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망명 권한 전두환에게 “날 토막 내서 내보내라”
  • 이호 | 프리랜서 기자ㆍ다큐 작가 (.)
  • 승인 2015.12.17 18:28
  • 호수 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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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가 밝힌 김대중·전두환·이명박 前 대통령과의 비화… YS 생전 인터뷰 <下>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직설 화법은 마치 금방 물에서 튀어나온 생선처럼 싱싱했다. 2009년 8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국장(國葬) 이후 언론 접촉을 일절 하지 않고 있다는 YS였지만, 필자를 보고서는 “뭐가 또 필요해서 왔노. 추석도 얼마 안 남았는데 좋은 얘기를 많이 하고 편하게 얘기하는 기 좋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도 DJ의 국장이 생각났는지 지난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있었던 에피소드로 웃음을 만들었다. 

“그때 내가 1차에서 이겼지만 과반에 못 미쳐 결선으로 들어가지 않았어? 그래서 결국은 소석(素石; 이철승 전 의원, 당시 1차 경선에서 3위로 탈락)이 DJ한테로 돌아서서 내가 마흔 몇 표 역전패를 했는데, 그 당시에 후보 경선에 소석도 뛰어들고 물론 DJ도 나섰지만 ‘40대 기수론’으로 누가 봐도 내가 박정희 후보를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게 지배적이었단 말이지. 그렇지만 막상 뚜껑을 여니까 과반을 넘는 사람이 없어. 그래가지고 2차 투표를 하는데 그때 소석하고 DJ한테서 나온 말이 뭔지 알아? “우리가 남이여 시방?” 이 말이었다고. 그 말 한마디로 소석 지지자들이 전부 DJ한테 표를 몰아줘서 내가 졌는데, 나중(대선)에 부산에서 유세할 때 (내가) ‘우리가 남이냐’ 그랬거든. 그랬더니 나한테 지역감정을 조장한다고 언론에 나와서 얼마나 시끄럽게 떠드는지. 지(DJ)가 먼저 써놓고 말이지. 하하하. 내 참….”

 

1998년 2월25일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가운데)이 행사장을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

당시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하고 각하께서는 흔쾌히 승복하셨습니까?

“했지. 그런데 그 얘기 다 하면 안 되는데… (DJ와) 화해한다 해놓고, 하하하. 내가 깨끗이 승복하면서 ‘김대중의 승리는 나의 승리다! 김대중의 당선은 나의 당선이다!’고 외쳤어요. 동지들이 이 순간부터 영호남도 없고 충청도도 강원도도 경기도도 없고, 오직 김대중 후보 하나만 있다고 말이지. 내가 그렇게 외치니까 조윤형(전 의원)이하고 최형우(전 의원)가 와가지고 ‘배알’도 없느냐고 막 울먹이면서 그랬어. 지원하지 말라고 말이야. 나를 지지했던 우리 대의원들 모아놓고 그 심정들을 달래느라고 경선 두 번 치르는 거보다 더 고생했어. ‘여기서 우리가 분열하면 절대 군정 종식을 할 수 없다. 군정을 종식시키고 어떡하든 민주화를 이뤄야 되지 않겠느냐. 나를 믿고 DJ를 도와라’ 그랬다고. 그러고 나서 나는 그때 속으로, DJ가 나한테 선대위원장을 맡으라고 할 줄 알았어. 근데 나를 철저히 배격하고 정일형 박사를 시키대? 그러면서 자기는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서울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연설을 하고, 나는 안양 면소재지에 가서 하라고 그래. 나하고는 참 다르대. 1987년 대선 때 (내가 DJ에게) 경선을 해서라도 후보 단일화 하자고 그만큼 그랬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말이지….”

“직선제 다그치자 배고프다며 닭백숙 내와”

YS는 굵은 정치적 사건은 후대들이 알아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굳이 DJ를 폄하할 의도로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YS는 3년 가까이 가택연금을 당했을 때 해외로 망명을 할 수도 있지 않았느냐고 묻자 잠시 침묵했다.

“전두환 정권이 나를 가장 잔인하게 대할 때가 1983년 가택연금 당할 땐데. 내가 단식을 하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격한 호통을 치시면서 전두환 정권을 질타하고 막 그러니까 나를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놓지 않았어요? 그럴 때야. 그때 5공의 실세였던 권익현(전 의원)씨가 세 번인가 찾아와서 나한테 해외로, 영국으로 망명을 하면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했어요. 그때 DJ는 미국으로 망명을 가 있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 나를 내보내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권익현씨가 귀를 쫑긋 세우면서 뭐냐고,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그래. 그러기에 내가, 나를 토막 내서 보내라, 그러지 않으면 안 나간다. 그랬더니 권익현씨가 완전히 굳은 얼굴로 돌아갔지요. 그 후로 나한테 망명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나는 국내에서 투쟁했지 해외 나가서 떠들지 않아. 대한민국 정치인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데 해외하고 민주화 투쟁하나? DJ는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지만 호텔에서 지냈고, 나는 집에서 연금된 상태로 투쟁했고.”

 

1987년 6월24일 전두환 대통령이 시국 수습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 김영삼 민주당 총재를 악수로 맞이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87년도에 대통령 직선제 관철 때문에 전두환 대통령과 담판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게 6·29 선언 직전인데, 그러니까 6월24일인가 그랬는데. 좌우간 전두환씨한테 8개 항을 요구하면서 담판을 했지. 직선제를 해라, 언론 자유를 보장해라, 정치 규제를 풀어라, DJ 정치활동 보장해주라, 그런 등등 8개 항을 가지고 만났는데, (내가) 막 다그치니까 노태우(민정당 대표)를 만나서 얘기하라는 거야. 무슨 소리냐고, 결자해지다, 당신이 대통령이고 당신이 풀어야지 왜 노태우한테 미루느냐고. 작심하고 만났으니까 이 자리에서 결정하라고 아주 강하게 했어. 그랬더니 점심 약속이 있다면서 자꾸 피해요. 그래서 ‘당신은 대통령이고 나는 야당을 대표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느냐. 결판을 내려고 왔다’ 그러니까 닭백숙을 내오면서 배고프니까 먹고 하자 그라네, 내 참…. 결국 그날은 확답을 해주지 않아서 결렬됐다고 선언하겠다, 책임져라, 그래버리고 나와서 기자들 앞에 결렬을 발표했는데, 전두환이도 속으로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그랬을 거야. 그러고 닷새 훈가? 6·29 선언이 나오지 않았어? 참 격동의 시대였어. 생각해보면 말이지….”

“청와대에서 맨날 국수만 먹어 변비로 고생”

IMF 사태에 대해서는 평소 YS의 주장을 감안하면, DJ에 대한 서운함과 국민에 대한 송구함으로 강한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일각에서는 국내 금융권의 근본적인 문제들과 대기업들의 방만한 경영이 겹친 탓이 컸다는 지적이 있음에도 오롯이 YS 정권에 모든 책임이 있는 양 몰아갔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에서 질문을 하자 YS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대답을 자기(필자)가 다 하면서 뭐하러 묻노? 하하. 사실은 DJ가 대통령 되고 2000년 6월인가, 전직 대통령들 초대한 자리인데 나한테 화해하자고 그랬어. 그래서 당신(DJ)이 먼저 내한테 사과해라 그랬더니, 안 해. 국민들한테는 종국적으로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내가 IMF 오기 전에 DJ한테 얼마나 협조를 당부했나. 경제가 이래서는 안 되겠고, 무리가 가더라도 노동법을 개정해야 된다고 수차 설득을 했단 말이지. 그런데도 반대야. 요상한 논리를 내세우며 반대해. 그래서 날치기를 해서라도 통과시켰지. 그뿐이가. 한국은행법과 기아자동차 사태가 심각해서 우째 하든 정리를 해야겠다 했는데 그것도 반대야. 기아자동차가 호남 기업이 아닌데도 호남 기업이라면서 왜 호남 기업만 죽이려고 하느냐고, 지역 정서를 자극시켜가면서 반대하는 거야. 회장이 호남 사람이면 호남 기업이야? 그런 논리가 어디 있어. 호남 기업을 경상도 기업한테 넘겨주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면서 반대야. 우리 경제 체질을 바꾸고 어떡하든 국가 신인도 문제를 해결해서 경제를 살리려고 그라는데, 그런 모든 노력을 DJ가 앞장서서 반대한 거야. 결국 자기가 대통령 되니까 내가 통과시켰던 노동법보다 더 나쁜 법을 만들고, 은행법도 거의 내가 만들어놓은 고대로 통과시키면서 말이지. 기아차를 호남 기업이라 해놓고 엉뚱한 현대자동차에 넘겼으면, 정몽구가 강원도니까 이제는 강원도 기업인가?”

 

2010년 4월23일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 오찬에 참석하기 위해 본관에 도착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영접하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대통령 재임 시절 ‘동교동계’(DJ 계보)와는 어땠습니까?

“내가 대통령 재임 때는 DJ에 대해서 어려운 시절 같이 고생했다고 말 한마디를 해도 순수하게 해줬어. (1992년) 대선 끝나고 (DJ가) 런던으로 갔을 때, 권노갑이가 매일 아침 DJ한테 전화를 했어도 동교동 그 주변 사람들 아무도 손대지 말라고 했어. 일체 조사 같은 거도 안 하고 터치를 안 했어. 못해서가 아니야. 그런데 자기(DJ)가 대통령 되고서는 나를 1년 반 넘게 뒷조사를 했어. 우째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기가. 나는 동지들이 어려운 시절에 살아남았고 고생하면서 당과 조직을 꾸려나왔던 시절을 생각해서 부탁이 들어오면 우째 하든 챙겨주려고 애썼는데…. 그러고 지는 맨날 고급요리나 먹고 그랬지? 나는 청와대에서 맨날 국수만 먹고, 그래서 내가 변비로 고생했다 아이가.”

그런 마음을 상도동계나 동교동계 출신들이 얼마나 알까요?

“알긴 뭘 알아. 험한 꼴을 다 당하고…. 은혜를 받은 놈일수록 은혜를 몰라. 평생을 야당 하면서 우리 집에 와서 멸치 한 통이라도 안 받아간 사람 어디 있노. 그래 나눠 묵고, 그기 좋아서 웃고 하던 사람들은 아직도 존경심이 남아 있고 씨래기국 먹은 추억을 이야기하는데, 옛날 다 잊어묵고 이놈의 여의도 간 것들은 의원 배지만 달면 추억도 없는지 피 튀는 쌈질이나 하고 헐뜯고 말이지. 멋이 없어! 그러니 국민들한테도 사랑을 못 받는 거야. 국민들이 국회의원을 뽑는데 존경한다, 이런 게 전혀 없어. 전에 국회의원들은 애국심이 있었다고요. 나라를 어떻게 하면 잘되게 할 수 있는가. 내가 3대 때부터 국회의원을 해봤지만 요새같이 애국심이라는 말이 없어져삐린 건 처음 봤어. 그런 말을 사용하는 정치인도 없어요. 심각한 이야기라니까.”

DJ에 대해 가장 섭섭했던 일은 뭡니까?

“과거엔 있었지만 이젠 없어. (침묵 후) (1987년 대선) 후보단일화….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들한테도 미안하고. 그 사람 생각하면 잊어버리지 못하는 말이 있는데, ‘우째 그리 거짓말을 자꾸 하노’ 그랬더니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약속을 못 지킨 것뿐이지’ 그랬어, 하하하.”

MB(이명박 전 대통령)가 대통령 되고 나서 2008년 총선 때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공천에 대해서 왜 그렇게 진노를 하셨습니까? 그 당의 대통령을 지낸 분 아닙니까.

“나는요, 한나라당이 사실상 내가 만든 당이거든요. 자기들이 이름을 두어 번 바꾼 것뿐이지. 이회창(전 총리)이가 이름을 바꾸면 딴 당이 되는 것처럼 그랬는데, 말도 아닌 소리지만. 원래 민주자유당이었거든요. 근데 한나라당이 이번(2008년 총선)에 보니까 ‘민주계’(YS계) 사람들을 공천에서 완전히 빼삐린 겁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덕룡(전 의원)하고 박종웅(전 의원)하고 김무성(새누리당 대표), 이 세 명을 공천을 안 준 겁니다. 그래도 이름 있는 민주계라고 하면 그 세 사람인데 말이야. 내 비서 한 사람들 중에 박진(전 의원)이라든가 정병국(의원)이라든가 이성헌(전 의원)이라든가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그 사람들을 꼭 민주계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거든요. 민정계 부스러기들을 공천 주고. 천신일(세중 회장)인가 뭔가 하는 게 1945년생 이하는 다 짜르자 그랬다는 말도 있던데, 김덕룡이가 1942년생인가, 43년생인가 그렇지? 그런 핑계를 다 대고 말이야. 그러면 이상득(전 의원)이는 1945년생 이하야?(이 전 의원은 1935년생) 내 참. 그래서 한나라당이 무주공산이 된 겁니다.”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화가 난 겁니다. 니(MB)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근데 둘(김덕룡·박종웅)이는 공천 떨어졌다고 입후보를 안 해버렸지만, 김무성이는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압도적으로 당선되지 않았어요? 그때 내가 선거구 가서 한나라당 버르장머리 고쳐야 된다고 그랬잖아요? 한국의 모든 신문에 났고 부산은 완전히 무소속 바람이 불어삐린 겁니다. 그래서 (2008년 총선 때) 무소속이 그렇게 많이 된 겁니다.”

MB가 공천에 직접 개입했는지 모르지만, 당시 각하의 기분을 MB한테 솔직히 말씀하실 수는 없었던 겁니까?

“했지요. 그 얘기를 했지요. 직접은 내가 불쾌해서 안 하고, MB가 또 미국 떠난다고 하는데 막 퍼부어대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고 해서 비서실장을 불러서 얘기했어요. 류우익이. 도대체 상상 밖의 짓을 하고 있다고 말이야. 내가 굉장히 노한 이야기를 했어요. 심하게. 그대로 다 전달이 됐어요. 그래서 비서실장하고 정무수석하고 와서 죄송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 했고, 얼마 안 돼서 MB가 전화를 걸어와서 비서실장한테 보고 다 받았다 그라기 때문에 더는 얘기 안 했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참 있을 수 없는 짓들을 한 겁니다.”

2007년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 대신 MB를 미셨잖아요.

“솔직히 이명박이를 밀 때, (내가) 민주계 다 모아놓고 그랬어. 흠이 많은 사람이지만 성인군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 성인군자로 생각해서 미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선택을 할라믄 이명박이를 하든지 박근혜를 하든지 둘 중에 하난데, 박근혜는 내가 밀기가 뭐하니까 이명박이를 민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그랬어요. 그러고 (대선 전까지) 1년 4개월 동안 밀었잖아요. 사력을 다했잖아요. 실제 내가 안 밀었다면 안 됐지요. 민주계가 그리 안 갔지. 박근혜 쪽으로 많이 갔겠지. 그런데도 민주계를 학살하고 말이지. 나는 최소한 민주계에 20석, 전국구(비례대표)는 두세 석, 그렇게 배려를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만든 당이고 민주계 때문에 당선된 것이고. 참 분했어요.”

지금은 소화가 좀 되셨습니까?(웃음)

“그걸로 밤낮 생각하면 분해서 병나지요.”

당시 JP(김종필 전 총리)하고도 만나셨잖습니까? MB 밀자고 약속을 하신 겁니까?

“JP 그 사람은 경선 끝나기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입당을 했지요. 나는 입당 여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그랬는데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도중에 만나서 이야기를 했지요. 이명박이를 놓고.”

그분도 굉장히 화가 나셨다고 그러대요. ‘자민련계’(JP 계보)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 심정 이해가 가. JP가 충청도 팀들하고 남강에서 망년회 때 모였대. 일식집 골방이 선거 때 모의했던 집이라 추억이 있었던 모양이야. JP가 그날 얼마나 화가 났는지, 이명박이도 그렇고 이상득이도 그렇고 둘 다 전화 한 번 없다고 말이야. 수양산 버들이 강동 800리를 적신다고, 충청도 고급 공무원치고 JP 덕 안 본 사람이 어디 있어. 그 표가 다 MB한테 간 거야. 그만큼 큰 고목이 있어야 덕을 보는 거야. 근데 JP 주위에 비서까지도 하나 안 봐주고, 나중에 모시겠다는 전화도 한 통 없고 하니까 그날 충청도 사람들하고 술 마시고 다음 날 골프 나가다가 쓰러졌다는 거 아니야. 많이 분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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