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마지막 날, 소격동의 예술영화관이 문을 닫았다
  • 이은선│<매거진 M>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5.12.09 23:45
  • 호수 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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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委의 새 예술영화전용관 지원 사업에 예술영화전용관과 영화인들이 반발하는 이유
예술영화전용관으로 관객들을 이끌었던 서울 소격동의 ‘씨네코드 선재’가 11월30일 문을 닫았다.

11월30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예술영화전용관 ‘씨네코드 선재’가 문을 닫았다. 2008년 9월 문을 연 이 극장의 전신(前身)은 국내 최초 예술영화전용관인 동숭시네마테크다. 씨네코드 선재 측은 10월 마지막 주 보도자료에서 “건물주인 아트선재센터 측과 건물 전체 리모델링과 관련한 여러 논의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임대차 계약이 종료됐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동안 씨네코드 선재를 운영해온 영화사 진진은 월세와 운영비 탓에 누적 적자가 수억 원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진진은 이후 영화 수입·배급에만 주력할 예정이다.

관객이 선택할 수 있는 영화의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예술영화의 저변 확대에 힘쓰는 전용관을 지키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필요성과는 다르게 입지는 점점 좁아들고 있다. 예술영화전용관 폐관은 2000년대 초반 대형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리면서 가속화됐다. 종로 씨네코아, 대학로 하이퍼텍나다 같은 극장들은 이미 문을 닫았다. 씨네큐브, 아트나인, 아트하우스 모모같은 예술영화전용관이 버티고 있는 서울은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지방의 경우는 매우 심각하다. 지난해 10월에 거제 아트시네마가 문을 닫았고, 올해 2월에는 대구 예술영화관인 동성아트홀이 폐관했다가 지역 주민이 인수하면서 4월에 기사회생했다. 안동 중앙시네마, 대전 아트시네마, 부산 아트씨어터 C+C 등 예술영화전용관들은 현재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그나마 이들의 운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예술영화전용관 지원 사업이었다. 영진위는 2002년부터 이 사업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극장에 운영 지원금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업 시행이 신통치 않다. 2009년 지원 대상이었던 극장은 27개였는데, 지난해 18개로 대폭 줄어들었다. 기존 지원 극장들의 수익성 악화, 지원금 의존도를 근거로 댔다. 앞서 언급한 동성아트홀은 지난해 9월 지원 대상에서 갑작스레 제외된 후 폐관 수순을 밟아야 했다. 이 극장은 2004년부터 한 해 평균 약 6000만원을 지원받았다. 공공성을 인정받은 예술영화관인데 급작스럽게 시장논리를 내세우는 영진위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가운데 영진위는 올해 예술영화전용관 운영 지원 사업 내용을 새로 발표하며 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앞으로는 영진위와 위탁 기구인 한국영화배급협회가 선정한 한국 독립영화 48편 가운데 24편을 골라 관객이 많은 평일 저녁과 주말에 상영하는 극장에만 지원금을 주겠다는 것이 골자다. 극장 자체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특정 영화 배급을 지원하겠다는 얘기와 다름없었다. 영진위는 한국 독립영화의 상영 기회를 더 늘리기 위한 정책이라는 입장이다. 예술영화전용관마다 이른바 ‘프라임 타임’에 흥행 가능성이 큰 외국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한다는 게 이유였다.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1년 중 73일간 한국의 다양성 영화를 상영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영진위에 의하면, 한국 영화들은 오전이나 평일 낮 등 관객이 보기 힘든 시간 위주로 상영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Closed’, 폐관을 알리는 ‘씨네코드 선재’의 입구. ⓒ 시사저널 임준선

예술영화전용관 측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전국예술영화전용관모임(이하 전용관모임)은 10월8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영진위를 대상으로 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 사업을 중단하라는 공식 성명을 냈다. 영진위의 일방적 사업 추진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극장 측의 우려는 이 같은 지원제도가 극장의 상영 자율권을 침해한다는 점과 맞닿아 있다. 영진위와 위탁 기구는 분기별로 상영 지원작을 선정하는데, 이를 반영해 배급 일정을 짜면 결과적으로 각 극장의 색깔을 살린 자유로운 프로그램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영진위의 계획에 맞추다 보면 각 예술영화전용관이 프라임 시간대에 전부 같은 영화를 틀게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결국 <다이빙벨>(2014년)과 같은 반(反)정부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 어린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판이다. 또 전용관모임은 상영회차를 늘리는 것이 한국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독립영화가 해외 예술영화에 비해 관객 수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공급을 늘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지원작 선정 과정이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지원작을 선정할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점으로 떠오른다. 위탁 기구 선정 자체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영진위는 지난 7월 위탁업체 공모를 실시했는데 참가한 단체는 ‘한국영화배급협회’ 단 한 곳이었다. 재공모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두고 전용관들은 사업 자체에 반대했기 때문에 아무도 공모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술영화 유통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영화배급협회가 협회 내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위원회를 꾸릴 것이라는 대목도 반발을 샀다. 선정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이 협회의 전신은 한국영상산업협회로, 주로 부가판권 매체의 저작권을 관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영화 감독 120명, 영진위 사업 보이콧

영진위는 2013년 예술영화전용관측에 사업 내용을 제안했고 2014년에 연구를 시행한 후 여러 차례 회의와 간담회를 열었기 때문에 정책 자체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간담회에 참가했던 극장 측의 입장은 다르다. 간담회가 아닌 일방적 정책 설명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간담회에 참가했던 영화인들은 “멀티플렉스 관객에게 예술영화전용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해 만든 보고서 자체에 문제가 있어 수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원 사업에 대한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을뿐더러, 업계 관계자들의 의견은 수렴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책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아트나인, 아트하우스 모모 등 서울의 대표적 예술영화전용관은 이 사업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밝힌 상태다. <두 개의 문>(2012년)의 김일란 감독, <거인>(2014년)의 김태용 감독,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년)의 진모영 감독 등 독립영화 감독 120명 역시 이 사업에 대해 보이콧을 선언한 상태다. 영진위는 그 이름처럼 영화를 진흥시키기 위한 기관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정책은 예술영화관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게 영화인들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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