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 행사 때마다 부적절한 일정으로 눈총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5.12.08 17:24
  • 호수 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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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 재고량 급감으로 전국 혈액원 비상인데도 YS 영결식 날 워크숍 한다며 남부혈액원 문 닫아
전국 혈액원의 혈액 수급에 비상이 걸렸는데도 서울 남부혈액원은 11월26일 워크숍을 이유로 산하 헌혈의 집과 헌혈버스의 문을 닫아 논란이 되고 있다. © 연합뉴스

올해 6월 한반도를 강타한 메르스 여파로 단체 헌혈이 급감했다. 국내 혈액 수급의 90% 이상을 담당하는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 산하 혈액원에도 비상이 걸렸다. 10월15일에는 전국 혈액원의 재고 물량이 2.2일분까지 떨어졌다. 적십자의 4단계 위기관리 가운데 2단계인 ‘주의(Yellow)’에해당했다. 0.2일분만 더 감소하면 3단계인 ‘경계(Orange)’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A형과 O형 혈액은 이미 재고가 1.3일분으로 최악의 단계인 ‘심각(Red)’ 수준 직전까지 떨어져 있었다.

적십자 측 “혈액 수급 문제 사전에 조정했다”

11월 들어 혈액 수급 상황이 소폭 개선됐다. 하지만 적정 혈액 보유량인 5일 치에는 크게 모자랐다. 서울 서초와 강남, 송파 등 남부 지역 6개 구의 혈액 수급을 책임지고 있는 남부혈액원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11월26일 기준으로 재고량은 2.1일을 기록했다. ‘경계’ 단계를 코앞에 둔 ‘주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혈액원 산하 12개 헌혈의 집(국고 지원 6곳)과 헌혈버스 6대가 이날 문을 닫았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 영결식이 열리던 때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거목을 애도하는 목소리가 전국에서 메아리쳤다. 이날 남부혈액원 직원 140여 명은 헌혈 받는 것을 중단하고 서울 중구의 모처에서 워크숍을 가졌다. 교육과 단합대회를 겸한 자리였지만, 일부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폭탄주까지 돌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적십자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정부는 원활한 혈액 수급을 위해 5일분의 혈액 재고를 유지하도록 권고하고 있다”며 “혈액 재고가 부족한 상황에서 헌혈의 집과 헌혈버스 운영을 중단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적십자의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 남부혈액원 산하 헌혈의 집이 한꺼번에 문을 닫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병원으로 치면 응급실의 문을 닫고 놀러 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까지 말했다.

적십자 측은 10월부터 행사를 준비해온데다, 이미 여러 차례 연기한 상태여서 어쩔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적십자 혈액관리본부의 한 관계자는 “직원들의 직종이나 근무지가 다르다 보니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다”며 “상반기부터 준비했지만 세 차례나 연기됐고, 혈액 수급 문제 등을 모두 체크한 결과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행사를 가졌다”고 말했다. 적십자의 또 다른 관계자는 “워크숍에 참석한 143명의 직원 중에서 100명이 여성이었다”며 “좌석마다 소주와 맥주가 놓여 있었지만 상당수는 음료수만 마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 중구에 있는 대한적십자사 본사. © 시사저널 최준필

하지만 적십자 내부의 목소리는 달랐다. 적십자 내부에서는 이번 워크숍을 사실상 ‘야유회’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행사는 오전 9시부터 진행됐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워크숍 일정표에 따르면, 교육은 9시30분부터 10시30분까지 한 시간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남산 걷기와 중식, 단체 영화관람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나마 1시간의 교육 시간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고, 이후 2시간 동안 남산타워와 한옥마을을 둘러본 후 충무로의 D 식당에 집결했다. 이곳에서 일부 직원이 폭탄주 잔치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적십자의 한 관계자는 “교육을 받는 와중에 계속 빨리 끝내라는 안내가 나왔다”며 “1시간 안에 친절 교육과 의료폐기물 배출 및 처리 교육, 공익신고자 보호 교육을 모두 한다는 계획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시사저널은 지난 8월에도 적십자 혈액관리본부 직원들이 8월21일 단체로 야유회를 다녀온 사실을 단독 보도했다. 당시는 북한의 선제 포격 도발로 남북 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였다. 정부와 군은 북한의 추가 도발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적십자도 당시 경기지사를 통해 긴급 대피령이 내려진 파주시와 연천군 주민들에게 긴급 구호품을 전달했다. 하지만 혈액관리본부 직원 70여 명은 본부장 지휘하에 관광버스에 나눠 타고 강원도 영월로 야유회를 떠났다. <시사저널 1349호(8월27일자) ‘적십자사, 북한 도발 속 단체 야유회’ 기사 참조>

당시 혈액관리본부에는 야유회를 취소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메르스 사태 등으로 이미 한 번 취소됐다는 이유로 야유회를 강행했다. 적십자는 이후 야유회의 시기나 부적절성을 들어 혈액관리본부에 기관경고 징계를 내렸다. 이번에 남부혈액원의 야유회성 워크숍도 마찬가지다. 공공기관뿐 아니라 민간 기업들도 YS의 서거를 애도하며 국가장 기간 동안 조기를 게양했다. 적십자 역시 충무로사옥에 조기를 걸었고, 워크숍 전날에는김성주 총재가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을 찾아 조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혈액원이 워크숍을 강행했을 뿐 아니라, 일부 직원은 폭탄주까지 돌렸다는 점에서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복지부, 적십자 상대 고강도 특별감사 중

보건복지부는 지난 10월 말부터 적십자를 상대로 특별감사를 실시하고 있다. 전북혈액원이 조직적으로 혈액 분실을 은폐했다는 의혹이 국정감사에서 제기됐기 때문이다. 김성주 총재는 재발 방지와 함께 인적쇄신을 약속했다. 복지부는 국감에서 지적된 전북혈액원뿐 아니라 울산혈액원과 강원혈액원, 경기혈액원, 인천혈액원 등을 상대로 특별감사를 벌이고 있다. 10월 말부터 한 달간 감사과와 생명윤리정책과, 질병관리본부 직원 8명이 전수조사에 나섰다. 11월 말 특별조사 기간을 한 차례 연기한 터여서 더더욱 지금 시기가 예민할 수밖에 없다.

적십자 측 역시 시기가 부적절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법적으로 문제는 없다”고 밝혔다. 현행 국고 지원 헌혈의 집의 운영 규칙상 365일 중 350일을 채우면 된다. 일선 간호사의 피로 누적 방지와 교육을 위해 운영 시간도 탄력적으로 운용하도록 한 만큼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관할 부처인 보건복지부 관계자도 “혈액 공급 사정에 따라 국고 지원 헌혈의 집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도록 한 만큼 문제 될 것이 없을 것 같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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