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해소는커녕 갈등만 격화시켜
  • 이상돈 | 중앙대 명예교수 (.)
  • 승인 2015.10.29 17:26
  • 호수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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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촉발한 ‘역사와의 전쟁’이 온 나라를 뜨거운 논쟁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앞장선 이 전쟁이 과연 기대한 대로 진행될지는 알 수 없다. 한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전국의 사학과 교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젊은 학생들이 가두시위에 나서는 등 파문이 만만치 않다.

역사교과서가 ‘좌편향’됐다면서 ‘역사 전쟁’을 하겠다고 나선 청와대와 정부이건만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고치고자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고 나가는 박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이인호 KBS 이사장 등이 선대의 친일 행적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도 문제다. 국정화 작업에 참여할 것으로 보이는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식민사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참여한 교과서는 그 자체로서 배척받기 십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청와대와 여당이 국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기는커녕 이로 인해 국정이 주저앉을 처지다.

이런 사정을 별도로 하더라도 6·25 전쟁을 겪었던 세대가 볼 때 현행 검·인정 교과서는 불편한 곳이 여기저기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우리와 북한을 대등한 존재로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그러하다. 6·25 전쟁 과정에서 많은 양민이 희생되었지만 규모로 볼 때 훨씬 많았던 북한군에 의한 양민 학살을 한국 군경과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보도연맹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과 비슷한 비중으로 서술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미국의 고등학교 학생들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공산군을 패퇴시킨 ‘케산 전투’나 ‘후에 전투’는 몰라도 미군이 양민을 학살한 ‘밀라이 사건’은 잘 알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런 현상은 매우 불공정하게 느껴지겠지만, 역사가들은 밀라이 사건을 더 중요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밀라이 사건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미국의 도덕적 근거를 허물어버렸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역사학계를 풍미해온 이른바 ‘민중사관(People’s History)’이 이러한 관점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위대한 인물 중심이었던 탓에 평범한 대중들의 삶의 역사가 잊혔다면서 역사는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쓰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 민중사관이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소개된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S.)>를 펴낸 하워드 진(Howard Zinn)이 대표적인 민중사학자인데, 인디언·흑인 등 소수자와 피지배 계층의 입장에서 미국 역사를 다룬 그의 책은 지금도 여전히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러나 이런 시각으로 6·25를 바라보면 북한군에 의한 학살과 납치, 그리고 미군에 의한 노근리 사건은 동등한 양민 학살이 되고 마는 ‘등가성(等價性)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에는 이 같은 여러 가지 복잡한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이런 논쟁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갈등만 더 격화시키지 않나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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