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역사, 유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12.31 18:33
  • 호수 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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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가기 전에 읽어야 할 <박물관 보는 법> 펴낸 역사학자 황윤

 

“박물관에 얽힌 사연들은 관람객에게 공개되는 순간부터 뒤안길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관람객은 전시물을 보러 오는 것이지 박물관 자체를 보러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박물관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시대와 인물과 예술이 뒤얽힌 이야기가 무궁하다. 이 사연들을 꺼내 보여주고 싶었다.”

전시를 위한 공간 정도로 생각했던 박물관에 이야기가 있다니, 귀가 솔깃해질 법하다. 어릴 때부터 드나들었고, 아이들 키우면서 또다시 드나들었던 공간에 ‘나와 내 가족의 추억’ 말고도 무수한 사연이 있었다니 말이다. 몇 번을 다녀온 박물관에서 내가 못 본 것이 있고, 그것들을 제대로 보는 법을 알려주겠다니 다시 한 번 박물관을 찾을 때 요긴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학자 황윤씨가 박물관 가기 전에 읽어야 할 책이라며 <박물관 보는 법>을 펴냈다.

ⓒ 유유출판사 제공

“박물관 자체도 하나의 유적이자 작품”

아이들과 함께 쉽게 읽을 책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호기심으로 박물관을 관람했던 아이들이 어른이 돼서 그 박물관을 다시 찾을 때 읽을 만한 책이라서다. <박물관 보는 법>은 한국 최초의 박물관에 얽힌 가슴 아픈 역사부터 국내외 다양한 박물관 이야기를 전 방위로 펼쳐놓는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유적과 작품을 보여주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박물관 자체도 하나의 유적이자 작품이라는 것이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박물관의 비결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전시된 작품에 흥미로운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경우, 다른 하나는 공간이 간직하고 있는 사연이다.” 보통 박물관에 대해 이런 선입관을 가진다. ‘고고학적 자료, 역사적 유물, 예술품, 그 밖의 학술 자료를 수집·보존·진열하고 일반에게 전시해 학술 연구와 사회 교육에 기여할 목적으로 만든 시설.’ 사전에 나오는 대로다. 또, 일류 박물관과 삼류 박물관은 전시 자료들이 얼마나 희귀하고 고가의 것인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황씨는 박물관의 위상이 단순히 전시 자료의 가치로 만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 나름의 역사와 설립자나 운영자들의 관점에 따라 품격이 정해지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던 황씨는 ‘박물관 마니아’로서 역사서를 쓰는 저자가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박물관을 좋아했고 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공부하는 일을 큰 낙으로 삼았다. 유물과 미술 작품을 보는 안목을 기른 것은 인사동에서 고미술 관련 일을 하면서부터다. 역사 교양을 대중화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그는 삼국시대와 신라에 특히 관심이 많아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등을 펴냈다.

황씨는 시대 순이나 사건 순으로 역사를 설명하기보다 박물관의 유물 한 종류를 두고 재해석하는 데 이골이 났다. 이를테면 ‘금’ 하나를 중심으로 삼국시대를 새롭게 해석하는데, 그런 해설은 새로운 역사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해진다. 황씨는 금 장식물을 통해 국가 간의 우열 관계를 엿볼 수 있다고 들려준다. 가야와 신라의 관계도 금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고 말한다.

“가야와 신라는 소백산맥 아래서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금동관과 금관을 보면 가야와 신라의 것은 비슷했다. 다만 크기나 모양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신라의 것이 더 컸다. 신라의 금관은 가야 것에 비해 크기가 3~4배에 달한다. 패턴은 비슷하다. 가야의 금귀고리가 가냘프고 작다면 신라는 크고 화려했다. 이를 통해 신라가 가야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질로써 승부했다면 신라는 상대적으로 제작 기술이 떨어져서 크기와 무게로 다퉜다. 신라인과 가야인은 금관의 크기로 백성의 숫자나 권력의 크기를 비유했던 것이다. 고구려인이나 백제인이 이를 보고 웃었을지 모르지만 신라인과 가야인은 심각했을 것이다.”

“불상 하나로 이면의 역사 읽어낼 수 있어”

저자 황윤씨는 금을 통해 삼국시대의 세력 다툼이나 통일신라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흥미롭게 설명한다. 신라의 금귀고리가 고구려의 것과 형태가 비슷했던 것은 고구려가 한때 신라의 보호국이었음을 말해준다는 식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신라에 세공 기술을 전수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황씨는 불상 제작과 발전 과정에서도 정치와 역사적인 배경을 읽어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고대 국가로서 소읍(小邑)을 통합하면서 다양한 민족을 품어야 했던 신라는 법과 제도만으로 이를 할 수는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다양한 종족의 가치를 통합하게 만드는 수단으로서 불교를 택했다. 권력자들은 불상에 황금을 입힘으로써 불상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이는 곧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과 같았다. 황씨는 7세기에 등장하는 반가사유상을 통해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

“국보 83호인 반가사유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7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는데, 제작 자체가 상당히 어렵다. 청동기도 제대로 제작하지 못했던 신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는 것을 반가사유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금동청동불상을 이렇게 크게 만든 경우는 중국에도 없었다. 후진국이었던 신라가 갑작스레 부상하면서 중국도 만들지 못한 반가사유상을 만들어 신라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반가사유상을 보면 신라인의 문화·기술·표현력 등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근대화 발전 과정도 비슷한데,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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