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 향군 비리 제보자 돌려보냈다”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5.10.14 16:38
  • 호수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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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품 제공 주장 사업가, 두 차례 민원…“감사 대상 아니라며 감사 요청 거부”

850만 제대군인들을 위한 단체인 대한민국재향군인회(향군)의 전·현직 회장이 검찰 수사선상에 오르는 등 향군 내부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관리·감독 기관인 국가보훈처 등 정부의 안이한 대처가 향군 내부의 부실과 비리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시사저널이 지난 8월 보도한 박세환 전 향군 회장 측의 비리 의혹 보도<1347호 단독 “향군 전 회장 측에 11억 갖다 바쳤다”>와 관련해 박 전 회장 측에 거액의 금품을 제공했다고 폭로한 사업가 정 아무개씨의 사례는 향군 내부 비리에 대한 보훈처의 소극적인 태도를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

‘반쪽짜리’ 감사 결과로 비난 사기도

정씨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 앞서 지난 2013년 5월 말 보훈처 공식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비공개 민원을 제기했다. 당시 정씨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 박세환과 전 개발사업본부장 ○○○의 부정비리 관련 제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정씨는 “중대한 사안으로 사료되어 (보훈)처장님과의 직접 면담을 요청한다”면서 “처장님과의 면담 시 모든 관련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정씨의 요청에 대해 ‘처장과의 면담 전에 사실관계 확인 등 실무적 절차가 필요하다’면서 먼저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씨는 보훈처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현직 향군 회장과 관련한 사안인 만큼 처장 면담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완전한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보훈처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보훈처도 정씨와의 개별 접촉 등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조남풍 재향군인회장이 9월18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의 국민권익위, 국가보훈처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앞 왼쪽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 연합뉴스

그러나 정씨는 다시 보훈처의 문을 두드렸다. 보훈처에 첫 제보를 한 지 1년여 후인 2014년 6월 정씨 측은 보훈처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당시 정씨와 보훈처 관계자의 면담도 이뤄졌다고 한다. 정씨는 보훈처 관계자와의 면담 과정에서 박 전 회장 측의 비리 의혹 전말을 공개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도 별도 제출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정씨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정씨는 “현직 향군 회장의 부정비리와 관련한 폭로를 했는데도 보훈처는 제도적으로 ‘국고보조금을 지원한 부분에 대한 감사는 할 수 있지만 그 외 직무와 관련한 부분은 감사 대상이 아니다’라며 감사 요청을 거부했다”면서 “보훈처가 향군의 관리·감독 기관인데도 그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훈처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시 정씨로부터 민원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면서 “시간이 오래 지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정씨의 민원 제기 이후 향군을 통해 확인해보니 정씨와 박 전 회장 측 사이에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법적 판단이 끝나면 그에 따라 조치를 취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보훈처는 최근 조남풍 회장의 비리 의혹과 인사 전횡 등으로 향군 내에 노조가 결성되고 국정감사에서도 논란을 빚으면서 사태가 악화되자, 향군 수익 사업 전반에 대한 재무감사를 이례적으로 벌이는 등 적극적인 대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보훈처는 지난 6월 특정감사에서 대의원 매수 의혹과 매관매직 등에 대한 조사나 검찰 고발 등을 하지 않은 채 인사 규정 위반에 대해서만 시정 조치를 내리는 선에서 특정감사를 마무리해 ‘반쪽짜리’ 감사라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본지 1344호 선거 부정 의혹 ‘덮었나, 못 밝혔나’> 더욱이 보훈처가 향군이 인사 규정 위반을 한 사실을 확인하고 개선을 요구했지만, 향군 측은 규정 위반으로 채용했던 측근 인사들을 재임용하는 편법 인사를 했다. 이에 보훈처는 조 회장에 대한 직무정지를 검토했지만 관련 법제도가 없다는 이유로 제재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보훈처가 향군에 대해 관리·감독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향군이 근본적인 개혁에 나설 수 있도록 적극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우선 향군 회장에게 주어진 막강한 영향력을 적절히 제어할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향군 회장 선거가 각종 비리와 특혜 시비로 논란을 빚고 있는 만큼, 향군 회장 선거를 중앙선관위에 위탁하거나 공직선거법에 준하는 제도 도입 등으로 혼탁 선거를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향군의 한 전직 고위 간부는 “향군 회장 선거가 혼탁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면서 “향군 회장이 되면 향군 사업 전반과 인사에 대한 권한이 생기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장이 되면 된다는 인식이 강한 만큼 향군 개혁을 위해서는 선거제도의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향군이 850만 제대군인을 위한 조직이라는 본연의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향군은 원칙적으로 향군법 3조에 따라 향군 임원의 정당 당직 금지 등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향군은 그동안 국가안보를 이유로 사실상 직·간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고 있다. 시사저널이 지난 2013년 9월 보도<1247호 “향군본부에서 대선 책임자 명단 올리라고 지시했다”>한 사례처럼 향군 내부에서 정치 활동 금지를 위반한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향군, 정치권과의 밀월 관계 끊어야

향군은 본부와 13개 시·도회를 중심으로 전국 3296개 읍·면·동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거대한 조직이다. 이에 따라 향군과 정치권의 밀월 관계가 형성되고, 이를 통해 향군 내부의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은 채 외부의 감시·감독도 느슨해진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향군은 조 회장 등에 대한 사정기관의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9월17일 서울 광화문 원표공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정부가 추진 중인 공공개혁·노동개혁·금융개혁·교육개혁 등 4대 개혁을 적극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야당과 일부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을 사고 있는 현 정부의 정책을 공개 지지하는 것을 두고 다른 배경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특히 지난 2012년 향군의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사업 투자 실패 등으로 인해 수천억 원의 빚을 떠안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감사원 감사가 예상됐지만 이후 보훈처 감사로 격하된 것을 두고도 ‘권력 외압설’이 제기됐다.

결국 향군 내부의 자정 노력과 함께 외부의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는 한편, ‘정치 향군’의 이미지를 벗고 재향군인에 대한 처우 개선이라는 본질적인 기능을 회복하는 데 힘을 쏟아야 내부 비리와 부실화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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