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의 비밀] 호칭 바꾼다고 수평적 문화 되나
  • 구병철 | Mercer Korea 팀장 (.)
  • 승인 2015.10.07 18:39
  • 호수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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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잘하고 전문성 갖춘 사람이 조직장 맡아야

드라마 <미생>은 현실적인 직장의 모습을 보여줬다. 주인공인 장그래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안영이, 한석율, 김 대리, 오 차장…. 이 중 김 대리와 오 차장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시청자들이 있을까. 극 중에서 늘 김 대리, 오 차장으로 불리다 보니 종영이 한참 지난 지금은 그들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국내 기업들은 대부분 회사 안팎에서 이 과장, 박 팀장처럼 성(姓)과 직급명 또는 직책명을 붙여 부른다. 지근거리에서 윗사람을 부를 때는 아예 성을 떼고 ‘과장님’ ‘팀장님’이라 부를 때도 많다. 회사에서 뿐만이 아니다. 형·누나·삼촌처럼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윗사람을 대할 때는 나와의 관계에서 비롯한 호칭이 이름보다 훨씬 자주 쓰이고 편하다. 내 앞의 상대방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문화다.

ⓒ 일러스트 서춘경

제품 주기 짧은 기업은 단일 호칭 잘 운용돼

이런 현상을 동양의 집단주의나 관계 중심적 문화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나 자신의 정체성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되고 내 행동의 정당성에도 타인 또는 집단의 판단이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반면 서양에서는 ‘내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가 정체성이나 행동의 정당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문화적 차이는 다양한 형태로 삶에 녹아들었다. 일례로 “오늘 야근 안 할 거지?”라는 질문에 동양에서는 상대방의 말에 덧붙여 “예, 안 할 겁니다”라고 대답하지만 서양에서는 자신의 입장에서 “No, I won’t”라고 대답한다. 동양인들이 예의와 겸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서양에서는 자율과 자신감이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실제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이나 자존감(Self-esteem)에 대한 설문 결과를 보면 서양 사람들이 동양 사람들보다 점수가 높다.

이런 문화적 특질은 기업문화와도 연결된다. 서양과 동양은 조직과 개인의 관계 설정에서 차이를 보인다. 서구에서는 개인이 모여서 조직이 된다는 입장이라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에 대한 책임이 더욱 강하게 주어진다. 따라서 업무 역할에 따른 상하 관계는 존재하지만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올 사안들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상사와 합의한다. 반면 동양에서는 조직이 우선이고 그 안에 속해 있는 것이 개인이다. 판단의 책임은 윗사람에게 올라가고, 구성원들은 상호 간의 관계 관리에 더 중점을 둔다. 내 행동에 대한 정당성은 동료와 상사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개인이 실수하더라도 어느 정도 용인하고, 동료의 업무 처리가 미숙하면 당연히 팀 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맡아서 돕는 관행도 조직·관계 중심의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국내에서도 많은 기업이 ‘수평적 문화’를 구축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지 못했다. 수평적 문화가 필요했던 이유는 성장 방식이 변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효율과 통제 중심의 관리체계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창의성과 혁신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국내 기업들이 원했던 문화는 이랬다. 한 직급 차이 나는 ‘선후배’ 간, 나아가 팀장급의 상사에게도 업무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의사소통을 빠르게 하고 업무 능률도 올리며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의견이 자유롭게 오가면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부딪치는 모습을 바랐다.

그래서 많은 기업이 직급을 축소했다.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에서 사원-과장-부장으로 단순화하거나 결재 단계를 간략하게 하는 방법을 썼는데도 별로 달라지는 점이 없었다. 김 과장을 부를 때 누구는 ‘김 과장’이라 하고 누구는 ‘김 과장님’이라고 불렀다. ‘김 과장님’을 거치지 않고 바로 팀장에게 결재를 받도록 바뀌었지만, 팀장은 여전히 ‘김 과장’에게 미리 확인하고 올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리더-직원, 논의를 길게 끌고 가는 관계 돼야

약효가 없자 극단적인 처방이 나왔다. 직장 내 호칭 파괴다. 조직의 수장 외에는 모든 직원이 ‘매니저’나 ‘프로’와 같은 동일 호칭을 쓰는 곳이 생겨났다. 아예 호칭을 없애버리고 ‘김철수님’처럼 이름을 부르도록 한 곳도 나타났다. 이런 파괴의 결과는? 기존 기업문화나 구성원들의 특성에 따라 갈렸다. 한화그룹과 KT는 ‘매니저’로 호칭을 변경했지만, 위계 서열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기존의 사원~부장 체계로 돌아갔다. 단일 호칭이 효과를 봤다고 평가하며 유지하고 있는 곳은 SKT(매니저)와 합병 전의 다음커뮤니케이션(님), 제일기획(프로)과 최근 호칭을 통합한 네이버(님) 등이다.

기업의 특성이 뚜렷하게 나뉜다. 업무의 전문성이 크거나, 제품의 주기가 짧아 업무 처리의 속도가 중요한 기업에서는 단일 호칭 체계가 잘 운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잘되는 기업들이야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치자. 문제는 애를 먹고 있는 대다수 국내 기업들이다.

‘수평적 문화’는 결코 특정 산업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조금 더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 호칭만으로 변화를 시도할 게 아니라 다른 방안을 함께 적용했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많은 결정권을 위에서 가진 문화인 만큼 변화 역시 위에서 시작되는 게 맞다. 현대캐피탈의 경우 재미있는 벌칙을 준 적이 있다. 만약 상사가 퇴근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는 분위기의 팀이 있다면, 그 조직의 팀장은 사장보다 늦게 퇴근해야 하는 벌칙을 받았다. 의사소통을 활발하게 하려고 구글은 회의 때 인형을 서로 주고받는데 인형을 든 사람은 반드시 의견을 말해야 한다. 여기에 더 나아가 부하 직원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조직장보다는 좀 더 소통 지향적이면서 전문성을 겸비한 사람이 조직장이 되는 게 옳다. 수평적 문화를 구축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수평적 문화로 변해가는 과도기에 김 대리 역시 ‘겸손하지만 할 말은 하는 사람’이 돼야만 성공할 수 있다. 정치만 잘하는 사람이 조직 내에서 성공하기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리더 입장에서는 근거리에서 보필해주는 사람도 좋지만, 다양한 의견을 들려주고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 없다면 자신 역시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게다가 요즘 리더들은 부하 직원들로부터 위계적이라는 평을 받는 게 적지 않은 치명타라 각별히 신경을 써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팀장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란 말에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고 하는 것보다는 더 길게 논의를 끌고 갈 수 있는 관계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직장 내 수평적 문화는 이미 소리 없이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존대에 익숙한 한국에서 직장 내에서만이라도 호칭을 통일하거나 없애는 변화도 과거에 비해 더 받아들이기 쉬운 때가 왔다. 하나 분명한 것은 호칭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다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호칭은 단지 거들 뿐이다. 참고로, 미생의 김 대리와 오 차장의 이름은 김동식과 오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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