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피디의 방송수첩] “빈둥거려야 재미있는 이야기 나오더라”
  • 박진석 | KBSPD (.)
  • 승인 2015.09.16 20:20
  • 호수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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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홍수 시대에 ‘이야기’ 고민하는 연출자

풍경 하나. TV를 보니 하단에 공지용 자막이 뜬다. KBS 신입사원 공개 채용 공고다. 10년 전과 별 차이 없이 지상파 방송사의 이런 공채 공고가 뜨면, 응시자는 구름같이 몰려든다. 업계 내에서는 정말로 진지하게 ‘지상파 드라마의 위기’를 논하는 것이 무색하다. 필자 역시 ‘운칠기삼’이라는 느낌으로,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내 평생에 쓸 행운은 다 써버렸구나’ 하는 느낌으로 공채 드라마 PD가 되었더랬다.

풍경 둘. 입사하고 몇 년쯤 지나, 조연출 일로 숙직실과 편집실을 오가느라 한창 바쁠 때였다.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하도 안부전화가 뜸하니 먼저 전화를 하신 참이었다. 조심스레 받자 대뜸 물어보시는 말씀이, “도대체 드라마 PD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는 거였다. 대본을 쓰는 것도 아니고, 직접 카메라를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텔레비전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 어쩜 그렇게 집에 전화 한 통 할 새 없이 바쁘냐는 질책이 이어진다. 어디서부터 설명해드려야 할지 말문이 턱 막혔다. 올해도 지상파 드라마 PD를 꿈꾸는 불특정 다수 지망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물론 여전히 아들의 직업을 정확히 모르시는 우리 아버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 일러스트 김세중

한 편의 드라마가 나오기까지는 촬영, 조명, 음향, 진행, 장소 섭외, 분장, 미용, 소품, 세트, 보조 출연, 연기자, 연기자의 매니저, 액션팀, 특수효과 등등 촬영 현장에서 직접 제작하는 사람들과 CG, 색보정, 음악, 오디오 믹싱, 영상 편집, 종합 제작 등등의 후반 작업을 담당하는 인원들처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이들이 담당하는 각자 고유의 영역은 대체할 수 없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어느 한 분야에 관해 깊게 알고 있지도 못하면서 이 모든 분야에 참견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이가 있으니 그게 바로 연출자다. 그리고 연출자와 이들을 (계약이라는 현실적 약속 말고) 엮어주는 핵심 아이템이자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가 대본이다. 정리하면 연출자는 대본을 영상으로 ‘번역’해주는 사람이며, 번역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director)이다.

빈둥거려야 좋은 대본이 만들어지는 역설

이렇게 써놓으면 무언가 그럴듯한데, 이것이 드라마 PD의 삶을 제대로 정의하는 표현일까. 사실 어떤 드라마 PD도 1년 내내 제작 현장에 나가 있지는 않는다. 16부작 미니시리즈의 경우 방송 기간이 두 달임을 감안하면 촬영에 매진하는 시간은 방송 전 촬영 기간을 두 달 정도로 잡는다고 해도(그나마도 요즈음은 사전 촬영 기간이 매우 짧아지는 추세다) 나머지 기간은 촬영 현장에 있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사실 두 달간 방송되는 미니시리즈든, 6개월간 방송되는 연속극이든, 일단 프로그램을 한 편 끝내면 체력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나 한 해 안에 바로 다음 프로그램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이런 연유로 제작 현장에 있지 않는 드라마 PD는 사무실에 앉아 책을 읽거나, 만화를 보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 전체 인원 중 비율로 보나, 한 개인의 시간 비중으로 보나 제작 현장보다는 이쪽이 더 드라마 PD의 일상에 가깝다.

‘굵고 짧게 일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뺀들뺀들 노는 직업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기간이야말로 드라마 PD의 일상을, 혹은 드라마 PD가 하는 일의 핵심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다.

드라마 PD는 빈둥거리는 사람이다. 조직을 운영하는 처지에서는 손대고 싶어서 근질근질할 수도 있는 존재다. 오늘도 시간을 쪼개가며 상사의 눈치 보고 성과를 내느라 고단한 직장인이 보기에는 ‘세상 편하게 산다’는 비난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아니 좀 더 나아가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PD를 만들려면 좀 빈둥거리게 내버려두는 게 낫다.

드라마 PD가 하는 일의 핵심이자 출발점은 앞서 말했던 제작 현장이 만들어지는 뿌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제작 인력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핵심 아이템, 바로 대본이다. 즉, ‘어떤 대본을 만들 것인가’에서 드라마 PD의 일은 시작된다. 대본을 ‘쓰는 것’이 아닌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대본을 쓰는 사람은 당연히 작가지만(드라마 PD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매우 드물다) 업계에 나와 있는 수많은 대본 초고 혹은 소재 중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발전시켜갈지, 혹은 어떤 단순한 아이디어에 살을 붙여 대본으로 만들지를 생각하는 것이 드라마 PD의 일이다. 같은 초고, 혹은 엇비슷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더라도 어떤 작가와 연출자가 조합을 이루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대본이 만들어진다.

“다른 사람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쓰나요?”

다양한 책을 읽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도 결국 이를 위한 것이다.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로 끝나는 우스갯소리는 연애 지침서만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연애의 오의(奧義)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대본 역시 마찬가지다. 훌륭한 시나리오 작법서가 넘쳐나지만 이를 독파한다 해서 재미있는 대본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다양한 ‘빈둥거림’은 거창하게 말한다면 ‘영감을 얻기 위한’ 활동이지만, 정확하게 말한다면 다른 이들이 쓴 이야기들은 어떤 방식으로 재미를 이끌어내는지, 혹은 반대로 어떤 부분에서 흥미가 떨어지는지를 계속 짚어나가는 일이다. 본디 ‘재미’라는 것에 왕도(王道)가 없다 보니 이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겉으론 빈둥거리되 속으론 심란하다. ‘이 책, 재미있는데! 과연 비결이 뭐지?’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면 결국 어떤 것도 제대로 즐기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만약 세상에 ‘관객을 반드시 사로잡는 시나리오의 비법’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꽤나 많은 PD가 영혼이라도 내놓고 사 볼 것이다. 필자 역시 올해 하반기에 또 다른 단막극을 준비하고 있는데, 작가가 써놓은 초고를 읽고, 이 대본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려고 고민하는 중이다.

사람들이 이야기의 어떤 지점을 좋아하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들을지를 고민하는 것. 결국 그것이 드라마 PD가 하는 일의 핵심이고, 이런 노력과 고민은 결국 옛날 옛적 저잣거리 전기수(傳奇)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굳이 누군가가 다시 나의 일을 물어본다면(아버지를 포함해서) 이렇게 간단히 답해야겠다. “그냥, 이야기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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