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는 ‘트럼프’가 부리고 열매는 ‘크루즈’가 따나?
  • 김원식│국제문제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12.24 19:01
  • 호수 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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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 지지율 22%로 27%인 트럼프 추격하며 상승세

 

“트럼프는 단지 언론이 자신을 얼마나 많이 보도했는지를 보여주기 원한다. 하지만 크루즈는 권력을 축적하고 이를 행사하기를 원한다. 트럼프는 선전(publicity) 자체가 목적이지만, 크루즈는 (권력을 향한) 수단이 그의 목적이다.”

지난 12월16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인 루스 마르커스가 ‘테드 크루즈가 도널드 트럼프보다 더 위험하다’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언급한 말이다. 한마디로 막말의 대명사로 알려진 트럼프가 막가파식의 극보수를 대변하는 것 같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이빨은 테드 크루즈 텍사스주 상원의원(45)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대선 레이스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트럼프의 급부상에 가장 많은 혜택을 입고 있는 후보가 크루즈라는 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다. 트럼프에게 모든 언론의 시선이 쏠리면서 여타 후보들은 완전히 존재감마저 상실했고, 어쩌면 마르커스 칼럼니스트의 주장대로 트럼프보다 더 극단적이고 위험할 수 있는 크루즈가 자신을 대신해 아바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트럼프 덕분에 다른 경쟁자들을 누르고 트럼프를 맹추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사실 막말의 대가 트럼프가 이렇게 급부상하며 대세론을 이어갈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2015년 초만 하더라도 이제 상원의원 초선인 크루즈가 과거의 화려한 막가파식 돌출 행동처럼 이번 대선판의 이단아(異端兒)가 될 것이라고 정치 분석가들은 예상했다. 2013년 무려 21시간에 걸친 의사진행 발언으로 ‘오바마케어’(건강보험개혁법)를 반대하면서 크루즈는 이단아와 막가파의 대명사가 된 인물이다. 대선 출마 선언 초기 3%도 안 되는 미미한 지지율로 출발한 크루즈가 이번 대선판에서도 이 같은 막가파식 전략으로 그의 인지도와 지지도를 올릴 것이라고 다들 예상했다.

도널드 트럼프(왼쪽)가 12월15일 CNN 공화당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테드 크루즈를 바라보고 있다. ⓒ AP 연합

“트럼프보다 더 무서운 이빨은 크루즈”

그런데 그 예상은 트럼프의 등장으로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정통 강경 보수주의자를 자임하는 크루즈가 하고 싶은 말을 트럼프가 막말로 다 해줬기 때문이다. 이런 트럼프의 급부상은 당연히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될 것으로 예상됐던 부시가(家) 혈통인 젭 부시 예비후보의 존재마저도 상실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최근에는 “모든 이슬람인들의 미국 입국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막말에도 그의 지지도는 더 상승하고 있다. 공화당 적통(嫡統)이 아닌 것은 고사하고라도 막말의 대명사 트럼프를 향해 더욱 광신적일 정도로 보수층이 지지를 보내면서 공화당 지도부는 이제 거의 넋을 잃은 상태다. 제어가 되지 않는 막말의 달인 트럼프를 과연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내보낼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공화당 지도부는 자신들의 존재감이 없어질 정도다. 본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이길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더 앞길이 막막한 현실이다. 한때 신경외과 의사 출신인 벤 카슨이 트럼프를 바짝 뒤쫓으며 돌풍을 일으켰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크루즈 상원의원이 트럼프를 제어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공화당 인물처럼 떠오르고 있다.

아직 막말의 돌풍을 이어가고 있는 트럼프가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크루즈의 추격세가 만만치 않다. 지난 12월14일 월스트리트저널과 NBC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무슬림 입국 금지”라는 막말에도 공화당 유권자의 27%는 트럼프를 대권 후보로 지지했다. 이는 지난 10월 말에 나온 조사 결과보다 4%포인트 오른 것이다. 하지만 크루즈의 지지율은 22%로 나타나 지난 조사 때의 지지율 10%보다 배 이상 상승했다. 1위를 차지한 트럼프와의 지지율 격차도 13%포인트에서 5%포인트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이제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레이스는 크루즈가 트럼프를 맹렬히 추격하는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쿠바계 복음주의 기독교 목사의 아들

크루즈는 쿠바계 목사 이민자 집안의 아들로 미국 보수의 본산이라고 일컬어지는 텍사스 주에서 최초로 라틴계 법무차관에 오른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1970년생으로, 캐나다에서 쿠바 출신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텍사스 휴스턴에서 자랐다. 특히,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온 복음주의 기독교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크루즈는 일찌감치 정통 보수의 기풍을 이어받았다. 그는 명문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는 라틴계 이민자들이 ‘배신자’라고 부를 만큼 그가 이민정책을 포함한 모든 정책에서 초강경 보수 노선을 고수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은 공화당 내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물론 극우단체인 ‘티파티’ 등이 그의 강력한 지지 세력으로 나서게 된 이유가 되고 있다.  대선 전문가들은 낙태와 동성애 반대는 물론 국세청(IRS) 폐지를 비롯해 초강경으로 치닫는 크루즈의 기존 주장은 오히려 트럼프의 막말에 막혀 빛을 발하지 못할 뿐, 크루즈가 더 위험한 초강경주의자라는 평가를 연이어 내놓고 있다.

하지만 크루즈는 자신이야말로 정통 보수파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자신의 성장기였던 1980년대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을 재건하겠다는 것이다. 크루즈는 최근 크리스천포스트에 직접 기고한 글을 통해 “나의 아버지가 1980년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대선 후보의 선거운동을 했는데, 그 당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위기에 직면했었다”고 진단했다. 크루즈는 “레이건의 압도적인 승리 이후 미국은 애국심이 부활하고, 소련이라는 악마와 같은 제국이 쇠퇴하고 무너졌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가장 오랫동안 경제성장이 지속됐다”며 그의 대통령 출마가 레이건 시절을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그의 이러한 대선 전략은 ‘오바마 저격수’라는 초강경 이미지에서 이제는 가장 보수적인 후보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ABC방송의 지난 11월 여론조사에서 크루즈 의원이 자신을 ‘매우 보수적’이라고 밝힌 유권자 가운데 69%의 지지를 받아 트럼프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사실 트럼프가 워낙 초강경의 막말을 이어가다 보니, 강경 보수의 원조를 자처하는 크루즈는 오히려 품위와 모양새를 갖추는 전략에 치중하고 있다. 그가 특히 트럼프와 불필요한 논쟁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크루즈 입장에서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트럼프가 초강경 막말을 동원해가며 다 뚫어주고 있는데 그걸 굳이 막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재주는 트럼프가 다 부리고 권력이라는 과실은 때가 되면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리라는 계산이 크루즈 측의 치밀한 대선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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