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저 살아남는 것뿐”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12.24 19:10
  • 호수 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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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뛴다는 말> 펴낸 정의석 의사

“레지던트 2년 차 때인가. 중환자 담당 스케줄이 시작되기 직전에 몇 가지 결심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기록을 남기자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리고 그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 객관화해서 돌아보고 생각할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고 싶어서였다. 그 전부터 일기는 써왔지만 매일 쓰지는 않았는데, 중환자실에 갈 때면 매일 써야겠다고 의도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그때 폴더 명을 ‘난중일기’라고 써놓았다.”

정의석 상계백병원 흉부외과 전문의가 다년간 중환자실에서 경험한 일들을 정리해 <심장이 뛴다는 말>을 펴냈다. 의사가 책을 냈으니 소문난 명의(名醫)겠거니 생각했는데, 그의 프로필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려냈다는 등의 ‘자랑’은 없고, 일상에 대한 짤막한 설명만 있다. 정씨는 잠을 자지 않는 시간에는 일을 하고,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쓰거나 읽거나 그리며 음악을 듣는다. 수술을 하면 당직을 서고, 수술이 없으면 집에 간다. 물론 응급실에서 연락이 오면 긴급 출동을 한다. 집에는 소설가인 아내와 두 딸, 물고기 다섯 마리가 함께 살고 있다.

드라마도 영화도 아닌, 병원의 진짜 풍경 드러내

일반인들은 들어서 안다. 흉부외과를 지원하는 의사가 드물다는 사실을. 이를 두고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세태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나마 지금 당장 심장이 멈추거나 멈출 것 같은 환자를 지키는 일선에 그래도 의사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다. 정씨는 그중 한 사람으로 현장의 기록을 남기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기도 했다.

“어제부터 좋지 않던 환자가 밤새 잘 이겨내더니 갑자기 숨을 1분에 60번 쉬며 힘들어했다. 기도삽관을 하고 인공호흡기에 연결했다. 방에 들어와 나도 1분간 60번 숨을 쉬어봤다. 많이 힘들었다. 힘들어서 자꾸 부끄러웠다.”

병원은 언제나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긴박하고 애달프고 냉혹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다. 대동맥이 터진 채 한밤중에 응급실로 실려 오는 환자, 숨소리를 크게 내는 것조차 허락지 않는 수술장의 긴장과 고요, 혼수상태로 인공호흡기를 낀 환자의 의식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기도하는 보호자들, 긴 시간의 투병으로 쇠약해진 환자들이 신음하는 병동, 그 모든 고통과 절망의 틈새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의료진.

“임계점을 넘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다. 더 냉정해야 했을까? 한 번도 자신의 아이를 안아보지 못한 채 쓰러진 젊은 엄마와 조금만 더 살려달라고 우는, 아직은 아버지가 될 준비를 못한 그녀의 남편을 보고, 태어난 지 사흘 된 아이를 보고, 누가 어떻게 냉정해질 수 있을까?”

누구나 언젠가 병원에 가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적나라한 인간의 풍경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 병원이 일이고 삶인 한 흉부외과 의사의 안내에 따라 병원의 내부를 구석구석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정씨의 기록을 보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병원의 일들이 낯설게 다가온다. 메디컬 드라마로 보던 풍경 뒤에 숨겨진 민낯의 병원 구석구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의사는 살 수 있는 길로 안내하는 가이드일 뿐”

정의석씨는 매일 수술장과 중환자실, 응급실을 뛰어다니는 사이에, 잠들면 안 되는 밤이나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기록 속 병원은 극한의 상황, 극단적인 상황, 극적인 상황이 매일매일 무한 반복되는 곳이다. 엄청난 피와 땀, 비명과 눈물이 페이지 갈피마다 새겨져 있다. 돈 때문에, 가난 때문에 삶을 포기하려는 환자가 있고, 무지와 고집으로 죽음에 이르고 마는 환자도 있다. 가망 없는 환자를 붙들고 놓지 못하는 가족이 나오고, 가망 없는 환자를 죽게 했다고 발길질을 날리는 보호자가 나온다. 그리고 능력에 대한 불안과 무거운 책임감 사이에서 번민하는 의사가 언제나 그들 속에 있다. 기적이나 감동은 드물게만 일어난다.

“보통 ‘환자를 살렸다’고 많이들 표현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의사는 가이드와 같은 듯하다. 여행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쉬운 길로 가게 해주는 게 가이드의 역할이다. 수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와 있는 약이나 기술, 수술 방법 등을 활용해서 살 수 있는 길로 가이드해 주는 것이 의사의 역할인 것 같다. 의사가 살린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정씨는 의사라는 전문직에 대해 이 사회가 상반된 두 가지 태도를 가지고 있다며,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나름으로 그렇게 정리한다. 휴머니즘으로 가득한 숭고한 직업으로 알려진 의사가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의 환자와 가족에게는 원망과 절망을 투사하는 대상이 된다. 병원과 의사에게 불신과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정씨처럼 생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수술을 하는 흉부외과는 노동의 강도에 비해 보상이 적은 극한 직업이 되었고, 해마다 신규 의사 수가 줄어드는 ‘멸종위기과’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 상황인지라 흉부외과 의사인 정씨의 말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살아남는 것. 두렵고 무서운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 같은 건 어차피 없다. 살아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더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것뿐. 전장의 군인들이 헤어질 때 두 손을 꼭 잡고 하는 말처럼, 살아서 다시 만나자, 다짐하는 것뿐. 죽음을 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저 살아남는 것뿐인 것 같다. 더 오래. 최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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