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불빛 타고 노래가 흐르면 누군가 하나둘 멈춰 선다
  • 김회권 기자·박상희 인턴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5.08.27 11:33
  • 호수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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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커에게 듣는 ‘그들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유’

불빛으로 물든 강물을 따라간 서울 마포대교 아래 노란 가로등 밑에는 통기타를 치며 눈을 감은 채 한 버스커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옆사람은 작은 북을 쳤다. 그들은 <오늘 하루>라는 제목의 자작곡을 그 흔한 앰프 없이 들려줬다. ‘오늘 하루 수고했어요’라는 가사가 따뜻하게 와 닿는 노랫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연인들은 서로 몸을 기댄 채 감상했고 누군가는 급하게 오더니 빈자리에 앉았다. “잠깐 쉬었다 갈게요.” 버스커의 말에 자리를 뜨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버스킹을 한 지 5년 남짓 됐다는 그들은 공간이 넓고 작은 소리로도 공연할 수 있는 한강을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가 좋아서 하는 거죠. 실력이 부족해 팁박스도 놓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그들과 같은 버스커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홍대 앞이나 신촌, 또는 한강을 따라 자리를 펴는 거리의 악사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를 갖고 날것 그대로의 음악을 펼쳐 보이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우리는 오늘도 수행을 나간다”

“행복을 노래하는 세 청년이라고 소개하거든요. 우리 음악이 어떤 장르인지 고민했는데 답이 없더라고요. 그냥 밝은 노래, 행복을 줄 수 있는 노래를 하려고 해요.”

자전거 모양의 안경을 낀 세 사람은 스무 살 때 친구가 됐다. 한 음악학원, 한 선생님 밑에 모인 남자 셋은 음악을 하고 싶었고 한 팀을 이루었다. 음악은 하고 싶지만 공연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거리 공연을 본 후 무작정 악기를 들고 ‘어쿠스틱 데이’라는 이름으로 홍대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려면 잘 알려진 노래, 신나는 노래를 불러야 했다. 생목소리와 멜로디언, 네모난 카혼은 그들이 가진 무기였다. 자작곡은 일단 뒤로 물렸다. 대신 <Can’t take my eyes off you> <붉은 노을>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등을 불렀고 호응도 좋았다. 멜로디언과 카혼이라는 흔치 않은 구성을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그때가 2012년이었으니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처음에는 그냥 순수하게 우리 음악을 밖에서 한번 해보자고 시작했던 세 남자의 버스킹이었다. 1~2년쯤 지나고 팀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에는 자신들을 알리려고 버스킹을 시작했다. 팁박스는 관심도 없었고 놓지도 않았다. 그러다 기획사의 눈에 들었다. 셋이 낀 자전거 모양의 안경 때문에 ‘세 자전거’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지난해 4월 데뷔한 직후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6월쯤 되니까 회사도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버스킹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거리로 나오면서도 거리로 나오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슬픔의 시기에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나?’ 하지만 그렇게 나온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힘들다”고 말했다. 장사하는 분, 심지어 중·고등학생들까지도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버스킹을 하기로 했다. 행복을 줄 수 있는 노래를 하려고 했다. 앞에 놓인 팁박스는 의미가 없었다. “그때 들어왔던 팁은 지난해 수능 수험생들 쿠키 만들어주는 데 다 썼다, 하하하.”

세 자전거처럼 팁박스에 의미를 두지 않는 팀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저 작은 박스의 내용물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지속 가능한 음악 활동을 하는 데 중요한 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여름날 부산 해운대에는 전국의 버스커들이 몰린다. 부산의 로컬 밴드 곱창카레는 그런 가운데 “오늘도 수행 나간다”며 버스킹을 하기 위해 해운대 백사장으로 향한다. 수행을 나가기 전 어떤 음악을 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연습실에서 호흡을 맞추는 의식을 매일 거행한다. 거리에서 한다고 음악을 절대 대충 할 순 없다. “요즘에는 오래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취미나 홍보를 위해서 가볍게 나오는 팀이 대부분이고 계속 바뀐다. 심지어 MR을 틀어놓고 가사 보면서 노래 부르는 경우도 많다.” 버젓이 공연을 하고 있는데도 지근거리에 자리를 잡는, 불문율을 깨는 버스커도 적지 않다. 곱창카레의 멤버 이정민씨가 생각하는 요즘 해운대는 전쟁터다.

버스커가 늘어나자 자리다툼이 치열해졌다. 여름 성수기에는 10번 나가면 7번을 자리 잡지 못한 채 그냥 돌아와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해 떨어지기 전에 나가 자리를 잡는 게 고행길이다. 곱창카레는 요즘 해운대 백사장 가장 오른쪽인 조선호텔 근처에서 주로 공연을 하고 있다.

해운대 백사장을 걷다 발길을 멈춰 서는 이들은 냉정하다. 잘하지 않으면 앉아서 듣지도 않고 팁도 절대 주지 않는다. 관광지라 그런지 술김에 욕하는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곱창카레에게 그들은 정말 귀한 존재다. 버스킹은 그들에게 연습의 무대이자 새로운 곡을 듣는 대중의 반응을 알아볼 수 있는 리트머스지다.

공연할 곳 사라져 떠밀려나온 버스커도 많아

이들은 약 3시간 정도의 공연을 40~50분 단위로 세 번 끊어서 한다. 레퍼토리를 다 소화하면 관객을 다시 돌려보내고 잠시 쉴 짬을 가진 다음 반복한다. 여기는 해운대다. 학생들이 와서 구경할 수도 있고 외국인들이 발길을 멈출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레퍼토리는 가급적 다양하게 준비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한 타임이 끝나고 관객이 팁박스에 넣어주는 돈은 곱창카레 음악을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아마 해운대에서 우리 팀이 가장 많이 벌 거다. 평균적으로는 100명, 많이 모이면 500명까지 온다. 수익도 나쁘지 않다. 그만큼 노력을 많이 하니까.”

과거와 비교하면 거리에서 노래하는 사람은 정말 많아졌다. ‘버스커버스커’처럼 성공한 버스커가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생긴 결과일 수도 있다. 일부는 구조적인 문제를 말하기도 한다. 자발적으로 나오기보다는 떠밀려나오는 경향이 없지 않다는 뜻이다. “공연을 할 수 있는 클럽은 장사가 안되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설 수 있는 무대가 없어지다 보니 그런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오면서 우리 같은 밴드를 보고 버스킹을 하겠다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구조적인 문제를 거론할 정도로 홍대 앞 바닥을 잘 아는 7인조 사운드박스 멤버들은 2008년부터 버스킹을 했다. 나름 홍대 앞의 터줏대감이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쟤네들은 왜 길바닥에서 해?”라는 시선을 받았다. 그래도 계속했고 버스킹 붐이 일면서 홍대 앞 거리가 점점 버스커로 채워졌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런 문화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이 있어서 너무 좋다.”

어떻게 보면 ‘볼 사람은 봐라’가 버스킹이다. 공연장에서는 볼 수 없는 즉흥성과 돌발성에 빠진 관객도 있다. “무대가 없고 단이 없어서 눈높이도 비슷하고. 그런 게 좋다. 심지어 고춧가루(난입하는 관객)가 싫고 당황스러웠지만 관객이 재밌어 하기도 하고 그런 혼란을 수습하는 재미도 생겨버렸다.” 사운드박스에게 버스킹은 활어처럼 살아 숨 쉬는 존재다.

처음 버스킹을 할 때는 이런 생각을 했단다. ‘이 사람들은 날 보러 온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지나가다 봤을 뿐.’ 하지만 노래하는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이 사람들이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얘기를 들어주러 찾아온 사람은 아니지만, 듣고 있는 사람에서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나중에는 팬이라는 이름으로도 될 수 있고.” 그래서 이들의 공연은 간절하다. 그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아야 하고, 그들을 사로잡아야 하는 숙제가 생겨서다.

“3분짜리 곡 하나 위해 여러 날 합주해야” 

사운드박스는 버스킹을 하기 전에 페이스북 페이지에 공지를 올리고 나간다. 옛날에는 버스킹이 끝나면 관객들과 라면을 먹으러 가고 시험은 잘 봤는지 물으며 좀 더 직접적으로 소통했다. 요즘은 그런 게 사라졌다. “요새는 만나서도 카톡 하는 시대라 그런지 페북 메시지가 온다든지, 매개체를 통해 표현하는 것 같다. 더 많은 사람이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알아주는 건 고마운데 가족적이고 소규모였던 옛날을 그리워하는 팬도 있다.”

사운드박스에 비하면 지난해부터 버스킹을 시작한 하드슈가는 신생아다. 그래서 관객의 직접적인 피드백이 신기할 따름이다. “한강에서 버스킹을 할 때도 있는데 한번은 관객이 사진을 찍더라. 페이스북 페이지가 있다고 하니까 그 사진을 거기다 올려주셨다.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기억에 남았다.”

“알려지려고” “누군가 들어줘야 음악은 가치가 있으니까” “클럽에서는 이런 게 쉽지 않으니까”. 하드슈가가 버스킹을 하는 이유는 많다. 이들은 클럽에서 공연을 하다 버스킹을 하게 된 경우다. “클럽에서 공연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막 사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를 잘 모르는데 누가 돈 주고 티켓 사가지고 오겠나. 그래서 돈 안 받더라도 밖에서 알려지기라도 하려고 버스킹을 시작했다.” 그들에게 버스킹은 일종의 ‘찾아가는 서비스’인 셈이다.

첫 버스킹 공연은 한강에서 시작했다. 장비는 빌렸다. 적지 않은 사람이 발길을 멈추고 하드슈가의 공연을 지켜봤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타통에 팁박스를 하나 준비했다. 그래서 얻은 그날의 수입은? “고작 2000원 정도였다, 하하.”

멤버 권유중씨는 직장인이지만 “여기서 공연하니까 한 번 보러들 와달라”는 말을 회사에서 하지 못한다. “일은 안 하고 논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이라는 게 권씨의 우려다. 거리를 걷는 수많은 관객 중 거리 악사들을 팔자 좋은 베짱이처럼 바라본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 시선들에 서운함을 느낀 적도 있다. “사람들은 3분짜리 노래를 듣고 쓱 가지만 우리는 그 3분짜리를 완성하기 위해 며칠을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톤을 잡고 합을 맞추기 위해 하드슈가는 지난 주말에도 8~9시간 정도 합주했다.

“버스킹은 우리 팀을 지속하게 만들어줬다” “버스킹을 하면서 성장통도 있었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성장했다는 점이다” “공연을 힘들게 끝내고 우리 음악이 너무 좋다고 함께 사진 찍어달라고 관객들이 말해줄 때, 그때가 제일 기뻤고 그 힘으로 음악을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여름밤 거리의 음악은 이처럼 인고의 시간이 빚어내고 치열한 고민들의 숙성을 통해 탄생한다. 마냥 흘리고 지나치기보다 좀 더 교감하며 다가가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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