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하는 김정은의 ‘음악 정치’
  • 이영종│중앙일보 통일·북한 전문기자 (.)
  • 승인 2015.11.05 14:19
  • 호수 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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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한 노출에 서구식 연출까지…김정은, 음악으로 주민 통치

평양판 걸그룹들이 화려한 변신을 선보이고 있다. 해체설이 나돌던 모란봉악단이 신규 멤버를 구성해 돌아왔고, 새로 창단한 청봉악단은 최고지도자의 후광을 업고 양대 축을 형성할 기세다. 공훈국가합창단도 이들과 합동공연 등을 펼치며 영역을 대중 무대 쪽으로 옮겨가는 형국이다. 이른바 ‘친솔(親率) 악단’인 이들은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통치 코드를 담고 있는 선봉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10월10일 노동당 창건 70주년 행사는 이들의 경연장이었다. 평양 주체사상탑과 인민대학습당이 자리한 대동강변에 대형 수상 무대를 만들어 1만명이 참가하는 대공연을 펼쳤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행사 후 모란봉악단과 공훈국가합창단 가수와 작곡가들에게 무더기 훈장을 수여한 걸 보더라도 각별한 관심과 인기를 감지할 수 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북한판 ‘걸그룹’ 모란봉악단에 둘러싸여 웃고 있는 모습. 조선중앙TV가 10월19일 보도했다. ⓒ 연합뉴스

김정은 체제, 개혁·개방 쪽으로 가닥

이전과는 다른 스타일로 등장한 이들의 변화 중 가장 두드러진 건 노출이 심해지고 의상이나 화장이 화려해졌다는 점이다. 노동당 창건 70주년 공연을 담은 조선중앙TV 화면에는 배꼽을 드러내고 짧은 스커트를 입은 이들이 훌라후프를 들고 집단으로 춤추는 장면이 3분 넘게 등장했다. 다리를 쩍 벌리고 구르는 동작 등을 선보일 때 스커트 속의 속바지가 그대로 드러났지만 편집하지 않은 채 방영했다. 모란봉악단이나 청봉악단의 가수와 연주자들도 점차 옷차림이 과감해지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게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는 한동안 금기시됐던 모습이다. 김정은 집권 첫해인 2012년 7월 모란봉악단이 창단되면서 첫 공연을 선보였다. 이때 어깨를 다 드러내고 형형색색의 짧은 원피스를 입은 가수들이 등장해 파격이란 평가를 받았다. 무대에는 미국 자본주의 상징인 미키마우스와 백설공주, 곰돌이 푸 등의 대형 캐릭터 인형이 등장했고, 할리우드 영화의 주제음악이 흘렀다. 김정은 체제가 개혁·개방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것이란 관측이 나온 것도 이런 사정에서였다.

연주자들의 모습도 괄목상대란 말이 어울렸다. 짙은 화장에 서구적인 헤어스타일을 선보인 데다 상당한 노출까지 시도했다. 특히 이들의 악기가 북한 TV 화면에 그대로 드러나면서 화제가 됐다. 일본 브랜드인 롤랜드(Roland)의 디지털피아노와 드럼, 코르그(KORG)의 신시사이저, 야마하(YAMAHA)의 피아노 등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다. ‘금기시(禁忌視)되는 일본 브랜드도 마음껏 연주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은 김정은의 특별한 지시나 승인이 없으면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이란 얘기다.

레퍼토리도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구성이다. 혁명가요로 공연을 시작하긴 하지만 중·후반부에 접어들면 사정이 달라진다. ‘세계 명곡 묶음’이란 자막이 소개되면서 모차르트 교향곡 모음을 시작으로 ‘가극 극장의 유령’이란 북한식 제목을 단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의 주제곡 선율이 울려 퍼지고 <오솔레미오>와 <백조의 호수>를 거쳐 팝음악이 이어지는 식이다.

이런 공연에 김정은은 대만족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군인과 청년들에게 모란봉악단의 공연을 적극 보급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공연을 지켜본 젊은 세대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의 기폭제가 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됐다. 여기에 악단원과 가수들의 성추문설이 외신에까지 보도되고 이설주 관련 루머까지 돌면서 김정은이 격노했다는 게 우리 정부 당국의 첩보다. 김정은은 공연 레퍼토리와 가수들의 의상, 무대 구성 등을 보수적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때부터 모란봉악단 가수들은 군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대부분 군인 신분인 이들은 어깨에 소위나 중위 계급장을 달고 노래를 불렀고, 시작할 때와 끝날 때는 거수경례로 인사했다.

“모란봉이 걸치면 다 패션이 된다”

하지만 한번 달아오른 인기는 쉽게 식지 않고 있다. 지금 평양에서는 “모란봉이 걸치면 다 패션이 된다”는 말이 나돈다고 한다. 이 악단 가수들이 즐겨 하는 세련된 단발 헤어스타일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타덤에 오른 가수 라유미가 차고 나온 팔찌형 장신구는 웃돈이 붙어 암거래된다는 얘기도 들린다. 반짝이는 에나멜 톤 하이힐과 짧은 치마 등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이 직접 챙기고 있는 평양의 걸그룹들에 제동을 걸 힘은 그 누구에게도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은하수관현악단 가수 출신인 부인 이설주가 이를 총괄하고 있는 상황이다. 모란봉악단 창단 공연 때 김정은이 이설주의 존재를 처음 알렸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와 혁명가극에 치중했던 아버지 김정일에 비해 김정은은 노래와 악단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여기에는 ‘음악 정치’로 불리는 김정은의 통치 노하우가 반영돼 있다. 로동신문은 이들 악단을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의 음악 정치를 앞장서 받들어 나가는 제일 근위병”이라고 표현한다. 관영 선전 매체가 ‘노래폭탄’이란 표현까지 쓰고 있는 점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김정은은 모란봉악단 창단 3년 만인 지난 7월 청봉악단이라는 또 하나의 음악 정치 선동대를 만들어 새로 데뷔시켰다. 노동당 창건 70주년 행사를 봐도 걸그룹 형태의 미녀 대중 악단을 체제 결속과 선전·선동에 적극 활용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정일 시대에 만들어져 해마다 이어져온 집단체조 공연 <아리랑>의 막을 내리게 하고 이젠 걸그룹 공연으로 주민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당 창건 70주년 공연을 현장에서 보고 온 한 해외동포 인사는 “김정은식(式) 축하 공연에 주민들이 열광하고 있었다”며 “청년과 젊은 군인 등에게 젊은 최고지도자가 구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미녀들의 유희와 화려한 조명, 서구적인 레퍼토리만으로는 경제난에 시달려온 주민들의 고단한 몸과 마음을 녹여내는 데 한계가 분명히 있어 보인다. 집권 첫해인 2012년 4월 첫 공개 연설에서 김정은은 “인민들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듬해에는 이른바 경제·핵 병진 노선을 제시하며 핵무기 보유로 군사비가 절감되는 부분을 민생에 돌릴 것임을 예고했다. 하지만 약속은 이행되지 않고 있다.

북한 관영 선전 매체들은 연일 모란봉악단과 청봉악단의 공연을 틀며 김정은식 음악 정치가 주민들의 뇌리 속에 파고들도록 하고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당 창건 70주년 연설에서 ‘인민’을 97회나 언급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민생을 우선시하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정책 대전환을 보이지 않는 한 한계가 있다. 평양 걸그룹들의 화려한 율동과 노출은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모르핀의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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