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침략전쟁에 조선인 내몰았는데 애국지사?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5.09.22 10:01
  • 호수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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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부친 김용주씨 ‘친일 행적’ 논란

발단은 한 권의 책이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인 김용주씨(1985년 작고·이하 존칭 생략)의 평전 <강을 건너는 산>이 지난 8월15일 출간되자 그를 둘러싼 해묵은 친일 행적 논란이 다시 촉발된 것이다. 평전은 친일 논란을 빚은 김용주의 삶을 ‘극일(克日)로 이겨낸 망국의 한’이라고 요약했다. 그동안 김용주의 친일 행적은 학계를 넘어 정치권에서도 의혹과 논란의 대상이었다. 김 대표는 2013년 8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선친의 친일 행적 시비에 대해 “지금까지는 무시하거나 관용으로 대했지만 이제는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거나 고소 등 조치를 할 계획”이라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김용주 평전이 출간되자마자 친일 연구가와 관련 단체가 즉각 반발했다. 평전이 김용주의 친일 행적을 단순히 부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김용주를 애국지사로 미화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결국 친일 문제 전문 근현대사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는 평전 출간 한 달여 만인 지난 9월17일 김용주의 친일 행적과 근거 자료를 공개하고 평전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징병제 실시를 감사하는 1943년 9월8일자 아사히신문 광고.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이 광고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씨(사진·창씨명 金田龍周)의 기명 광고로 실렸다.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일제 시기의 문헌 자료 등을 근거로 볼 때, 김용주의 친일 행위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매우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면모를 띠고 있다”며 “평전 <강을 건너는 산>은 김용주의 자서전 <나의 회고록 풍운시대 80년>을 거의 전재하다시피 하고 사실관계의 오류와 근거 없는 황당한 주장으로 객관성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창씨명 金田龍周·가네다 류슈)의 친일 행적과 관련해 1930~40년대 경북도 도회 의원으로 활동할 당시의 친일 언행과 일제 침략전쟁을 위한 협력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 활동 등을 주요 근거로 삼았다. 연구소에 따르면, 김용주는 1937년 5월 경북도 도회 의원(영일군)으로 선출됐다. 도회(道會)는 일제가 지방자치를 표방하며 도에 만든 지방기구였다. 하지만 연구소는 당시 도회가 오늘날의 지방의회와는 달리 지방자치기구로서의 기능과 권한을 온전히 갖지 못한 자문기구 내지 단순 의결기구 정도였다고 밝혔다.

“김용주의 친일은 자발적·적극적”

김용주가 도회 의원으로 활동할 무렵이던 1940년 2월27일자 동아일보 석간 7면 보도에 따르면, 그는 1940년 2월23일 제12회 경북도 도회 회의에 참석해 “설치를 고려하는 국체명징관 내에는 내선 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려야 한다”고 발언했다. 국체명징관은 국체명징(國體明徵), 즉 ‘황도(皇道) 정신의 보급’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촉진하려고 세운 건물이다. 1941년 9월 일본동맹통신사의 자료에 따르면, 김용주는 대구국체명징관에 1000원, 대구신사(神社)에 2000원 등 현재 가치로 3000만원 상당의 돈을 헌납했다.

“자식을 야스쿠니에 모실 영광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다른 자료를 보면 김용주의 친일 언행은 더욱 강렬한 인상을 준다. 1943년 10월2일 김용주는 ‘징병제 시행 감사 적(敵)미영 격멸 선양전선 공직자 대회’에 참석해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 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면서 구체적인 5가지 방안까지 조목조목 제시했다.

당시 김용주의 친일 발언은 단순히 일제에 동조하는 수준에 그쳤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구석이 많다. 아래는 당시 그가 대회에 참석해서 한 말이다.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야 모든 것을 신께 귀일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용주는 당시 일본 가마쿠라(鎌倉) 시대 말기 무장으로서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의 상징적 존재로 알려진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와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메이지 유신을 거론하며 “우리는 이처럼 의용 충렬한 선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 자손인 자가 분투하여 굳건한 각오를 갖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도회 의원 신분이었던 김용주의 친일 발언은 신문 기사에 소개되면서 일제의 조선 침략과 전쟁 협조를 위한 홍보 수단으로 활용됐다.

김용주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조선인의 징병에 열을 올리거나, 군용기 헌납을 촉구하는 모금 활동에 공을 들인 흔적도 자료에서 나타난다. 아사히(朝日)신문 중선판(中鮮版) 1943년 9월8일자 4면에 실린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 광고주 명단에는 당시 포항항운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대표이사)이었던 김용주의 이름이 기재돼 있다.

김용주가 일제의 ‘애국기(愛國機) 헌납 운동’에도 전력을 쏟았다는 점이 다른 기명 광고에서도 확인된다. 일제 말기까지 지역의 친일파들이 앞장서 군용기 헌납을 추진했는데 아사히신문 남선판(南鮮版) 1944년 7월9일자 4면에는 김용주를 포함한 지역유지 4명과 조합 2곳 명의로 애국기 헌납 광고가 실렸다.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이라는 제목의 이 광고에서 김용주 등은 애국기 헌납을 위한 모금을 독려했다. 1945년 김용주가 도회 의원으로 있던 경북 영일군에서만 기금 123만9000원(현재 가치 123억원)을 모은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 기금으로 영일군 지역은 전투기 14대를 일제에 헌납했다.

그동안 김무성 대표 측은 선친의 친일 행적 논란에 대해 “(일제 침략기) 당시 경북 도회 의원들은 조선인 농민들의 편에 서서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했고 사재를 털어 한글 야학을 설립하고 조선상인회를 설립하는 등 애국적인 삶을 살았다”면서 “친일인명사전에도 (김용주의 이름이) 없으므로 친일파가 아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누락에 대해서는 “2009년 출간 당시 재원과 자료의 부족으로 해외와 지방의 친일반민족 행위를 전면 조사할 수 없었다. 김용주 건은 추가 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보류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연구소는 또 “김용주가 친일반민족 행위자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김 대표가 공당의 대표이자 대권 행보자로서 선친의 친일 행적과 관련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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