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과의 대화] “여자친구가 너무 괴로워서 죽여달라고 했다”
  • 배상훈 | 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 (프로파일러) (.)
  • 승인 2016.01.07 16:53
  • 호수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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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달라” 여자친구 부탁에 ‘촉탁 살인’ 주장…자살률 1위 한국 사회의 초라한 자화상

2015년 12월17일 새벽 2시30분쯤 서울시 강동구의 한 공중전화 부스 앞. 여자친구를 죽인 남성이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직접 신고를 한 후 사라졌다. 인근 주택가 원룸에서는 여자친구 A씨(39)가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A씨는 외출복을 입은 채 이불까지 덮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A씨는 “빚 때문에 너무 힘들다” “내가 사라져야 모든 게 끝난다” 등 현실을 비관하는 유서까지 남겼다. 경찰은 수사를 개시한 지 13시간이 지나 A씨의 남자친구 B씨(37)를 체포했다. A씨의 유서 옆에 “여자친구가 너무 괴로워해서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B씨의 글이 발견된 게 단서가 됐다. 경찰은 B씨가 자신을 죽여달라는 A씨의 부탁을 받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함에 따라 ‘촉탁 살인’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형법 제252조에 따르면, ‘촉탁·승낙에 의한 살인’은 ‘실제 죽은 자’가 ‘실행을 요청받은 자’에게 살인을 부탁해 저질러지는 경우를 말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2014년에 4건의 촉탁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대부분 부부나 연인이다. 그 기제(機制)는 “‘실제 죽는 자’가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실행해야 하는데, 본인이 그런 행동을 할 만큼의 능력 혹은 용기가 부족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실행을 요청받은 자’를 통해 자살 의지를 대행하게 하는 경우”라고 한다.

필자가 경찰에 있을 때를 되돌아보면 실제 이런 사례는 1년에 1~2건 정도로 매우 드물었다. 그런데 2014년 한 해에 4건이나 발생했다는 것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인 한국 사회의 초라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자신을 죽여달라고 주변 사람에게 애원하는 모습에는 ‘헬조선’이라는 신조어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좌절이 짙게 배어 있다. 2014년 우리나라의 자살자는 1만4427명에 이른다. 하루 평균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 일러스트 오상민

생활고와 지병에 시달리다 “죽여달라” 부탁

자살자 수가 늘었다고 해서 자살하기가 쉬워진 것은 아니다. 상당수 자살자들이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끝에 자신이 원하던 죽음에 이르게 된다. 혼자 죽는 것이 힘들어 인터넷 자살 사이트를 통해 ‘동행’할 이들을 찾는 경우도 많다. ‘번개탄’을 이용한 특정 방법이 선호되는 이유도 집단 자살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런 방법조차 실행하기 힘들고 두려운 경우 타인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촉탁 살인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사회에서 고립된 약자들의 마지막 선택일 수 있다.

촉탁 살인의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생활고와 지병으로 우리 사회의 ‘안전망’과 연결돼 있다. 오랜 지병에 따른 생활고 문제, 노년층의 고독사와 관련된 문제, 상대적으로 젊은 층의 생활고 문제 등이 촉탁 살인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전체 사례 중에서 50대 이상 장·노년층은 대부분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 이 경우 자신과 오랫동안 정서적 유대감을 쌓은 사람에게 ‘죽음의 실행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반면 20~30대 젊은 세대에서는 단기간 알고 지내던 인터넷 동호회 회원이나 채팅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 등에게 살인을 요청한 경우가 많았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이렇다. 2008년 궁핍한 삶으로 우울증에 시달려온 70대 아내가 관절염으로 거동이 힘든 남편에게 자식에게 짐이 되지 말자며 함께 죽자고 제안했다. 아내가 먼저 둔기로 남편을 죽인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했다. 남편은 사망했지만 아내는 자살에 실패했다. 2005년에는 척수염으로 하반신이 불구 상태였던 남편이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아내에게 자신이 죽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아내가 남편의 목을 졸라 살해한 사건이다. 아내는 궁핍한 형편과 힘든 간병에 따른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촉탁 살인의 동기를 살펴보면 결국 핵심은 경제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지병의 경우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시간이 지날수록 절망감만 쌓여갈 뿐이다. 반대로 비용이 많이 드는 병치레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주변 관계도 어렵게 만든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게 돼 고독한 삶을 이어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50대 이상 장·노년층의 문제만이 아니다. 20~30대 젊은 층도 생활고로 인해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 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구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다른 일로 성공하기도 쉽지 않다. 한 번 실패하면 재도전의 기회를 주지 않는 냉혹한 사회다. 학자금 대출이 생활비 대출로 이어져 빈곤이 대물림된다. 신용대출은 꿈도 꾸지 못하고 가족을 연대채무자로 담보 잡아 자신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빈곤층으로 내몰리는 일이 허다하다.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A씨도 감당할 수 없는 빚으로 인해 가족을 길거리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에 절망했다. 스스로 죽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남자친구에게 일종의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의 의료 안전망도 처참하다. 자칫 암과 같은 중병에 걸리면 가족 전체가 경제적 어려움에 내몰린다. 특히 회생 가능성이 작은 말기 암의 경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촉탁 살인이 사회 안전망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5년 12월7일 서울 강동구 한 원룸에서 A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남자친구 B씨는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직접 신고를 했다. ⓒ MBC 보도 캡처

촉탁 살인 실행자들 범행 후 대부분 자수

촉탁 살인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이 불편해할 수 있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실행자들’은 대부분 범행 후 자수를 한다. 이들은 형법 제252조에 따라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게 된다. 이들을 개인의 이득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일반 살인자와 동일하게 볼 것이냐는 질문을 던져보자. 오랫동안 ‘죽은 자’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봤거나, 아니면 ‘죽은 자’의 고통을 자신도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살인’ 행위를 ‘연민’으로 해석하곤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런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식의 의무감과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을 부탁했다’는 데 대한 책임감을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촉탁 살인을 의무감과 책임감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면 그 ‘배경’이 무엇인지는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살인행위라고 해서 언제까지 사회에서 금기시할 수만은 없는 문제인 셈이다.

촉탁 살인을 이야기할 때 늘 따라다니는 게 바로 ‘안락사’(존엄사) 논쟁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죽을 권리’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130여 명의 안락사를 도와 살인죄로 수감됐던 미국의 의사 ‘잭 케보키언’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어떤 사람은 그를 ‘연쇄살인마’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죽음의 천사’라고 한다. 생명 경시 현상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스스로 죽음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생명 연장이 과연 인도주의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이 무엇이라고 단정 짓기는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촉탁 살인이 사회 안전망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안락사 문제와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 이 두 죽음이 겹쳐져 보이는 배경에는 죽음을 진지하게 다루는 데 어색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있다.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사고가 일반화돼 있다.

하지만 삶이 따로 있고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의미 없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좀 더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안락사는 물론 촉탁 살인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사회적 논의로 확대되는 것이 비록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외면할 수만은 없는 문제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는 자살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의 주장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촉탁·승낙에 의한 살인죄 



 

본인으로부터 의뢰를 받거나 승낙을 받아 그 사람을 살해하는 경우로 동의살인죄(同意殺人罪)라고도 한다. “차라리 죽여달라”는 적극적인 부탁을 받아 살해하는 것은 촉탁 살인, “나를 대신 죽여달라”는 말을 듣고 그의 승낙을 받아 살해하는 것은 승낙 살인이다. 또 불치의 병자가 육체적인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죽여달라”는 진지한 요구를 하고 이에 의해 살해하는 안락사도 형식상으로는 동의살인죄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처벌은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이며 미수범도 처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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