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서거 직전, 국장(國葬) 결정되기까지 긴박했던 청와대(MB)와 상도동(YS) 간 비화
  • 이호 프리랜스 기자·다큐 작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5.11.26 17:07
  • 호수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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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YS, DJ를 서울현충원에 안장하는 조건으로 ‘국장’에 동의

2011년 8월16일 국무회의를 통과하고 법률적으로 국무총리가 장례위원장이 되어 국가 주도로 치러지는 ‘국가장(國家葬)’이 제정된 이후,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장례가 그 최초 사례가 된다. YS에 대한 업적과 평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무수한 기록들이 말해주고 있고, 국가장 기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애틋한 추모 물결이 국내외에서 이어지고 있는 만큼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YS를 추모할 수 있는 수많은 비사(秘史)가 있고, 모두를 공개할 수 없다면, 고인의 대담하고 솔직한 족적을 생각해보는 것이 남아 있는 자들의 도리일 터이다. 

MBC 라디오 드라마 <격동 30년> 등을 통해 고인의 정치적 생애를 재조명했던 필자를 YS는 평소 ‘이 동지’라고 부르는 등 고인과 필자는 남다른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 남긴 정치적 비사들은 후속적으로 고인의 육성 그대로를 기록해 독특하고 대도무문(大道無門)적인 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기회로 삼을 게획이다. 여기서는 우선적으로 평생의 동지이자 라이벌인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장례 문제와 얽힌 일화를 지면으로 남긴다.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을 마친 김영삼 전 대통령이 2009년 8월10일 병원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YS의 이력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DJ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DJ 역시 YS를 빼고는 자신의 존재를 그려낼 수 없다. 그만큼 서로는 대칭선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사실 이번 YS의 국가장은 그 자신이 2009년 8월 DJ 서거 직전, DJ의 ‘국장(國葬)’을 뒤늦게 강력히 요구하면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MB)의 결심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감각이 남달랐던 YS의 판단으로 인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울현충원에 안치되게 된 것인데, 그것이 결국은 YS 자신이 국가장의 첫 대상이 되는 견인차 역할도 한 셈이다. 이 비화를 둘러싼 당시 청와대와 상도동 간의 숨 가빴던 움직임의 내막을 자세히 소개한다. 

“MB 민간 독재” 공격한 DJ에 청와대 반감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23일 서거하자 그동안 침묵했던 DJ는 의아할 정도로 현직의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굉장한 험담을 토해냈다. 당시 청와대 사람들은 기분이 여간 상하지 않았다. 수석들 사이에서 침묵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말까지 나왔다. MB에 대한 DJ의 공격은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國民葬)이 끝나고서도 한 달 이상 이어졌다. 청와대 수석회의에서는 대응책이 구체적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할 정도로 격앙된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러나 MB의 한마디가 그런 기류를 차단시켰다. “어찌 됐건 국가원수가 서거했다. 나도 할 말이 있지만 살아 있는 정권이 국격(國格)을 떨어뜨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침묵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두 달여 만인 7월13일 폐렴과 폐색전증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의식이 흐렸다. 이때부터 청와대가 바빠졌다. 가장 바빠진 사람이 김두우 정무기획비서관(후 홍보수석)이었다. 김 비서관은 사안에 따라 수석회의에도 참석할 때가 있을 만큼 MB의 신임이 두터웠다. 청와대라는 조직은 대통령의 총애를 가지고 먹고사는 집단이다. 

MB가 김 비서관을 불렀다. DJ가 입원했는데 문병을 가야 할 것 아니냐고 청와대 분위기를 물은 셈이다. 사실 청와대 참모들은 DJ의 공격으로 인해 기분이 몹시 언짢아 있었고, 그것을 MB도 알고 있었다. 두 달 가까이 독설에 시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김 비서관은 사실대로 보고했다. 대다수의 수석이 DJ 문병에 부정적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올렸다. MB는 정정길 비서실장을 세브란스병원으로 보내 문병을 하도록 결정했다. 

이제부터 문제는 DJ의 장례였다. DJ의 건강 상태가 속속 보고되어 왔고 곧 운명할 것 같은데 맹형규 정무수석도 특별한 지침이 없었다. 바로 직전 노 전 대통령도 국민장으로 했으니 DJ도 국민장으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인식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다시 김두우 비서관 자신이 나서야 했다. 김 비서관은 수석회의에서 의견을 냈다. “DJ가 곧 돌아가실 거 같은데, 장례 문제를 결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략적인 대응책을 갖고 있어야 되겠다는 점에서 서거하시게 되면 국장으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수석들의 눈빛이 갑자기 굳어졌다. MB 정부를 민간 독재 정부라고 공격한 사람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도 없었지만, 수석들은 국장에 대부분 반대였다. 맹형규 정무수석부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김 비서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DJ가 좌파나 진보 세력을 떠나 일정 부분 정부 비판 세력들의 ‘대부’ 역할을 해왔고, MB를 향해 공격을 한 것은 보수 진영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야 되는 상황인 만큼 청와대는 정치 전략적 차원에서도 대응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8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필자에게 써 준 휘호.

김 비서관 건의 받아들인 MB 8월 초에 결심 

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맹 수석은 상당히 신중했고, 여전히 ‘국장은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결론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현직에 있을 때 서거한 것도 아니고, 2006년 10월에 서거한 최규하 전 대통령과 두 달 전의 노무현 전 대통령도 국민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 여론도 고려해야 했다. 두 전직 대통령이 국민장이었는데 유독 DJ만 국장으로 치른다는 게 형평성에도 맞지 않고, 특히 국민들의 반대 여론을 행정력으로 잠재울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처럼 보수 지지 세력층에서 국장에 대한 여러 반대가 심각할 것임을 맹 수석이나 청와대 참모들은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무 부서인 행정안전부의 의견도 있어야 하지만, 사실상 결정권이 청와대에 있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현실이었다. 결론적으로 DJ의 장례 형식과 안장(安葬) 장소 문제는 현직인 이명박 대통령의 결심으로 결정이 났다. 장례 형식은 국장, 안장 장소는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동작동 국립묘지)이었다. 다만 DJ가 서거할 때까지 측근 수석들에게도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라고 함구령을 내렸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국장을 요구한 사람이 YS였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숨 가빴다. DJ가 7월13일 입원한 이후 8월 초에 이미 MB의 국장 결심이 서 있었는데도, 일부 언론에서는 마치 박지원 의원이 맹형규 정무수석과의 담판을 통해 DJ 서거 3일 전에 결정했다거나, 서거 이틀 후에 결정됐다는 등의 보도를 내보냈다. 이는 박 의원과 동교동 측의 주장만 듣고 소설에 가까운 결정 과정을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청와대 내부에서 숨 가쁘게 전개된 실제 과정을 모른 탓이었다. 당시 민주당(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과 유족 측이 국장을 고집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그것 또한 사실과 다르다. 독자적인 MB의 결심이었고, 그 과정에 YS의 요구가 있었다.

사실상 당시 시점까지 국장과 국민장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게 없었다. 법률 제3조에 따라 ‘주무 장관의 제청에 의하여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한다’고 되어 있는 것이 전부였다. 어떤 경우에 국민장이고, 어떤 경우가 국장이라는 기준이나 규정이 없었던 셈이다. 최규하·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은 자연스럽게 국민장으로 귀결됐지만, 그에 비해 DJ가 갖는 무게감은 또 그만큼 만만치 않은 탓이었다. 아무튼 동교동 측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청와대의 대응은 긴급하게 돌아갔다. 정무수석실에는 4명의 비서관이 있었다. 선임인 김두우 정무기획비서관을 비롯해 정무비서관, 행정자치비서관, 시민사회비서관이 그들이다. 

이미 김 비서관이 수석회의에서 장례를 국장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지만, 누구보다 세 명의 비서관에게 DJ를 국장으로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들의 동의가 있어야 동력이 붙어서 추진될 일이었다. 김 비서관은 DJ의 민주화운동부터 시작해 여야의 대치, 정무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여러 상황들까지 진지하게 설명했다. 비서관들은 공감했다. 

“처음에는 비서관들이 청와대 전체 분위기를 아니까 놀라서 눈이 동그래지더니, 결국은 내 얘기가 맞는다고 동의를 했어요. 물론 과연 VIP(MB)께서도 동의를 하시겠느냐고 되묻는 비서관이 있었지만, 나는 어른께서 이미 방향을 잡고 계시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다만 워낙 말씀이 없고 참모들이 건의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하는 경우를 거의 못 봤기 때문에 어른의 뜻은 아직 모른다고 했지요.”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8월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 마련된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공식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뒤 돌아서고 있다.

“정부 발표로 나올 때까지 절대 보안 유지해”

정무수석실 비서관 회의 결과는 수석에게 보고됐다. 맹 수석은 말이 없었다. 침묵은 부정이었고 그 눈빛은 차가웠다. 결국 맹 수석의 불편한 심기가 터졌다. “그렇게 고집한다면 당신이 대통령님을 설득하시오!” 김 비서관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맹 수석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했다. DJ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장례 형식이 결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큰일이었다. 청와대의 시계라고 늦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위계질서를 무시한 채 김 비서관이 맹 수석을 제치고 나선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고민 끝에 떠오른 방법이 의전비서관을 통하자는 것이었다. 대통령께서 비서관들을 불러주도록 하면 일이 되는 것이다. 

김 비서관은 시급히 김창범 의전비서관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MB는 김 의전비서관의 건의를 받고 청와대 영풍문 2층 커피숍으로 비서관들을 모이도록 했다. “비서관들이 커피 한잔하자는데 어려울 게 뭐 있어.” 대통령이 비서관들을 직접 불렀으니 맹 수석의 체면은 손상이 없었다. 커피타임 형식이었다. 그 자리에는 정무수석실 비서관들만이 아니라 홍보수석실 비서관들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두우 비서관은 준비한 A4용지 한 장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어 MB 앞에 올렸다. 대통령에게 복잡한 보고서는 금물이었다. 이윽고 김 비서관은 국장을 했을 때의 장점과 단점, 국민장을 했을 때의 장점과 단점을 6 대 1 정도로 비교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MB는 시종 듣기만 할 뿐 일체의 코멘트가 없었다. 이미 결심이 서 있다는 뜻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김 비서관은 대통령이 침묵하고 있는 게 오히려 겁이 덜컥 날 지경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김대중 대통령까지 서거하시면 야당 쪽 대통령 두 분이 연거푸 돌아가시는 건데, 야당 지지자들은 굉장히 허탈해할 겁니다. 특히 호남 쪽 사람들은 수십 년을 선생님으로 모셔온 분이 돌아가시면 얼마나 비통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국민장을 하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이 전부 반대자로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침묵하고 있던 MB가 툭 던지듯이 반문했다. “우리가 국장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우리를 지지하겠어?”

분명히 반어법의 질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김 비서관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맞습니다. 국장을 한다고 해서 우리 지지로 돌아서지는 않는다는 거 압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반대와 소극적인 반대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국민장을 언급하고 야당이 계속 국장을 주장하고, 그런 상황이 되면 국민장을 하고도 그쪽 사람들한테 욕을 먹고, 적극적인 반대로 돌아서게 만드는 계기를 우리가 만들어주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MB가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 스쳐 보였다. 분명 수긍하는 미소가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야 할 것이 정치적 판단인데, 장례를 치르는 기간 동안 야당이 장례의 중심에 서게 만들어주면 안 됩니다. 정부가 국민장을 하겠다고 하고 저쪽에서 국장을 하겠다고 하면 계속 현 정부를 비판하면서 장례의 중심에 야당이 서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 국장을 하겠다고 하면 야당이 빠지고 정부와 이희호 여사가 중심이 됩니다. 정부 주도가 되는 겁니다.” MB가 툭 던지듯 한마디 했다. “전직 대통령들하고 형평성 문제가 있다고 할 사람이 많지 않겠어?” 김 비서관은 반사적으로 계속했다. “그건 정부가 대답하지 않아도 될 문제라고 봅니다. 국민들이 평가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의 우리 사회를 보면 결국 산업화와 민주화, 이 과정을 거쳐서 선진화로 가는 것인데, 사실상 산업화를 얘기하면 박정희 대통령, 민주화를 얘기하면 김대중·김영삼 두 대통령을 빼고 어떻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사회에 공헌한 바를 따지면 충분히 국장을 받을 가치가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MB의 눈빛이 비서관들을 향했다. “우리 국민들이 역대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 잘잘못에 대해서 비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자들이 있을 수 있지만 모든 국민과 이별하는 상황에서 우리 국민들이 그분들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줘야 돼. 그래야 대통령을 뽑은 국민들 자존심도 살려주는 거 아닌가. 그게 장례 형식이 가지는 중요성이야. 그러고 새로운 민주주의는 대립과 투쟁을 친구로 삼기보다는 관용과 타협을 친구로 삼아야 해. 나도 자네 의견에 동감이야.”

역사는 이렇게 탄생되는가. 물론 대통령이 커피타임에서 동감을 하고,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는 듯이 얘기할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MB의 심중에는 이미 국장 계획이 들어 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여기서 나온 얘기, 수석들한테는 물론이고 정부 발표로 나올 때까지 절대 보안을 유지해.” 대통령의 지시였다. 전부 마른침을 삼켰다. 남아 있는 커피 잔을 들며 MB가 김 비서관을 응시했다. “보수 쪽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겠어? YS 그 어른은 뭐라 하겠나?” “그건 저희들이 설득을 하겠습니다!” MB는 그렇게 하라 말라 일체의 말이 없었다. 

YS “DJ와 화해” 언급 배경은 MB의 청와대 

여기서 YS의 결심 과정이 비화로 남겨졌다. 김두우 비서관은 많이 급해졌다. 보수 진영 쪽을 설득하는 작전은 또 다른 전략이 필요하고 진정성을 담아야 할 일이었다. 우선 보수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부터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중에 선두에 떠오르는 인물이 YS, 박근혜, 언론인 조갑제 등이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박근혜 전 대표와 조갑제씨는 이해를 시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무엇보다 YS를 설득하는 일이 어려웠다. 장고(長考)를 거듭한 끝에 김 비서관은 YS의 차남 김현철 당시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을 떠올렸다. 임태희 의원(후 대통령실장)에게 SOS를 쳤다. 임 의원은 김 부소장과 막역했다. 

그날이 8월8일 저녁이었다. 임 의원은 김 부소장을 만나 DJ의 국장 문제를 논의했고 YS가 지지해주도록 설득을 요청했다. 김 부소장은 YS를 설득해보겠다는 답변을 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YS를 만난 후 김 부소장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DJ의 국장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것이었다. 김 비서관은 아찔했다. 우선 김 부소장부터 왜 DJ의 국장을 지지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김 비서관은 대안을 제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즉각 보훈처와 서울현충원에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묘역으로 사용할 부지가 있느냐는 궁금증부터 풀어야 할 일이었다. 현충원의 답변은 담만 하나 헐면 4명은 묻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 비서관은 무릎을 쳤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어찌 될지 모르지만, DJ를 포함해도 YS와 MB까지는 되겠다 싶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다시 김현철 부소장에게 긴급히 연락했다. 8월9일 아침, 김 부소장을 통해 돌아온 YS의 답변은 ‘동작동 국립묘지(서울현충원)에 안장하는 조건’으로 DJ의 장례를 국장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김 비서관은 역시 판단이 빠른 어른이라고 생각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서 김 부소장에게 다시 제안했다. “어른(YS)께서 DJ 문병을 하시고 두 분이 화해하시면 국민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YS 못지않게 정치 감각이 뛰어난 김 부소장은 즉시 아버지에게 DJ와의 화해를 말씀드리겠다고 했고, YS는 8월10일 신속하게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가 DJ를 문병했다. 문병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질문에 YS는 “그렇게 봐도 된다”고 답했다. 화해 선언이 이뤄지는 순간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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