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강속구 투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박동희 | 스포츠춘추 기자 (.)
  • 승인 2015.12.03 21:19
  • 호수 136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리미어12’에서 日 에이스 오타니의 강속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한국 야구의 현주소

파이어볼러(Fireballer). 강속구 투수를 뜻하는 말이다. 야구팬들은 담장을 넘기는 시원한 홈런에도 환호하지만, 시속 160㎞로 내리꽂히는 강속구에도 열광한다. 메이저리그 홈런왕 베이브 루스가 “내 홈런은 두세 경기에 한 번 볼 수 있다. 그러나 월터 존슨의 강속구는 한 경기에 100번 이상 나온다. 관중이 나보다 존슨에게 열광하는 걸 존중한다”고 말한 건 강속구 투수의 매력을 잘 대변한 명언이다.

지금도 야구계엔 ‘좌완 파이어볼러는 지옥에 가서라도 데려온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우완보다 좌완이 희소한 데다 강속구 투수는 더 희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 야구에서는 좌완 파이어볼러는 고사하고, 강속구 투수조차 보기 힘들다. 그 많던 강속구 투수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11월8일 일본 삿포로돔. 세계 야구 랭킹 12위 안에 드는 나라만 참가하는 ‘프리미어12’의 개막전이 이곳에서 열렸다. 개막전 주인공은 한국과 일본. 국제대회 때마다 일본에 강한 면모를 보인 한국 대표팀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김인식 대표팀 감독은 매우 신중했다.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김 감독은 “개막전 일본 선발투수가 원체 ‘괴물’이라 우리 선수들이 얼마나 점수를 뽑을지 모르겠다”며 “가뜩이나 타격감이 좋지 않은 타자가 많아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오타니 쇼헤이(사진)를 필두로 구성된 일본 국가대표 투수진은 150㎞ 이상의 파이어볼러가 다수를 차지하면서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 AP연합

김 감독이 ‘괴물’로 칭한 일본 선발투수는 오타니 쇼헤이였다. 일본프로야구(NPB)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뛰는 오타니는 프로 3년 차의 21세 투수였다. 올 시즌 NPB리그 성적은 22경기에 선발 등판해 15승 5패, 평균자책 2.24, 탈삼진 196개였다.

성적만 본다면 한국 타자들이 공략 못할 투수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의 강속구였다. 오타니는 고교 시절부터 시속 160㎞ 강속구를 던진 괴물이었다. 프로에 입문해선 공이 더 빨라졌다. 김 감독의 말대로 시즌을 끝내고 푹 쉰 선수가 많은 터라, 한국 타자들이 과연 오타니의 강속구를 얼마나 공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김 감독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오타니는 1회부터 시속 160㎞의 강속구를 뿌렸다. 그것도 정확히 제구가 된 공이었다. 더 놀라운 건 변화구인 포크볼 구속도 시속 147㎞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한국프로야구(KBO)에서 시속 147㎞면 강속구에 해당하는 공이다.

한국 타자들은 오타니의 강속구에 철저하게 막혀 ‘0’의 행진을 이어갔다. 6회까지 21명의 한국 타자를 맞아 91개의 투구 수를 기록한 오타니는 안타와 볼넷 2개씩만 내준 채 무려 10명을 탈삼진으로 돌려세우는 괴력을 과시했다. 문제는 7회부터 등판한 노리모토 다카히로 역시 강속구 투수라는 데 있었다. 7회 등판한 노리모토는 시속 157㎞의 강속구를 뿌리며 8회까지 9명의 한국 타자 가운데 세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9회 마무리로 등판한 좌완 마쓰이 유키 역시 시속 140㎞ 후반대의 빠른 공으로 한국 타선을 무득점으로 막았다. 스코어 0 대 5. 한국의 완패였다. 이 경기를 관전한 이용철 KBS 해설위원은 “KBO리그에서 우리 타자들이 시속 150㎞ 강속구는 간혹 봤을지 모르지만, 시속 155㎞ 이상의 강속구는 거의 접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일본전 패배를 ‘강속구 완패’로 규정했다.

“일본 야구 소년들의 롤 모델이 바뀌었다”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비록 한국이 9회 대역전극을 펼쳤지만, 선발투수 오타니 앞에서는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7이닝 동안 단 1안타에 그쳤고, 삼진만 무려 11개를 당했다. ‘강속구 완패’라는 이용철 위원과 같은 진단을 내린 야구 전문가는 많았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기자와의 대화에서 흥미로운 화두를 던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대표팀에는 강속구 투수보다 제구(制球) 투수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허 위원은 “마쓰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 다나카 마사히로 같은 강속구 투수도 있었지만, 그 투수들도 지금의 오타니나 노리모토보다 빠른 공을 던지진 못했다”며 “몇 년 전까지 일본 대표팀의 투수진을 보면 와다 쓰요시, 스기우치 도시야, 이와쿠마 히사시처럼 제구가 좋은 투수가 더 많았다”고 설명했다.

일본 현지 야구 전문가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야구평론가 하세가와 쇼이치는 “최근 들어 일본 투수들의 색깔이 강속구 위주로 확 바뀌었다. 거기엔 메이저리그를 동경하는 리틀야구 선수들의 롤 모델이 바뀐 게 큰 영향을 미쳤다”며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즉시 전력감만 찾는 국내 야구 풍토도 원인

“과거 일본 야구는 속구보단 제구 위주였다. 제구 좋은 투수들이 리그 톱클래스를 차지했다. 지도자들도 정확한 제구를 주문했다. 1990년대 중반 노모 히데오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후에도 노모처럼 ‘제구와 변화구 능력이 좋은 투수’가 리틀야구 선수들의 롤모델이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인 선수들이 대거 미국에 진출하면서 메이저리그가 일본 야구의 인기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소년들이 메이저리그의 유명 강속구 투수들을 롤 모델로 삼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세계 최고 선수들이 뛰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면 공이 빨라야 한다’는 생각이 싹튼 것도 그즈음부터다. 2005년에 비해 2015년 NPB리그 평균 속구 구속이 시속 2.7㎞ 올라간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자가 해마다 일본 야구계를 취재하며 느낀 것도 다르지 않다. 과거처럼 제구만 강조하던 지도자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제구만큼이나 속구 향상에 주안점을 둔 지도가 일반화됐다. 이는 일본 서점에만 가봐도 안다. 일본 서점의 야구 서적 코너엔 ‘강속구 비결’ ‘당신도 부상 없이 시속 150㎞를 던질 수 있다’는 제목의 책들이 즐비하다. 하세가와는 “일본 최고의 야구 스타가 향후 10년간 야구 소년들의 미래를 좌지우지한다는 걸 고려하면 오타니의 강속구에 크게 감명받은 야구 소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강속구 투수가 되려고 노력할 게 분명하다”며 “실제로 고시엔 야구(일본의 고교야구대회)를 취재하면 시속 150㎞ 이상을 던지는 강속구 투수를 꽤 많이 목격한다”고 귀띔했다.

강속구 투수가 속속 등장하는 일본 야구와 달리 한국 야구에선 강속구 투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시속 150㎞ 이상을 던지는 유망주 투수가 드물다. 식단 변화와 웨이트트레이닝 활성화로 아마추어 야구선수들의 체형이 10년 전과 비교해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걸 고려하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KBO리그에서 3년 연속 홀드왕에 오른 바 있는 차명주 잼 피트니스 원장은 야구 전문 재활 트레이닝센터를 운영 중이다. 10년 가까이 아마추어 선수들의 재활을 도와온 차 원장은 “그 많던 강속구 유망주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는 기자의 말에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선수들 죄다 수술 받고 병원에 있거나 재활센터에서 재기 중이거나 은퇴하고 다른 일 하고 있습니다.”

차 원장은 “리틀야구 때까지만 해도 국내 야구 소년들의 공이 일본 아이들보다 빠르다. 그러나 아이들이 중·고·대학·프로로 갈수록 이 상황이 역전된다”며 “혹사를 투혼으로 포장하는 일부 지도자들과 그 지도자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 야구계의 무관심으로 많은 아이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심각한 부상을 경험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차 원장의 재활센터를 찾는 40% 이상의 아이들이 중학생이다. 나머지 50%는 고교생, 10%가 대학생과 프로 2군 선수들이다.

아마추어 시절 심각한 혹사로 ‘최고 좌완 유망주’란 명성을 이어가지 못한 차 원장은 작심한 듯 목소릴 높였다. “주말리그가 시작하면서 평일에는 경기를 할 수 없게 됐다. 과거처럼 유망주 투수가 많은 경기에 투입되는 혹사를 제도적으로 막은 셈이다. 하지만 일선 학교에선 ‘연습경기’란 명목으로 평일에도 다른 학교와 경기를 치른다. 한 술 더 떠 주말리그를 시행하며 사라졌던 전국대회들이 하나둘 부활하며 아이들의 체력 부담이 더 심해졌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여전히 아이들이 잘못된 투구폼으로 공을 던진다는 것이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투구폼을 바로잡아줘야 하는데, 당장의 성적에 눈먼 학교와 지도자들이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강속구 투수보다 제구 좋은 투수를 원하는 프로 스카우트가 많은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한 프로구단의 스카우트는 “강속구 투수가 1군 핵심 요원으로 성장하려면 보통 5년 이상 걸린다. 공만 빠르고 제구는 형편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구 좋은 유망주는 몸만 불리면 속구 구속도 어느 정도 증가하므로 2~3년 안에 1군에서 당장 써먹을 수 있다”며 “긴 안목에서 유망주가 성장하길 기다리는 미국·일본과 달리 빠른 시간 안에 승부를 보려는 한국에서는 즉시 전략감인 제구 좋은 유망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