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와 달리 이순신은 실존한 영웅이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5.12.03 21:12
  • 호수 136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그래픽노블 <이순신 전사 그리고 수호자>의 작가 온리 콤판을 만나다

이순신을 그린 그래픽노블(기자가 만화라고 말하면 그는 끝까지 그래픽노블이라고 답했다)이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다.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와 자료 조사를 하고 영문판 <난중일기>와 <징비록>까지 읽어가며 3년간 준비했다고 한다. <이순신 전사 그리고 수호자(Yi Soon Shin Warrior and Defender)> 1권을 미국에 처음 내놓은 게 2009년이었다. 캐나다와 미국에서 열린 각종 만화 컨벤션에 직접 달려가 하루에 10시간씩 직접 책을 팔기도 했다.

재정적인 어려움 탓에 작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12권 중 7권을 끝내고 난 후 미국 내 후원이 끊겼다. 그래서 ‘이순신의 나라’인 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국내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제작비 모금을 청원했다. 목표액은 9600달러. 그런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2만5000달러가 모였다. 국내에서도 이미 적지 않은 사람이 이순신을 그리는 푸른 눈의 외국인을 알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정식으로 국내에 나오지 않았지만 자체적으로 번역본이 인터넷에서 돌았다. 읽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고퀄’(훌륭한 퀄리티)이라고 칭찬했다. 중단되는 걸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은 제작비를 한 푼 두 푼 보탰다.

ⓒ 서울문화사 제공

2009년에 시작했으니 이 작업만 6년째다. 결국 올해 국내 출판사인 서울문화사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국내 독자들은 이제 외국인이 그린 ‘고퀄’의 이순신을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됐다. 웹툰 사이트인 ‘빅툰’(http://www.big-toon.com)에서도 볼 수 있다.

이순신의 나라에 이순신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외국인은 그 존재만으로도 흥미롭다. 11월25일, 기자는 주인공인 온리 콤판(Onrie Kompan, 32)을 만났다. 이순신에 푹 빠진, 미국 시카고에 사는 백인인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대뜸 이런다. “오늘이 미국 가기 전 마지막 인터뷰니까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리”라고.

<명량>의 최민식, 콤판 책 들고 직접 사진 찍어

사실 누구라도 콤판의 작품을 보면 한 번 수입해보려고 덤벼들 법하다. 특히 외국인이 그린 이순신이라는 점은 희귀하니까 말이다. 영화 <명량>의 제작사인 빅스톤픽처스는 실제로 콤판에게 연락해 자문을 구하고 콤판의 책을 홍보에 써도 되겠느냐고 문의하기도 했다. 이순신 역을 맡은 배우 최민식은 콤판의 책을 들고 직접 사진을 찍었다. 콤판의 이순신이 국내 문화판에 꽤 알려졌다는 증거인 셈이다. 그런데도 국내로 역수입(?)해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유가 있었다. 이 책은 19금(禁)이다. 조선의 백성들이 도륙당하는 장면도 있고 여성들이 겁탈당하는 장면도 있다. 19금 이순신 만화를 두고 국내 출판사들은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다”며 출판을 꺼렸다. 청소년 관람가가 아닌 19금 위인전이라 국내 정서에 낯선 존재다.

“선정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런데 <난중일기>를 보면 왜군이 여성들을 겁탈하고 아이들을 노예로 삼고 사람을 죽이는 등 폭력적인 묘사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은 전쟁이기 때문이다. 성적인 묘사? 인물의 성격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장치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다양한 시각에서 관찰되고 해석된다. 그동안 우리는 주로 이순신 장군의 입장에서 조명된 임진왜란을 접했다. 반면 <징비록> 같은 경우는 전시 총사령관이나 다름없었던 영의정 겸 도체찰사 류성룡의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본다. 콤판은 <징비록>도 읽었다. “<징비록>은 조정이 전쟁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 쓴 책이었다. 마치 우리 미국 정부와 비슷했다. 우리 역시 좌우로 갈려서 끊임없이 다투고 있어서다. 그런 점에서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는 전 세계가 알 필요가 있다.”

콤판이 그리는 이순신이 훌륭한 수호자인 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네 위인전과 달리 그리 거룩해 보이지 않는다. 지키지 못한 수많은 사람의 망령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암살자를 병실로 꾀어내려고 하다가 환자들을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엄청난 잔소리를 듣는다. 좀 더 인간적인 이순신이다. 콤판은 이순신을 위엄은 있되 거룩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순신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신은 실제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땅에 없다는 건 자명하다. 하지만 이순신은 우리와 함께 살았던 인물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서울문화사 제공

“우리 팀은 ‘이순신의 학생’들이다”

콤판의 모국인 미국은 히어로의 나라다. 캡틴아메리카부터 아이언맨, 스파이더맨까지 마블코믹스가 만들어낸 영웅이 수두룩하다. 슈퍼맨·배트맨·원더우먼 등 DC코믹스가 창조해낸 영웅은 미국을 열광시킨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그런 가공의 영웅이 없다. 대신 실제로 존재했던 영웅이 주로 있다.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장군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순신이 그랬다. 지난해에는 영화 <명량>으로, 올해는 사극 <징비록>으로 재조명됐다.

“사람들이 이순신에 열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콤판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미국에서는 슈퍼히어로에 열광하지만 그들은 실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순신은 실존했다. 이건 큰 차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써준 스탠 리 마블코믹스 명예회장도 비슷한 지적을 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슈퍼히어로들과 달리 그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점에 놀랐다. 캡틴아메리카와 스파이더맨과 다를 것이 없다.”

일단 그의 작품은 모든 페이지가 컬러다. 게다가 그냥 넘어갈 법한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세세하게 표현했다. 거북선과 판옥선의 모양은 마치 눈앞에서 보고 그린 듯 세밀하며 조선군과 왜군의 갑옷과 무기도 사료대로 표현해냈다. 이런 건 혼자해서는 불가능하다. 콤판에겐 함께하는 팀이 있다.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미국 등이 모여 이룬 다국적 팀이다.

이런 외인부대들이 모여 이순신을 그려냈다. 2005년 우연히 KBS 사극인 <불멸의 이순신>을 보고 더 알고 싶어 <난중일기>와 <임진장초>를 읽은 ‘이순신 마니아’ 콤판이야 그렇다 해도 다른 팀원들은 이순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콤판은 한마디로 정의했다. “우리 팀은 ‘이순신 장군의 학생’이다.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투입할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너무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작품 끝나면 이순신의 유년기를 그릴 것”

동양인이 동양인을 그리는 것은 쉬워도 서양인을 그리는 것은 쉽지 않을 터다. 반대로 콤판 같은 백인이 동양인, 그것도 16세기의 한국인을 그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시아인을 묘사하는 건 지금도 어렵다.” 역사의 흐름도 이질적이다. “서양 사람들은 아시아 역사를 굉장히 복잡하고 우리와는 다른 역사로 받아들인다”고 말한 콤판은 동서양, 서로의 다름을 큰 장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간극을 좁히기 위해 그부터 스스로 나름 노력 중이다. 콤판은 요즘 한국어를 배운다. “한국말 얼마나 잘해요?” 영어로 말하던 그의 입에서 갑자기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모기 피만큼.” 아직은 가나다 정도 알고 있는 수준이란다. 독자들과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는 게 목표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상대방이 이해하고 있는 언어로 말을 하면 그의 머릿속으로 전달되지만, 상대의 모국어로 소통하면 마음으로 전달된다.”

콤판의 작업은 이제 8권째에 들어간다. 8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량해전을 다룬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척이 일본 수군 130여 척을 격퇴한 바로 그 전쟁이다. 그에게 가장 큰 고민은 임진왜란, 그리고 이순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8권은 다행히 완성할 수 있을 듯한데 그 뒤부터는 잘 모르겠단다. 그가 처한 미국에서의 작업 환경은 매우 어렵다. 그 어떤 출판사나 배급사가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출판이나 프린팅을 모두 스스로 하고 있다.

그런 악조건이지만 콤판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5년간의 작업이 더 계획돼 있다. 그래야 원래 모습 그대로, 3부작 12권의 <이순신 전사 그리고 수호자>가 마무리된다. 끝내고 나서는 이순신의 유년기 이야기를 ‘프리퀄’(선행 사건을 다루는 속편)로 그려볼 생각이다. 이순신을 전 세계에 전달하겠다는 콤판의 꿈은 이제 막 시작됐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