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삼성은 바이오제약을 신수종(新樹種) 사업으로 발표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바이오제약이 삼성의 미래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이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세계적인 제약사 사장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면서 바이오제약 사업을 챙겼다. 이 사업을 담당하는 두 개의 조직(삼성바이오에피스·삼성바이오로직스)을 만드는 등 5년 동안 1조원 이상을 투자했다.
2012년 설립한 바이오제약사 삼성바이오에피스는 2015년 첫 결실을 보았다. 세계적인 제약사의 관절염 치료제를 복사한 바이오시밀러(biosimilar) 2개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품목 허가를 받았다. 바이오시밀러는 바이오 신약을 복제한 약을 말한다. 유럽에 이 복제약을 시판하기 위해 유럽의약품청(EMA)에 판매 허가도 신청해둔 상태다. 그 외에 항암제와 당뇨병 치료제 등도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바이오시밀러 사업 대규모 생산시설 필수
2011년 설립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 담당이다. 한마디로 약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2013년 가동한 1공장에서는 미국 BMS와 스위스 로슈의 의약품을 생산하고 있다. 2공장은 2016년 1분기부터 가동할 예정이다. 이 업체는 2015년 12월 3공장 부지에서 첫 삽을 떴다. 3개 공장을 모두 가동하는 2018년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연간 36만 리터의 바이오의약품을 생산하게 된다. 규모 면에서 경쟁 상대인 스위스 론자(26만 리터), 독일 베링거잉겔하임(24만 리터)을 제치고 세계 최고가 되는 셈이다.
의약품은 크게 합성(chemical)약품과 바이오(bio)약품으로 나뉜다. 합성약품은 화학물질을, 바이오약품은 살아 있는 생물에서 뽑아낸 물질(세포·단백질·유전자)을 재료로 만든다. 합성약품에 비해 바이오의약품은 부작용이 적고 약효가 뛰어나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합성약품이 전체 의약품의 90%를 차지했지만, 해가 갈수록 그 비율이 낮아지고 바이오의약품의 비중이 커지는 추세다. 제약 전문 시장조사 기관인 ‘이밸류에이트 파마(Evaluate Pharma)’에 따르면, 2020년 상위 20대 의약품 시장의 64%가 바이오의약품으로 예상된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2013년 세계 바이오의약품 시장 규모는 1626억 달러(약 191조원)다. 이는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825억 달러)의 2.2배 규모다. 세계 바이오의약품 시장은 2020년 2780억 달러(약 326조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이 시장에서 바이오제약 사업으로 제2의 반도체 신화를 이루는 것이 삼성의 목표다.
이처럼 야심 찬 목표를 갖고 있는 삼성이 왜 복제약만 개발하고, 남의 약을 생산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을까. 자체적으로 바이오 신약을 개발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합성 신약과 비교하면 바이오 신약 개발은 수십 년간의 제약 기술이 집적돼야 가능한 일이다. 바이오 신약 1개를 개발하는 데 1조원 이상의 자금과 10년 이상의 시간도 필요하다. 그렇게 하고도 예상한 효과가 나오지 않아 중간에 폐기되는 약품이 부지기수다.
따라서 바이오 신약 개발 경험이 없는 삼성으로서는 바이오의약품을 복제하면서 노하우를 쌓는 것이 우선이다. 사실 바이오시밀러 개발도 녹록한 게 아니다. 바이오시밀러는 생물에서 유래한 물질로 만들기 때문에 신약을 복사해도 매번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신약과 비슷한(similar) 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또 바이오시밀러 사업은 대규모 생산시설이 필수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바이오시밀러 분야는 장치산업”이라며 “바이오시밀러는 본래 약보다 싸야 하고, 타 제약사가 요구한 시기에 약을 공급하는 것이 경쟁력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교한 생산 과정, 장기적인 물량 확보 등에서 바이오시밀러와 반도체는 유사하므로 삼성에 유리한 사업이고, 이미 셀트리온의 사례로도 검증됐다”고 설명했다.
국내 1위 바이오제약사인 셀트리온은 2007년부터 3년 동안 타 제약사의 바이오의약품을 생산하며 3000억원을 벌었다. 그 돈을 2009년부터 바이오시밀러 개발에 투자하며 2015년 말 기준 시가총액 9조원대의 제약사로 성장했다.
다른 제약사가 9만 리터 규모의 바이오의약품 제약시설을 설립하는 데 40개월 이상 걸리고 1조원의 비용을 투입한 데 비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18만 리터 규모의 3공장을 35개월 만에 8500억원으로 만들었다.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는 기자간담회에서 “CMO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선 공장을 빨리 만들어 잘 돌리고 잘 파는 것이 중요한데 삼성은 반도체 생산 경험을 통해 이를 이미 검증했다”고 말했다.
삼성의 다음 단계는 바이오베터(biobetter)를 만드는 일이다. 바이오시밀러가 기존 바이오 신약을 복제한 것이라면, 바이오베터는 효능, 투여 횟수 등에서 업그레이드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매일 맞아야 하는 주사제를 월 1회 투여해도 같은 약효를 내도록 하는 것이다. 바이오의약품은 반감기(半減期)가 짧아 자주 대용량을 투여해야 하는 불편이 있는데, 이 반감기를 늘리는 게 기술이다. 한미약품이 국내 제약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신약기술 수출 계약에 성공한 배경에도 2004년 자체 개발로 반감기를 늘린 기술(랩스커버리)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약업계에서는 이 정도의 기술력이 쌓이면 바이오 신약 개발 단계에 도달했다고 본다.
바이오 분야 전문 인력 부족이 걸림돌
현재 셀트리온, 한미약품, 삼성바이오에피스가 국내 바이오 제약업계를 이끌고 있다. 막대한 투자와 위험 부담을 안고 바이오약품을 개발하는 만큼 이들은 국내보다 세계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앞에 세 가지 걸림돌이 있다.
우선, 전문 인력 문제다. 업계에 따르면, 생명과학 분야 연구·개발 인력은 풍부하지만 바이오 분야 전문 인력은 부족하다. 싱가포르와 아일랜드 등은 국비 지원 또는 교육시설 투자 등으로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한다. 바이오의약품산업은 개별 기업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경쟁 분야라는 게 업계의 목소리다.
또 다른 하나는 낮은 의약품 가격이다. 국내 의약품 가격은 세계에서도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국민 부담을 줄이려는 조치다. 이 조치가 의약품 수출에는 악영향을 미친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한국은 자국에서 500원짜리 약을 외국에는 1000원에 팔려고 한다는 게 수입국의 불만”이라며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위험을 안고 오랫동안 개발한 신약의 가치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면 외국도 우리 신약을 싸구려로 취급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수출 상대국의 인허가에 관한 부분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매년 외국의 인허가 정보를 수집해 보고서로 발간한다. 또 3년 전부터 외국 컨설턴트 6~7명을 고용해 연 400건 이상 무료로 인허가 컨설팅을 지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수출 대상국의 인허가 장벽이 높아 국내 제약사들이 힘들어 한다. 정순규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제약글로벌지원팀장은 “단순 컨설팅에 그치지 않고 수출 계약으로 이어질 수 있게 지원할 계획”이라며 “2015년에는 콜롬비아와 페루에서 우리 의약품의 서류 및 생산시설 검사 면제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는데, 이처럼 인허가 장벽을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춰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녹십자는 백신과 희소병 치료제의 전문성을 강조한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개발한 4가 독감백신(4가지 바이러스 백신)은 2016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입찰을 준비 중이다. 녹십자는 연간 5000만 도즈(5000만명 접종 분량)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있다. 2012년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개발한 헌터증후군 치료제(헌터라제)는 남미·북아프리카에 수출돼 연간 약 2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세계 환자가 3000명밖에 없는 희귀 질환이지만 시장 규모는 1조원에 육박한다. 약값이 한 명당 연간 3억~5억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의약품 중 하나다. 강현구 녹십자 홍보과장은 “미국의 독무대였던 이 시장에 진입해 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한미약품은 연구·개발(R&D) 공유 방식으로 역량을 키운다는 구상이다. 올해 사노피·얀센·베링거잉겔하임 등 굵직한 다국적 제약사에 총 6건의 신약 기술을 수출해 일궈낸 8조원의 성과는 매년 9000억원 이상의 연구비를 15년간 투자한 결실이다. 이 회사는 최근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전략을 발표했다. R&D 기술과 아이디어를 공개하고 받아들이는 개념이다. 이관순 한미약품 대표는 “우리의 R&D 성과를 역량 있는 연구자들과 공유함으로써 한미약품 신약 파이프라인 확대는 물론 R&D 부문에서의 상생을 도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