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이미 무산된 상고법원 사례 감췄나
  • 박준용 기자 (juneyong@sisapress.com)
  • 승인 2015.10.22 13:58
  • 호수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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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추진 강행하는 ‘상고법원’ 설치 논란…해외 사례 은폐·왜곡 의혹 제기

1년 3개월간 공청회와 토론회만 수십 번. 대법원 외에 상고심을 처리하는 별도 법원인 ‘상고법원’ 설치를 두고 이토록 오랜 기간 많은 말이 오갔다. 지금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는 1심 지방법원과 2심 고등법원, 그리고 최종심인 대법원의 3심 체계다. 이에 대해 대법원에서 별도로 또 하나의 대법원 성격인 상고법원 설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실제 이를 도입했거나, 도입을 주장하고 나선 해외 사례를 들며 설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대법원, 부정적 해외 사례 알고도 설명 안 해”

대법원이 자기들에게 불리한 상고법원 해외 사례를 감췄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 시사저널 최준필

하지만 대법원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미국 사례를 감춘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 시사저널 취재 과정에서, 이미 미국에서는 과거 두 차례 상고법원 도입 논의가 있었고 모두 무산된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미국 연방사법센터’가 발간한 ‘연방 항소법원의 구조와 대안’ 자료에 잘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1970년대 두 차례 상고법원 설치를 추진했다. 첫 번째 도입 시도는 미국 연방 대법원장의 지시였다. 미국은 대법원이 연 100건 미만의 상고 사건만 선별해 처리하는 상고허가제를 택한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대법원이 상고 사건을 선별하는 데 드는 시간이 많다는 이유로 ‘중간 단계’의 법원 설치를 고심했다. 연구를 맡은 프룬드 교수는 상고법원(National Court of Appeals)을 제안했다. 상고법원에 7인의 법관을 두고 그들에 의해 대법원에서 어떤 사안을 판단할지를 정하자는 것이다. 또 상고법원 판사는 상고를 기각하거나 상고된 내용을 최종 확정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 안은 무산됐다. ‘중간 단계’ 법원을 허용하자는 부분이, 대법원이 아닌 중간 권력자를 만들 여지가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또 상고법원이 최종심처럼 판단하면 헌법적으로 맞지 않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를 보완하는 다른 상고법원도 차후 논의됐다. 이는 흐루스카 상원의원이 주도했다. 이 안은 이전 제안과 달리 대법원에 가는 사건 수를 적극적으로 줄이도록 했다. 대법원의 판단을 참조해 상고법원에서 결정을 내고 대법원은 주요 의제와 관련된 재판만 맡도록 했다. 하지만 이 시도도 무산됐다. 대법원이 판단할 사안을 특정 기관에서 일방적으로 정하는 점이 문제가 됐다. 상고법원 판사를 누가 임명할지도 골칫거리였다.

한국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해외 사례는 또 있다. 아일랜드 사례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 언론 인터뷰에서 아일랜드가 상고법원을 채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일랜드 사법부 홈페이지 등에 따르면, 아일랜드는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고친 다음 이 법원을 세운 것으로 나타났다. 즉 개헌 없이 입법으로만 상고법원을 설치한다는 한국 대법원의 입장과 배치된다.

물론 미국과 아일랜드 상고법원 사례를 한국과 등치시킬 순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들 나라는 한국과 법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송기춘 한국공법학회 회장은 “미국은 연방 대법원이 100건 이내의 사건을 선정해 심리한다. 대다수 사건은 대법원 문턱도 못 넘는다. 상고권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정도다. 그걸 보장하기 위해 상고법원이라는 새 법원을 만든다는 취지였다. 한국 상고법원과 같은 맥락이긴 한데, 결이 다르다”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1년 3개월간의 상고법원 논의 과정에 이 같은 부정적 해외 사례가 등장하지 않은 점은 의문이다. 입법을 추진할 때 주관 기관이 해외 사례를 방대하게 조사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해외 사례를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자신들이 추진하려는 상고법원의 필요성을 설명해야 마땅했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일까.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이 부정적 해외 사례를 미리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의혹도 제기한다. 대법원이 이 사례들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여기서 아이디어까지 얻고자 했는데, 오히려 상고법원 설치에 부정적이라 왜곡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경실련을 통해 상고법원 반대 성명을 표명한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의 입법 추진과 무산 과정을 대법원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정황이 많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국내에서의 오랜 논의에도 왜곡된 해외 사례가 들통 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치를 ‘밀어붙이기식’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라 본다. 황도수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런 해외 사례들이 논의되지 않은 것은 연구가 덜 돼서 그렇다. 상고법원에 대해 깊게 해외 사례까지 파악한 학자는 국내에도 많지 않다”면서 “상고법원 설치에 앞서 법조인과 학자들이 연구할 기회를 주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게 아니다. 대법원 입장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게 연구를 만들어나갔기에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해외 사례가 왜곡된 상황은 상고법원 설치를 ‘여론전’으로 돌파하겠다는 대법원의 발상을 보여준다. 홍보 활동 강화도 그 예다. 지난해부터 대법원은 홈페이지에 상고법원 홍보 자료와 웹툰을 올리고 있다. 전국 법원에 포스터와 현수막을 부착했고, 상고법원 찬반 설문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강신업 대한변호사협회 공보이사는 “미국 등 해외 사례를 검증하지 않고, 홍보에 집중하는 것은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겠다는 이야기다”라고 지적했다. 서기호 정의당 의원도 국정감사에서 “대법원이 일방적 홍보를 통해 여론 왜곡에 나서고 있다”며 “국민들 대다수가 상고법원을 모르는데도 찬반을 강요하니 과연 이게 정확한 여론이겠느냐”라고 비판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국정감사장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 연합뉴스

대법원, 헌재 넘어서는 권력의지 드러내

홍보에 열을 올리는 대법원은 정작 상고법원 설치에 헌법적 한계가 있다는 주장에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한다. 상고법원 설치 문제는 애당초 위헌 논란이 컸다. “누구는 상고법원에서, 누구는 대법원에서 재판받는 불평등은 분명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다. 법학자 100명이 경실련을 통해 공동선언문까지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발의된 법안에는 소송인이 상고법원의 판단에 불복하고 대법원에 다시 재판을 요구할 수 있는 ‘특별상고제’도 포함돼 있다. 위헌적 ‘4심제’가 될 우려도 제기된다. “상고 사건은 해마다 늘어 대법관 1인당 연간 3000건 이상을 담당한다. 상고법원 설치는 대법관의 업무 과중을 해소해 국민에게 재판받을 권리를 돌려줄 수 있다”는 대법원의 설치 이유는 그럴듯하지만, 그래도 위헌 우려에는 명확히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의 무리한 상고법원 추진에는 ‘권력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는 시선이 많다. 현재 홍일표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 따르면,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판사를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법안이 통과되면 대법원장이 휘두를 수 있는 인사권이 커진다. 송기춘 회장은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서 “현 방안대로 상고법원을 만들면 대법원장 권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평했다.

이런 권력화 시도 이면에는 헌법재판소를 넘어서고 싶다는 대법원의 욕심이 있다는 게 법조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헌재(憲裁)가 최근 간통죄 위헌,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을 결정한 이후 파급력이 하늘을 찌른다. 대법원은 그게 늘 못마땅하다. 스스로 헌재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최근 대법원이 정책법원 기능을 강화한다고 하고, 9명의 대법관이 모두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늘리는 것, 상고법원을 추진하는 것 모두 헌재를 넘어서려는 의도다.” 대법원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의 말이다.

한편 대법원은 상고법원 논의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미국 사례를 은폐했다는 의혹에 대해 “사법정책실장도 올해 4월 국회 공청회 발표 자료에 포함시켜 설명한 바 있고, 토론회 등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면서 “미국은 기존 상고허가제를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논의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고 반박했다. 대법원은 또 “아일랜드 사례가 왜곡됐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면서 “아일랜드는 2013년 개헌에서 상고법원 관련 내용이 헌법에 포함됐으나, 이는 기존 제도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고 개헌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일랜드는 현재 35차 개헌이 추진되고 있을 정로로 헌법 개정이 활발하고, 제도적으로 안정화된 부분을 헌법에 반영하는 형태라 한국 개헌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대법원, 연구 용역으로 상고법원 찬성 논리 자가 생산 중” 

대법원은 학계에 ‘상고법원’ 도입을 찬성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연구 용역을 대거 발주하고 있다. 사법부가 입법을 위해 무리하게 여론전을 편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수의 법조계·학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대법원은 한국헌법학회와 공법학회 등 몇 개 단체에 상고법원 설치에 대한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다만 대법원은 자신들의 의견에 부합할 수 있는 결과를 내줄 수 있는 연구팀에만 용역을 줬다.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 용역으로 학회를 운영하니 학회가 자세를 낮춰서 들어간다. 대법원도 유리한 결과를 낼 수 있는 곳에만 연구 용역을 주는 악순환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이런 연구 용역의 결과는 ‘학회’ 이름을 걸고 홍보용으로 활용된다. 언론 보도만 보면 학회가 상고법원의 합헌성을 공인해준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공법학회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 일간지는 지난 7월, 공법학회가 상고법원 설치가 합헌이라는 보고서를 낼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해당 보도가 나오자마자 공법학회가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이 학회의 공식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송기춘 공법학회장은 “당시 보도는 학회에서 자료를 낸 게 아니라, 법원행정처에서 자료를 낸 것”이라면서 “해당 연구도 우리 학회 일부 회원의 개인 의견일 뿐인데, 마치 학회의 공식 입장인 것처럼 학회 이름으로 제출됐다”고 말했다. 송 회장은 오히려 상고법원 설치가 위헌적 요소가 크다고 봤다. 황도수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공법학회뿐 아니라 헌법학회 등 다른 단체도 마찬가지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 측은 “공모 절차를 거쳐 공법학회에만 발주를 줬고 다른 학회에 용역을 줬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면서 “제도 개선을 앞두고 이론적·학문적 근거를 다시 점검ㆍ검토하려는 연구 용역이었다. 찬성 논리를 과도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은 연구 용역을 수행한 헌법학자들의 학문적 연구 결과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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