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학살자의 가면을 드러내다
  • 이은선│ 매거진 M 기자 (.)
  • 승인 2015.09.09 16:49
  • 호수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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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대학살의 기억 다룬 조슈아 오펜하이머 <침묵의 시선>

수치심과 죄책감을 깨닫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때로는 고통스러울 가치가 있는, 혹은 고통스러워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그건 인간이기에, 인간으로 살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침묵의 시선>은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인간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죄를 지었던 이들은 현재 그 과거를 어떤 모습으로 대면할까. 그들에게 죄책감과 수치심이란 무엇일까. 이 다큐는 지난해 개봉한 <액트 오브 킬링>과 마주 보는 형식을 취한다. 두 다큐 모두 미국인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연출했고, 1965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인도네시아에서 100만명 이상이 희생됐던 민간인 대학살을 다룬다.

앞서 개봉한 <액트 오브 킬링>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다. 이 다큐는 가해자가 자랑스럽게 밝히는 ‘살인의 추억’이다. 그 배경에는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수하르토 장군 세력이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소작농·지식인·중국인을 포함해 평범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이 끔찍한 일의 핑계가 된 것은 군부 세력에 불만을 품은 젊은 장교 조직이 1965년 10월1일 장군 여섯 명을 암살한 사건이다.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수하르토는 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이 일에 연루됐다고 비난했다. 피의 학살이 이어지는 동안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악마로 묘사하며 자신을 국가의 구원자로 포장했다. 반공(反共) 폭력은 그렇게 정당화되었고 권력이 됐다.

앞서 <액트 오브 킬링>이 주목했던 이는 학살을 주도했던 민병대 리더 안와르 콩고다. 그는 공산화를 막았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 일각에서 존경까지 받는 인물이다. 이 다큐는 자신의 ‘업적’을 영화로 남기고 싶어 하는 안와르 콩고가 당시를 재연하는 과정을 담았다. 살인자가 갱스터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는 괴기한 풍경은 그가 거꾸로 피해자의 입장을 연기하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고문을 받던 피해자를 연기하던 안와르 콩고는 두려움에 떨며 촬영을 중단한다.

영화 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저는 당신이 죽인 람리의 동생입니다”

오펜하이머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안와르 콩고 같은 이들이 활개를 치고 살아가는 인도네시아의 현재가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쾌락의 정원>을 떠올리게 하는 기이한 지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침묵의 시선>은 그 지옥 안에서 안와르 콩고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디의 여정을 쫓는다. 그는 대학살 희생자 람리의 동생이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났던 학살의 여파로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가족, 그리고 여전히 대학살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가던 아디는 가해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다.

그의 형 람리는 상징적 인물이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100만명 중 유일하게 목격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칼에 찔리고 배가 찢어진 상태로 간신히 집까지 기어서 온 그를 가해자들은 다음 날 아침 “병원에 데려가겠다”며 끌고 가 기어이 잔인하게 살해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카메라는 그런 형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는 아디를 비춘다. 그는 가해자가 자랑스럽게 자신의 과거를 재연하던 순간의 영상을 지켜보고 가해자들과 그의 가족을 찾아가 질문하고 듣는다. “저는 당신이 죽인 람리의 동생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밝힌 아디와 마주 앉은 사람 사이에는 불편하고 긴 침묵이 흐른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저릿하게 전해져온다. <침묵의 시선>은 그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이 모습을 똑똑히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죽은 사람은 있었지만 진실은 어디에도 없던 피의 학살. 수십 년이 흘러 그 과거를 제대로 응시할 것을 요구한다.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다큐가 아니다. 이 연작 다큐는 대학살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파헤치는 ‘현재’에 관한 이야기다. 진실을 가린 공포 위에 지어진 사회가 그 속은 얼마나 형편없이 찢겨 있는지 비추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가해자와 죄인처럼 움츠려 사는 피해자를 대조하며 질문을 던진다. 지금 여기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냐고. 이 풍경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고.

안경사인 아디는 노인이 된 가해자들을 인터뷰하러 다니면서 일일이 그들의 시력을 재고 안경을 맞춰준다. 아디의 이런 행위와 그가 형의 죽음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공포와 거짓에 가려 있는 그들의 눈을 밝히기 위함이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여전히 진실을 바라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잘못을 시대의 탓으로 돌리거나, 질문의 의미를 왜곡한다. 아디는 “과거는 과거이니 묻어 두라”는 이들로부터 사과 받는 데 실패한다. 그러면서 <침묵의 시선>은 그 실패를 통해 인도네시아 사회 전체에 퍼진 공포의 심연이 얼마나 깊은지를 포착한다.

이 다큐를 본다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러나 이 침묵을 똑바로 기억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침묵의 시선>은 침묵이 왜 깨져야만 하는지를 알게 하고, 우리가 과연 그 끔찍한 재앙의 과거와는 무관한 세계에 살고 있는지, 혹시 우리가 폭력으로 얼룩진 삶 안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아닌지 반문하게 만든다.

인도네시아 뒤흔든 대학살의 필름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인도네시아 대학살에 관한 영화를 더는 만들지 않겠다고 밝혔다. <액트 오브 킬링>이 정(正), <침묵의 시선>이 반(反)이라면 이를 통해 달라질 인도네시아의 미래가 합(合)이라는 게 그 이유다. 이미 그 반향은 일어나고 있다. <액트 오브 킬링>은 인도네시아에서 비밀리에 상영을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수천 번 이상 상영됐고, 최종적으로는 인터넷을 통해 인도네시아어 버전을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인도네시아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언론이 이 영화의 향방을 주시했고, 사람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다큐는 전 세계에서 70개 이상의 상을 휩쓸었다.

2014년 12월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맞춰 <침묵의 시선>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개봉됐다. 젊은이들은 학교와 기관에 의해 세뇌되어 갖고 있던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꿔나갔다. 경찰과 군대가 폭력 사태를 경고하며 상영 취소를 요구해 실제로 취소되기도 했고, 공식 기관의 검열을 통해 영화관 상영이 전면 금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액트 오브 킬링>이 봉인된 과거를 깨뜨리는 시도였다면, <침묵의 시선>은 사람들의 눈과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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