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의 역습]④ 유명무실해진 예비타당성 조사
  • 이민우 기자 (woo@sisabiz.com)
  • 승인 2015.11.12 15:48
  • 호수 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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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조사 면제 해놓고 53조8000억원 쏟아부어
강원도 속초·양구지역 주민들이 지난 9월1일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춘천-속초간 동서고속화철도’ 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를 요구하며 집회를 벌이고 있다. / 사진=뉴스1

정부는 1999년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의 예산 낭비를 막겠다며 예비타당성 조사 제도를 도입했다. 500억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은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쳐 경제성 등을 따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업이 경제성이 없어도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거나, 조사 자체를 면제 받았다.

정부는 이 같은 문제 제기가 있을 때마다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그 방향은 정반대였다.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을 축소하는 등의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시민단체 등은 반발하는 상황이다.

◆ 경제성 없어도 “타당성 있다”결론…82개 사업에 40조 투입

예비타당성 조사는 비용 대비 편익을 판단하는 경제성 분석(B/C) 결과를 토대로 정책적 분석과 지역균형발전 분석을 합산해 종합평가(AHP)를 내린다. SOC 사업의 경우 경제성 분석의 가중치는 40~50%에 불과하다. 정책 추진 의지, 지역 낙후도 등에서 높은 배점을 받은 경우 경제성이 떨어져도 얼마든지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결론날 수 있다.

기획재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경제성이 떨어지는데도 종합 평가에서 합격 판정을 받은 사업은 82건에 달했다. 이들 사업에 들어간 돈만 39조8178억원에 달했다.

3조5억원이 투입되는 ‘중앙선 도담∼영천 철도’와 총사업비 2조6000억원의 ‘인덕원∼수원 복선 전철’, 1조7000억원이 들어가는 ‘동해·묵호항 3단계 개발’ 사업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반면 경제성 분석에서 합격 판정을 받은 후 종합평가에서 불합격으로 바뀐 사례는 같은 기간에 단 1건(1424억원)밖에 없었다.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고도 추진된 사업도 있다. SOC 분야의 경우 2003년부터 2013년까지 ‘타당성 없음’ 판정을 받았던 23개 사업이 공사를 시작했다. 23개 사업 총 사업비는 11조2455억원이다. 2013년까지 이들 사업에 투입된 예산은 3300억원에 불과하다. 즉 2014년부터 11조원 상당의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 정권 입맛 따라 조사 면제도

이 같은 상황에서 ‘꼼수’가 더해지기도 했다. 아예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지 않도록 ‘면제’를 추진한 것.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부터 2012년 7월까지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지 않은 사업은 68개다. 이들 사업의 총 사업비만 53조9195억원에 달한다. 올해 국가예산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사업이 타당성 검토 없이 착수됐다는 의미다.

도로를 만들거나 관광지를 조성하는 사업이 대다수였다. 이들 사업 대부분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면제를 받았다. 조사 실익이 없다는 지극히 자의적인 기준으로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하는 관행이 일상화 된 셈이다.

MB정부 30대 선도프로젝트 중 21개 사업에 대해 예비타당성 조사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조사를 면제받았다. 21개 사업 총사업비만 21조8511억원에 이른다. 그나마 30대 선도프로젝트 중 나머지 9개 사업도 이미 완공됐거나 시행 중인 사업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임기 첫 해인 2013년 15개 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했다. 이들 사업의 총사업비는 4조8910억원이다. 서울 KTX수서역 일대 그린벨트 38만여㎡를 해제해 개발을 추진하는 행복타운 사업은 전문가 자문도 없이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행복주택과 유사한데다 조사에만 1~2년이 걸리기 때문에 실익이 적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사업은 임대용 주택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상업지구가 추가됐기 때문에 구성 요건이 전혀 다른 사업이었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11일 4대강 보와 댐을 연결하는 사업도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하기로 했다. 최근 가뭄이 심각하다고 판단해 충남 공주보와 경북 상주보 도수로 공사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하기로 한 것. 이를 위해 올해 설계비와 내년 공사비 842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정부가 추진한 도수로 사업은 2017년 7월에야 물을 공급할 수 있다.

◆ 앞에선 ‘제도개선’, 뒤에선 ‘조사 대상 기준 완화’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자 예비타당성 조사에 대한 신뢰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정부는 이 때마다 “면제 요건을 구체화하고 절차를 강화하는 등 제도개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혀 왔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해 업무보고에서 “예비타당성 조사결과 타당성이 없는 사업을 추진한 사례가 많았다”며 “신규 SOC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를 내실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정반대의 정책을 내놨다. SOC 분야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을 기존 ‘500억원 이상’에서 ‘1000억원 이상’으로 상향 조정하겠다는 것. 이렇게 되면 2005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총 1267건의 사업 가운데 14.8%가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에서 제외된다.

또 예비타당성 조사 과정에서 지역균형발전 가중치도 기존 20~25%에서 25~30%로 5%포인트 높이겠다고 밝혔다. 경제성이 떨어져도 지역균형발전 가중치에서 높은 배점을 받아 합격 판정을 받을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예비타당성 제도가 도입된 지 15년이 경과함에 대상사업 기준을 현실화하고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낙후지역에 대한 배려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예비타당성 조사 기준을 상향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야당의 반대로 국회에서 발이 묶여있지만 언제든 다시 논의해 처리될 가능성이 열려있다.

환경연합은 “정부가 지역균형발전 운운하며 타당성 없는 SOC사업을 늘리려 하려는 것”이라며 “정부 예산을 가져왔다는 지역 정치인들의 보여주기식 사업유치 욕구와 맞물려 수요가 없고 타당성 없는 사업이 추진되는 묻지마 개발을 늘리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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