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불감증이 소방관을 사지로 내몬다
  • 변상호 | 前 대한소방공제회 이사장 (.)
  • 승인 2016.01.07 16:52
  • 호수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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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보안에 비해 안전에 대한 관심 부족하고 투자 소홀해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아가기에 안전한 나라일까. 안전에 대한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안전하다’ 또는 ‘안전하지 않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전 세계가 테러 이슈로 들썩이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개인이 무기를 소지하기가 어렵고, 국가가 직접 투자하고 관리하는 국방 및 공공 치안 시스템이 잘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간 보안산업이 발전돼 있고, 수십만 대의 CCTV가 공공 및 민간 시설, 길거리 등에 설치돼 있다. 심지어 위치추적 시스템으로 사람들의 이동 경로에 대한 추적도 가능하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좁은 국토 내에서 범죄가 은닉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돼 있다.

소방 수요 늘어나는데 재원은 턱없이 부족

그러나 이러한 안보 및 보안(security) 문제와는 달리 안전(safety) 측면에서는 정부와 민간의 관심이 부족하고 투자가 소홀해 안전 문제가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구조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2012년 구미 불산 누출 사고, 2014년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 사고, 분당 환풍구 붕괴 사고, 2015년 강화 캠핑장 텐트 화재 사고 등 재난사고에서 사람들이 안전 문제를 남의 일처럼 여기는 안전불감증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2014년 6월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소방관들의 모임인 소방발전협의회 회장인 고진영 전북 군산소방서 소방장이 더위 속에 두꺼운 방화복을 입고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얼마 전 서울의 한 영어학원 강사가 소방서에다 소방 점검을 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는 민원을 신청하면서 “학원의 계단 출입구에 있는 방화문을 열어놓은 채 소화기로 받쳐놓고 있어서 몇 번 얘기를 했지만 시정이 안 돼 늘 불안하다”고 했다. 실제로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 사례가 있다. 2008년 2월21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5층 화재 당시 각 층의 계단실 방화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문 밑에 삼각형 나무를 끼워 열어둔 방화문 때문에 옥상층까지 연기가 바로 확산됐고, 야간 근무를 하던 공무원들이 옥상으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우리나라의 생활방식은 선진국 수준으로 좋아졌지만 화재 등 안전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후진국 수준이다. 미국·캐나다 등 선진국은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도중에도 갑자기 소방훈련을 실시해 어릴 때부터 생활 속 안전 학습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입시에만 매몰된 우리 학교에서는 안전에 대해 배울 기회가 별로 없다. 교과 과정의 일부는 형식에 불과하다. 뿌리박힌 안전불감증은 쉽사리 개선되기가 어려워 선진국에서는 흔히 볼 수도 없는 엉뚱한 사건·사고들이 빈번히 발생한다. 생활 주변의 곳곳이 지뢰밭인 셈이다.

안전사고는 언제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소방관들은 각종 재난 현장에 투입되고, 또 응급환자 이송을 위해 출동할 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 갇힘, 등산객 조난, 한강 다리 투신 자살자 구조, 벌집과 고드름 제거, 멧돼지 습격 등 주민 안전을 위협하는 각종 안전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늘어나는 소방 서비스의 수요를 감당할 소방 재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소방헬기, 고가사다리차 등 값비싼 장비를 확보하는 데 고충이 크다. 정부는 국방·치안은 국가 시스템이지만 소방 시스템은 지방자치단체의 업무라며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자체에서는 각종 복지 예산을 배분할 곳이 너무 많아 유지·관리 기능인 소방에 투자할 예산이 부족하다고 한다. 인건비성 경비가 소방 예산의 80% 정도를 차지하기 때문에 노후한 소방 장비의 교체가 필요해도 남은 예산으로는 장비 구입이 어렵다.

2015년 10월12일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대강당에서 열린 소방공무원 처우개선 정책토론회에 참석한 권순경 서울소방재난본부장이 발표를 하고 있다. ⓒ 뉴시스

안전 복지망 허술하면 국민 삶 불안해져

정부는 최근 담배세 인상으로 조성된 소방안전교부세 3141억원을 지자체에 배정해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시·도별로 나누면 51억~265억원에 불과하다. 그것도 소방 분야만이 아닌 도로·하천·공유림의 안전을 개선하는 사업을 포함하고 있다. 소방산업도 시장이 좁아 수요가 부족해 영세업체만 난립되어 있는 실정이다. 적은 예산으로 생산된 저가품의 고가사다리차는 성능이 떨어져 인명 구조 현장에서 사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자주 발생한다.

2014년 한 해 동안 화재·구조 등 명목의 119 출동 건수는 무려 302만9906건에 이른다. 잦은 출동으로 인해 지난 10년간 순직한 소방관이 179명, 공상자(公傷者)가 2244명이나 된다. 순직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소방관들은 계급별로 일정한 금액의 조의금을 모아 유가족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근무 기간이 짧은 젊은 소방관이 순직했을 때 정부가 주는 보상금으로는 남은 유가족들이 살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치매 노인, 어린이, 영세 주민 등 사회적 약자를 부양하고 그들의 삶을 안정적으로 지켜주는 것을 사회적 복지라고 한다. 시민들이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생명이 위급한 순간에 누군가 빨리 달려와서 시민들을 구해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안전 복지’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안전 복지망이 허술할 때 국민들의 삶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소방 시스템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미 15년 전에 유엔 국제탐색구조자문단은 한국의 소방 119 시스템이 세계 핵심 국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정부와 지자체의 틈바구니에서 사회 안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방관들의 노력이 고달플 뿐이다. 테러 위협이 점차 커져가는 요즘, 국민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소방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확보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민들의 안전한 삶을 지키려는 소방관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조금 더 개선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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