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 왕국’ 롯데의 철옹성 무너뜨려라”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5.11.26 21:14
  • 호수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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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점 앞세워 공세 나선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야망

‘정용진의 승리, 신동빈의 패배’. 11월14일 면세점 사업자 결과가 발표되면서 두 기업 총수 간 엇갈린 희비에 언론은 주목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유통업계 라이벌로 통한다. 백화점과 마트, 복합쇼핑몰과 드러그스토어까지 새로 진출하는 사업마다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다. 그룹 규모만 보면 롯데가 앞서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집단정보 포털 오프니(OPNI)에 따르면, 2015년 4월 기준으로 롯데의 재계 순위는 7위로 신세계(18위)보다 11계단이나 높다.

7월 1차 탈락 후에도 TF팀 존속시키며 독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이 다르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신세계의 약진이 더 두드러진다. 롯데의 순위는 10년간 7위를 유지했지만, 신세계는 27위에서 18위로 9계단이나 상승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롯데의 자산은 30조3020억원에서 90조4070억원으로 208.3% 증가했다. 반면 신세계는 6조140억원에서 27조100억원으로 341.4%나 늘었다. 자산 규모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의 자산 증가율 평균을 두 배 이상 상회하는 수치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11월5일 강원도 속초에서 열린 대졸 신입 1년 차 연수캠프에서 ‘어메이징 신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 신세계그룹 제공

‘유통 왕국’ 롯데를 공격하기 위한 신세계의 야망을 주도한 인물이 정용진 부회장이다. 정 부회장은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장남이자,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외손자다. 2006년 신세계 부회장에 취임해 본격적인 경영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신세계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삼성에서 분리될 때 신세계로 건너온 구학서 전 회장(현 고문)과 허인철 전 이마트 사장(현 오리온 부회장) 등이 사실상 그룹을 이끌었다. 기자들과 만날 때도 구 전 회장이나 허 전 사장이 그림자처럼 정 부회장을 따라다녔다. 어려운 질문은 이들이 대신 대답하기도 했다. 2009년 가신그룹이 일제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정 부회장은 ‘홀로 서기’에 나서고 있다.

정 부회장의 평소 성격은 소탈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총수 신분이지만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직접 대중과 소통할 정도다. 해외 출장 때도 직원들이 공항에 마중 나오는 것을 꺼린다. 오랜 기간 정 부회장을 보좌한 신세계그룹의 한 고위 인사는 “해외 출장을 나가도 직접 가방을 들고 다닌다. 주변에서 가방을 달라 해도 손사래를 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업은 누구보다 꼼꼼하고 공격적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세계는 최근 백화점이나 마트 위주 사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정 부회장은 면세점을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선택했다. 2013년 부산 시내 면세점과 김해공항 면세점 사업자로 선정됐지만, 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신세계의 면세점을 운영하는 조선호텔은 지난해 159억원의 영업손실과 377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정 부회장은 올해 서울 시내 면세점 사업에 도전장을 냈다. 그룹의 모태인 신세계 본점 전체를 면세점으로 내놓았다. 4월 초에는 신세계 산하에 면세점 법인인 ‘신세계DF’를 설립했다. 재계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모회사인 신세계는 면세점 운영 경험이 전혀 없다”며 “경영 평가는 모회사인 신세계로 받고, 관리 평가는 계열사인 조선호텔에 맞춰 받으려는 꼼수”라고 지적했다.

서울 중구 소공로 신세계백화점 본점 신관의 쇼핑객들. ⓒ 시사저널 최준필

신세계-롯데, 신규 사업 진출 사사건건 충돌

측근들의 반대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서울 명동 인근의 상습적인 교통체증이 우선 문제로 꼽혔다. 소공동 롯데면세점 본점과도 거리가 가까워 상권 중복 우려도 있었다. 측근들은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을 면세점 후보지로 추천했다. 우려한 대로 신세계DF는 7월 발표된 1차 서울 시내 신규 면세점 경쟁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정 부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거액을 투자해 한국은행 분수대를 시민의 쉼터이자 도심 관광을 위한 체험 코스로 리뉴얼했다. 시내 면세점 특허권을 위해 구성한 TF팀도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오히려 정 부회장은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결국 정 부회장은 재수 끝에 부산뿐 아니라 서울의 시내 면세점 특허권까지 손에 쥐게 됐다. 신세계그룹의 한 관계자는 “서울 시내 신규 면세점 특허 입찰에 실패한 후에도 사회 환원 계획을 묵묵히 실행해왔다”며 “정 부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정 부회장은 11월5일 강원도 속초에서 진행된 대졸 신입 1년 차 연수캠프에서 “신세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어메이징한 콘텐츠로 가득 찬 면세점을 선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은 내년 신세계그룹의 면세점 사업 매출이 1조30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내 면세점 시장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2007년 2조6442억원에서 2014년 6조8000억원으로 6년 만에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올해는 8조원대, 내년에는 10조원대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면세 시장은 그동안 롯데와 신라의 독과점 체제로 사실상 운영돼왔다. 롯데면세점과 신라면세점의 비중이 전체의 80%에 이르렀다. 신세계가 서울 시내 면세점 특허를 획득하면서 롯데와 신라로 양분되던 국내 면세점 시장의 지각변동 역시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롯데와 신세계는 그동안 신규 사업 진출 과정에서 사사건건 부딪쳐왔다. 2012년 9월에는 인천종합터미널 부지를 놓고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이곳은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가 15년 이상 영업을 해온 곳이다. 1000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증축공사까지 마쳤다. 하지만 롯데가 버스터미널 부지를 인수하면서 신세계는 쫓겨날 처지에 놓였다. 결국 신세계는 소송을 제기했고,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신세계가 2012년 말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이 들어서 있는 센트럴시티를 1조2000여 억원에 인수한 것도 이 때문이다. 광주광역시에 신세계가 입주해 있는 광주터미널의 경우 5000억원의 보증금을 주고 입점 계약을 2033년까지 연장했다. 정용진 부회장이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을 직접 만나 매각을 타진했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신세계 측은 롯데와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시장의 생각은 다르다. 롯데가 공격할 수 있는 싹을 미리 잘라버리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정 부회장은 올해 4월 금호산업 인수전에 참여했다가 하루 만에 입찰을 철회했다. 최종 입찰자 명단에 롯데가 빠져 있자 슬그머니 발을 뺀 것으로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신세계가 시내 면세점 특허권을 획득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롯데는 연매출 5000억원 수준의 서울 잠실 월드타워점 특허권을 잃어버리게 됐다. 신세계는 명동 상권을 놓고 롯데와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위치까지 격상됐다. 정 부회장의 뚝심과 리더십으로 분위기를 역전시킨 것이어서 향후 두 그룹의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

일단 분위기 반전을 위한 기선은 신세계가 제압했다. 20년 숙원 사업인 서울 시내 면세점 사업에 진출하면서 그룹의 모든 역량을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면세점 구성과 오픈, 운영 준비에 필요한 절차는 이미 시작한 상태다. 이르면 내년 4월 말, 늦어도 5월 중에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시내 면세점을 오픈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계획대로 진행되면 2020년까지 5년간 총 10조원의 매출을 면세점 사업에서 올릴 것으로 그룹 측은 기대하고 있다.

특히 면세점 후보지인 신세계백화점 본점은 명동과 남대문, 남산을 관광타운으로 묶을 수 있는 최적의 입지로 꼽힌다. 신세계는 5년간 530억원의 사업비를 투자해 면세점 주변을 관광 클러스터화할 계획이다. 신세계타운에 위치한 메사빌딩과 새로 인수한 SC제일은행 건물 등도 최대한 활용할 예정이다. 성영목 신세계DF 사장은 “지난해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 중 81%인 927만명이 서울 도심 관광지역을 찾았다”며 “명동을 도심면세특구로 개발하면서 뉴욕의 맨해튼이나 일본의 긴자, 홍콩의 침사추이처럼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고 밝혔다.

신세계DF가 10월26일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신세계 시내 면세점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신세계그룹 제공

명동·남대문·남산을 관광타운으로 묶는다

도심 관광지 확대 재생산을 위해서는 남대문시장의 부활도 시급하다. 명동에만 머무르던 외국인 관광객을 자연스럽게 남대문시장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남대문시장 역시 스페인 전통시장인 ‘산타카테리나’나 터키의 ‘그랜드바자르’처럼 세계적인 명품 시장으로 육성시킬 계획이다. 서울뿐만이 아니다. 롯데의 안방 격이나 다름없는 부산에서도 신세계의 공세는 눈에 띈다.

지금까지 기존 파라다이스호텔에 위치한 면세점을 인수해서 운영해왔으나, 이번에 신세계 센텀시티 내 B부지로 확장 이전하게 됐다. 파라다이스호텔 매장이 6940㎡(약 2100평)인 데 반해, 새 매장은 8600㎡(약 2600평)로 더 넓어지게 된다. 신세계 측은 세계 최대 백화점인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과 주변의 다양한 관광 인프라를 연계해 부산 지역 경제 및 외국인 관광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센텀시티가 기존 파라다이스호텔에 비해 중국 등 해외 관광객들의 접근성이 훨씬 좋기 때문에 상당한 고객 증가가 뒤따를 것으로 믿는 눈치다. 최근 불거진 차명 주식 전환 논란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과연 정 부회장이 면세점을 앞세운 ‘유통 왕국’ 경쟁에서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을까. 주변에서는 신세계의 공세와 롯데의 수성 대결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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