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혈 개혁으로 그리스 민주정치 초석을 놓다
  • 김경준 |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 (.)
  • 승인 2015.11.11 15:28
  • 호수 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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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 부채 위기 해소…부채로 노예가 된 자유민 해방

고대 그리스는 올리브에서 시작됐다. 올리브는 기적의 식물이다. 메마르고 험준한 그리스 지역에서 자생하는 올리브 나무로 정주형(定住型) 농업이 시작됐고 나아가 지중해 전역에 교역망을 구축하고 그리스 문명권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500년간의 아르카이크 시대에 그리스 반도에는 1500여 개의 잡다한 폴리스가 각축하는 문명세계가 형성됐다. 이후 200년 동안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으로 마무리되는 고전기까지, 농업에 기반한 육지 세력 스파르타와 교역에 기반한 해상 세력 아테네는 두 개의 중심축이었다. 이들은 외부의 적인 페르시아에 공동전선을 펼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전쟁을 불사하는 주도권 경쟁을 이어갔다. 최종 승자는 전사 집단 스파르타였지만, 아테네는 민주주의 정체(政體)를 발전시키고 학술과 문물의 중심이 되면서 서양 문명의 요람이 됐다. 솔론은 기원전 6세기에 당시 주변 세력에 불과했던 아테네가 정치·경제·사회 개혁을 통해 민주정치에 기반한 강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닦은 개혁가였다.

ⓒ 일러스트 임성구

귀족 출신 부자 솔론, 평민을 이해하는 입장

기원전 1100년께 북쪽으로부터 남하한 도리아인 중 일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 라코니아 지방으로 진출해 현지인을 정복하고 노예로 복속시키면서 스파르타를 형성했다. 이어서 기원전 8세기에 풍요로운 인근 지역 메세니아를 정복하면서 강력한 군사력과 농업 기반 경제력을 앞세워 강국으로 부상했다. 스파르타는 시민 전체가 전사가 돼 다수의 현지인 출신 노예들을 지배하는 폐쇄적 사회 구조였다. 반면 동쪽 해안의 아티카 지방에서 출발한 아테네는 바다를 통한 대외 교역에 기반한 개방적 폴리스로 발전했다. 전설과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13세기 테세우스가 아테네를 건국하고 이후 왕정이 지속되다가 기원전 7세기 후반 왕정을 폐지하고 귀족 중에서 아르콘이라는 임기제 통치자를 선출하는 귀족정으로 전환했다. 당시 아테네는 과수(果樹) 재배가 발달하고 대외 교역이 늘어나면서 화폐 경제가 확산되고 있었고, 대지주 귀족과 소농 평민의 경제적 격차가 확대되면서 사회적 갈등도 심해지고 있었다. 기원전 621년 아르콘이었던 드라콘은 사회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한 성문법을 공포했다. 관습에 기초한 사적 복수를 막고 귀족의 자의적인 법 운용을 제한하려는 목적이었으나 토지 소유, 채무 정리 및 평민 정치 참여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예컨대 빚을 갚지 못하면 채권자의 노예가 되는 식으로 ‘드라콘은 잉크가 아니라 피로 법률을 썼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가혹해 오히려 사회 불안을 심화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솔론은 이 시점(기원전 640~561년)에 등장했다. 귀족 출신으로 인근 살라미스 섬을 점령해 군사적 명성을 얻었고, 시인으로도 유명했다.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드라콘 법에 따라 부채 때문에 노예로 전락하는 자유민들이었다. 농민 중 급진파는 토지의 재분배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폴리스 붕괴의 위험에 처하게 됐다. 당시 인근 폴리스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귀족과 평민 간 갈등으로 평민들이 체제 전복과 재산 몰수로 귀족들을 공격하면 귀족들도 유혈 진압으로 응수하는 반복적 상황 속에서도 별다른 대응책이 없는 가운데 아테네는 구원투수 솔론을 등판시켰다.

기원전 594년 아테네의 귀족과 평민은 귀족 출신 부자이면서 평민들을 이해하는 입장이었던 현자(賢者) 솔론을 아르콘으로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광범위한 개혁에 착수한 솔론은 먼저 드라콘 법 중에서 살인법을 제외하고는 모든 법을 폐지했다. 통화 가치를 평가절하해 농민들의 부채 위기를 해소하고 부채로 노예가 된 자유민을 해방시켰으며, 국외로 추방되었던 사람들을 귀국시켰다. 경제적으로는 자급자족형 농업의 구조조정에 착수해 수출형 농업으로 재편했다. 당시 척박한 아티카 지방에서 통상적인 식량 작물의 재배는 어려웠으나, 잘 자라는 올리브와 포도에 특화하고 올리브유와 포도주의 수출을 장려했다. 액체 수출품을 담기 위한 토기 제작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외국 기술자들에게 아테네 시민권을 약속해 아테네 인근으로 대거 이주시켰다.

경제 개혁에 이어 정치 개혁에도 착수했다. 당시 귀족 중에서 선출되는 통치자인 1년 임기의 아르콘은 퇴임 후에도 ‘아레오파고스’ 회의 구성원으로 일종의 의회를 구성하는 실력자가 되었다. 혈통에 따른 폐쇄적 정치 체제에 대한 평민들의 불만이 커지는 시점에서 솔론은 혈통이 아니라 재산에 따라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개혁했다. 자유민을 재산에 따라 대토지 소유자, 기사, 농민, 무산자의 4등급으로 분류하고 이에 비례해 병역과 세금을 부과하고 정치적 권리를 부여했다. 피선거 자격을 가문과 혈통이 아니라 재산을 기준으로 하게 되면서 지배 세력이 소수 세습 귀족에서 좀 더 넓은 범위로 확대됐다.

“평민은 폭력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다”

혈통은 고정적이지만 재산은 유동적이기에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길이 열리면서 아테네에서는 고대 세계 최초로 혈연과 출신 성분으로 정치적 권리가 결정되던 고정된 사회가 소멸하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책임과 권리를 가지는 역동적인 사회가 나타났다. 나아가 평민들은 활성화된 민회(民會)를 통해 정치적 견해를 표출할 수 있었고, 과거 귀족들이 독점하던 사법권도 평민이 참여하는 배심원 제도를 도입해 분산시켰다.

솔론은 평민들에게 우호적인 일련의 개혁을 통해 분열의 위기에 봉착한 폴리스의 정치적 재통합을 이루면서 평민들의 정치 참여를 제도화했다. 그러나 그는 귀족과 평민들 간의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평민은 폭력에 의해 강제되지 않고, 또한 너무 느슨해지지 않을 때 지도자를 가장 잘 따른다”는 견해를 피력할 만큼 평민들의 속성도 파악하고 있었다.

솔론은 피를 흘리지 않고 현재의 사회 갈등을 해소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제도 개혁을 이뤄낸 유능한 정치가였다. 이후 아테네는 모범적이고 유능한 독재자였던 참주(僭主)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안정기와 민주정(民主政)에 기반한 페리클레스의 황금기로 이어지면서 그리스 문명의 중심으로 도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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