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에 기술 뺏겨도 핀테크 기업은 속수무책
  • 민보름 기자 (dahl@sisabiz.com)
  • 승인 2015.09.25 18:52
  • 호수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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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도 미비로 입 다무는 피해 기업들, 해외로 피난 가기도
우리은행 '원터치리모콘' 설명 페이지

표세진 비이소프트 사장은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표세진 사장은 금융 업계에선 유명인사다. 핀테크, 특히 보안 솔루션 업계에서 중소기업이 은행과 싸운 사례는 드물다. 표 사장은 우리은행이 자사 보안 솔루션 기술을 훔쳤다고 주장한다.

비이소프트는 지난해 새로운 보안인증 기술을 개발했다. 은행 계좌 사용자가 스마트폰에 설치된 ‘유니키’에서 ‘온(ON)’을 설정해야 금융거래가 가능하다. 표 사장은 이를 공급하기 위해 지난해 3월부터 우리은행과 1년 넘게 협의했다.

그러나 4월 6일 우리은행이 유사 서비스를 독자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원터치리모콘’을 만들었다는 우리은행은 발표 당일과 그 다음날에도 표 사장에게 기술 관련 자료를 요청했다. 표 사장은 모든 과정을 언론에 공개했다. 우리은행은 표 사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비이소프트 같은 사례는 흔하다. 최근 각광 받는 한 핀테크 벤처 기업 역시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이 업체는 자기 서비스를 홍보하기 위해 금융기관 이곳저곳을 다니며 기술에 대해 설명했다. 결국 대형 쇼핑몰이 이를 도입하면서 회사는 유명세를 탔다.

이곳 관계자는 “우리가 협력을 요청했던 모 카드사가 유사 서비스를 내놨다”고 전했다. 실제로 기자는 한 행사에서 그 유사 서비스를 발견했다. 체험해 본 결과 두 서비스는 표면적으로 다를 게 없었다. 최초로 서비스를 개발한 업체는 비이소프트와 달리 대응하지 않고 있다.

◇ 왜 뺏고 뺏기나

핀테크와 보안이 금융권의 관심사가 된 것은 최근이다. 개인정보 유출사태와 ‘창조경제’, ‘천송이 코트’로 상징되는 정부 시책때문이다. 덕분에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문제는 금융권의 인식이다. 금융기관은 성과를 내려한다. 위에 언급된 카드사는 정기적으로 회사에 변리사를 불러 내부에서 개발한 기술을 심사받고 있었다. 핀테크 부서 구성원에겐 압박이 가해진다. 제대로 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면 문책을 받는다는 말도 나돈다.

금융기관 내부인들에겐 보신주의가 팽배하다. 핀테크가 유행을 타면서 괜찮은 관련 기술을 발표해 대대적으로 홍보하면 성과를 낸 당사자에게 승진 등 보상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중소기업에 돈 주고 써야할 기술을 뺏으면 예산도 절약된다.

기업이 한번 기술을 뺏기면 그 기술로 다른 업체와 계약하기 힘들다. 우리은행이 원터치리모콘 서비스 개발을 발표한 후 표 사장은 해당 서비스 제공 협의를 하고 있던 타 기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화한 담당자는 “우리도 자체개발 하겠다”면서 기술자료를 요구하고 특허내용도 달라고 했다.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같은 서비스를 개발하겠다는 뜻이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그런 사례는 흔하다”면서 “승진 못한 지 오래됐는데 기술개발 실적이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생각하면 절박한 입장에서 그런 일이라도 하게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기술 탈취를 당한 업체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다. 핀테크·보안 솔루션 업체 입장에서 금융기관은 ‘제 1 고객’이다. 핀테크 서비스를 시작하려면 은행이 문을 열어줘야 한다. 보안 솔루션도 마찬가지다. 고객 정보보호, 시스템 보안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곳이 금융기관이기 때문이다.

보안성 심의도 이제 금융기관 각자가 자체적으로 심사하게 됐다. 지난 1월부터 금융감독원이 보안성 심의 권한을 일선 금융기관으로 넘겼기 때문이다. 이 심의를 통과하는 업체만 해당 기관에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다.

갖가지 이유 때문에 업체들은 금융기관이 유사기술을 개발해도 항의하기 힘들다. 대기업의 기술탈취 사례보다 금융권 사례가 알려지지 않는 이유다.

◇ 팔짱낀 정부, 허술한 법·규제

법·규정 미비로 피해 기업은 구제를 받기 힘들다. 최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중소기업이 특허침해 소송에서 대기업에 승소한 사례는 0%다.

지적재산권을 침해당했을 때 소송비용은 보통 억대로 든다. 우선 양측의 기술자료가 동일한 지를 보는 감정비용이 수천만원이다. 재판과정에서 재감정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이렇게 승소하더라도 대법원까지 가면 3~4년 걸린다. 손해배상으로 받을 수 있는 돈도 채 1억 원이 안 된다. 전문가들은 미국 법원에선 침해 기업이 번 이익 전부를 손해로 본다고 지적한다. 기술을 탈취한 기업이 문을 닫아야할 정도로 계상금액이 큰 경우도 있다.

김승완 변리사는 “국내 판검사들이 일도 많고 전문성이 떨어진다”면서 “재판 결과에 부담을 느껴 특허 침해를 인정하거나 손해를 산정하는데 보수적인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중소기업은 기술 침해를 당해도 소송하기 힘들고 운 좋게 승소해도 얻는 게 없는 셈이다.

그나마 특허를 등록하지 못하고 특허출원만 한 경우엔 기술에 대한 법적 권한도 주장하기 힘들다. 그러나 특허가 등록되기 까진 평균 14개월에서 16개월이 소요된다. 변화가 빠른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서비스 계약을 논의하지 않고 1년 넘게 특허 등록만 기다리기는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사법부 대신 행정부가 기술 침해를 강력하게 단속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정부 기관들은 일을 미루기 바쁘다.

표 사장은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공공기관이 없다”고 말한다.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는 자기 업무가 아니라며 도와주지 않았다.

박정만 변호사는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법이 미비하다보니 주무관청이 서로 자기 일이 아니라고 미루게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계약 체결 전 발생한 기술탈취는 구제할 길이 마땅치 않다.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은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게 기술 자료를 제공하도록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공정위는 계약 체결 전 단계에서 하도급 계약을 체결하지 않아 당사자 간 관계가 불분명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2014년 11월 시행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 계약관계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기술자료 제공을 요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하도급법과 마찬가지로 계약체결 전 단계에서 문제되는 피해사례를 구제하기 어렵다. 또 조사권한이 규정되지 않아 중소기업청이 조사할 수 없다

◇ 핀테크·보안 업체들, 열악한 국내 사정 피해 엑소더스

필리핀 기업과 업무협약 체결한 비이소프트 표세진 사장

열악한 국내 사정 탓에 해외로 눈을 돌리는 핀테크·보안 기업이 늘고 있다. 아예 해외에 법인을 차리는 사례도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사가 있는 에스이웍스가 대표적이다.

비이소프트 표 사장도 해외 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미 지난 7월 필리핀 필아시아(FIL ASIA) 그룹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표 사장은 “지금 같은 현실에서 벤처기업이 국내 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참여연대와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등 시민단체는 부정경쟁 방지법이나 하도급법을 개정할 예정이다. 이들은 법 개정을 통해 특허청, 또는 공정위가 기술침해를 단속하고 처벌하는 기준이 마련되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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