나 우리 정부의 대북 압박에 밀리는 형국이 될 경우 북한 군부는 매우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질 수 있다. 평양에 군부 숙청의 피바람이 불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2013년 봄 개성공단 폐쇄라는 무리수를 뒀다가 박근혜 정부의 강경 대응에 밀렸다. 결국 공단 재개를 요청하고 나서는 수모를 겪은 바 있다. 목함지뢰 도발과 심리전 재개라는 충돌 국면에서 북한 군부는 다시 악몽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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