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길주의 黙黙不答] 코리아 블랙구라데이?
  • 윤길주 편집위원 (ykj77@sisabiz.com)
  • 승인 2015.10.07 11:28
  • 호수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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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다.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세일 말이다. 지난 1일부터 시작된 세일 행사는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다. 시골 5일장도 이보다는 질서가 있을 것 같다.

충분한 준비 없이 일을 벌인 탓에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업체들은 온갖 홍보 문구로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지만 할인율이란 게 엿장수 마음대로다. 어떤 날은 20%였다가 다음 날은 50%로 뛰기도 한다. 먼저 구입한 고객은 한순간에 ‘호갱님’(호구+고객)이 되고 만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요즘 인터넷에는 ‘코리아 블랙구라데이’라고 조롱하는 말이 떠돈다.

이번 행사에는 백화점․대형마트․편의점 등 유통업체와 200여개 전통시장, 16개 온라인쇼핑몰 등 2만6000개 점포가 참여했다. 소비자는 필요한 물건을 값싸게 사고, 소비도 살아나면 좋겠으나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정부가 유통업체 윽박질러 억지로 좌판을 깔게 할 때부터 과녁이 빚나간 것이다.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를 본떴다고? 어느 분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 착각이다. 미국은 제조업체가 세일을 주도하기 때문에 원가에 가깝게 제품을 공급한다. TV·냉장고·에어컨 등 고가 제품을 90%까지 할인해서 판다.

우리의 블랙프라이데이는 유통업체가 주도한다. 이미 제조해서 납품된 제품을 유통업체가 얼마나 깎아서 팔 수 있겠나. 할인해서 판다 해도 백화점 입점업체만 등골이 휠 것이다. 백화점의 입점업체에 대한 ‘갑질’은 낯익은 풍경이다. 이번에도 곳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야당 원내대표도 답답했던지 한마디 던졌다.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는 재벌 맞춤형 판촉 행사라고.

이번 할인 행사를 먼발치에서 씁쓸하게 바라보는 주부들이 많다. ‘시사비즈’ 취재에 따르면 백화점에 가서도 물건만 만지작거리는 이들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이런 마당에 바닥난 지갑을 열라고 독촉하는 게 정부의 할일인지 묻고 싶다.

그보다는 국민 지갑을 두둑하게 해주는 정책을 펴는 게 우선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정부가 소비 부진의 원인을 잘못 진단하고 있다며 메르스 여파 등 단기 요인보다는 가계가 미래에 대비해 저축을 늘리는 등의 구조적 요인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제 기초체력을 단단하게 하고, 일자리를 늘리는데 힘쓰라는 얘기다.

요즘 박근혜 정부를 보면 ‘관권 만능주의’에 빠진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시장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개발독재 시대로 회귀한 느낌이 든다. 정부는 규제를 ‘손톱 밑의 가시’라며 뽑아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편에선 기업들 팔을 비트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뽑아내야 할 규제 아닌가. 제도를 손질하기에 앞서 정권 담당자들이나 경제 관료들의 마인드부터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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