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방송 트렌드가 궁금하면 김구라를 보라
  • 정덕현 | 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16.01.07 17:10
  • 호수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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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입’이 된 예능인 김구라 트렌드 읽는 눈과 비평 능력 탁월

“예능 하는 사람들이 제작진, 출연진 모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무한도전>을 ‘국민 예능’이라고 하는데, 매주 시청자의 관심을 받으며 중압감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고 10년을 한다는 사실은 선거로 말하면 매주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것이다. 멤버들이 대단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재석을 헐뜯는 얘기를 종종 했지만, 유재석에게 같은 예능인으로서 경외감을 느낀다.”

<2015 MBC 연예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구라는 수상소감보다 먼저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다. 아마도 유재석과 경합을 벌여 대상을 탄 사실에 대해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먼저 <무한도전>과 유재석에 대한 비평에 가까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까.

김구라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독설을 내뱉는 입이 아니라 예능의 새로운 트렌드를 제대로 짚는 선구안이다. ⓒ 연합뉴스

이 수상소감을 통해 느껴지는 건 김구라가 가진 남다른 영역이다. 그는 스스로가 예능인이면서 예능을 비평하는 자리에 자주 선 적이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JTBC <썰전> 중 ‘예능 심판자’라는 코너는 그의 이런 비평 능력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그는 최근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에서 한 해의 예능 프로그램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김구라는 <무한도전> 10년을 얘기하면서 선거를 비유로 들 수 있는 독특한 예능인이다.

이 비평 능력은 김구라라는 예능인이 어떻게 유재석이라는 독보적인 존재를 넘어서 MBC 연예대상을 거머쥘 수 있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그가 2015년 MBC에서 대상을 탈 수 있었던 건 ‘다작(多作)’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다작이 양으로만 승부한 것이라면 대상은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한 다작 속에는 ‘올해의 MBC 예능’이라고 해도 무방할 법한 프로그램들이 거의 다 들어 있었다. <마리텔>과 <복면가왕>이 그것이다.

<마리텔>과 <복면가왕>이 그를 꼽는 까닭

<마리텔>은 MBC를 넘어 전체 방송사에서 올해의 예능으로 꼽는 프로그램이다. 미디어 환경이 변화하면서 1인 미디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재, 지상파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마리텔>은 이 위기감을 지상파가 성공적으로 끌어안은 사례가 되었다. ‘개인 방송’ ‘인터넷’ ‘비연예인’ ‘실시간 소통’ 같은 지금의 뜨거운 예능 키워드들이 이 프로그램 안에 모두 들어 있었다.

김구라는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은 아니었지만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세우는 역할을 했다. 박진경 PD는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김구라를 이렇게 평가했다. “사실 재미로만 밀어붙이면 더 좋은 순위를 낼 수도 있는 김구라였다. 하지만 김구라는 이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번 힘들어도 콘텐츠, 이를테면 역사나 경제 같은 것들을 소재로 하는 아이템들을 갖고 왔다. PD 입장에서는 이렇게 프로그램의 색깔을 유지해주고 일정 부분의 재미를 만들어주는 존재가 소중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올해의 MBC 예능으로 손꼽히는 프로그램은 <복면가왕>이다. 이 프로그램은 한물갔다고 여겨지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복면’이라고 하는 블라인드 도구를 활용해 부활시켰다.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니 편견이 사라졌고, 그 사라진 편견 위에서 다양한 인물들(그간 방송에서 자주 보지 못했던 인물들까지)의 새로운 이야기들이 가능해졌다.

여기서 김구라의 역할 또한 독보적이었다. 심사위원 자리를 치워버리고 대신 연예인 패널을 앉힌 <복면가왕>에서는, 패널들로 하여금 무대에 오른 복면 가수들이 누구인가를 추정해보게 하는 그 대목이 무엇보다 중요한 장면들이 된다. 그 과정에서 호기심과 궁금증이 만들어지고 그것은 복면 가수의 노래와 목소리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여러 패널이 앉아 있었지만 역시 그 중심에서 때론 자극적인 발언을 하고, 때론 스스로를 망가뜨리기도 하면서 김구라는 프로그램의 동력을 조절해왔다. 김구라는 <마리텔>은 물론이고 <복면가왕>에서도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고 거기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단지 출연자의 입장이 아니라 제작자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이렇게 새로우면서도 지금의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잘 선택해낸 그의 선구안이다. 인터넷 방송에서 독설을 날리며 주목을 받았던 그가 방송으로 돌아와 만들어낸 파장은 당대의 예능 트렌드를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예인들을 모셔와 상찬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던 토크쇼들은 김구라 이후 직설을 넘어 독설까지 날리는 ‘리얼 토크쇼’로 변화했다. 김구라가 이끌던 <라디오스타>는 그 첨병이었고, 이후 <강심장>같이 아예 대놓고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토크쇼로 이어졌다.

(왼쪽 사진)과 에서 김구라는 출연자가 아닌 제작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역할을 소화해내며 대체 불가능한 자원임을 증명하고 있다. ⓒ MBC 캡쳐

그의 직설화법이 지상파 토크쇼 변화시켜

김구라의 등장은 당대 토크쇼들의 화법을 바꿔놓았다. 인터넷 문화가 점점 그 덩치를 키워가면서 그 직설화법이 지상파 토크쇼에도 변화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김구라가 독보적일 수밖에 없었던 건 이런 변화에 그만큼 준비되어 있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인터넷 방송 시절 위안부와 관련된 부적절한 언사가 논란이 되어 하차한 후 다시 방송에 복귀한 김구라의 행보를 보자. 물론 논란으로 하차했다 복귀하는 연예인들이 대부분 지상파가 아닌 비지상파로부터 시작한다는 건 하나의 불문율이 됐다. 하지만 김구라는 여기서도 JTBC <썰전>처럼 지금껏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디뎠다. 김구라는 어느 정도 예능에서의 스타 MC 전성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저 웃기는 예능이 아니라 정보가 있는 콘텐츠 예능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 콘텐츠 예능은 스타 MC 체제에서 스타 PD 체제로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런데 스타 PD들은 대부분 지상파에서 비지상파로 스카우트된 경우가 많았다. MBC에서 JTBC로 이적한 여운혁 PD는 과거 김구라와 <라디오스타>를 같이 했다. 그와 김구라가 <썰전>을 했다는 건 우연한 일이 아니다.

최근 들어 연예인보다 일반인들의 이야기가 더 주목받는 ‘일반인 트렌드’의 변화 속에서도 김구라는 발 빠른 선택을 했다. SBS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이하 <동상이몽>)는 일반인들의 사연이 관찰 카메라로 소개되고 그것을 통해 연예인 MC와 패널들이 스튜디오에서 얘기를 나누는 콘셉트다. 일반인 트렌드 속에서 연예인들이 설 자리를 정확히 마련해낸 것이 이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괜찮은 반응을 얻고 있는 <동상이몽>에서도 김구라는 메인 MC인 유재석과는 다른, 자신만의 역할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좋은 선구안을 갖게 된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의 비평 능력과 무관하지 않다. 비평적 관점은 타자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대상화해서 볼 수 있는 시선을 마련해준다. 연예계에서 전 방위로 맹활약하는 김구라로서는 보통의 기자나 비평가들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접하기 마련이다. PD들과 친분을 유지해오면서 변화해가는 예능의 트렌드를 예민하게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썰전>이나 <라디오스타>를 통해 드러내는 비평에 대한 욕심도 한몫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과거 인터넷 시절은 비평이라기보다는 비난이나 비판에 가까운 것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을 흑역사로 남겨놓은 채 지상파에서 꽤 오래 활동해온 김구라는 이제 대중의 공감대를 들여다보며 비평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시선을 갖게 됐다.

<마리텔>에서 김구라가 소재를 바꿔 하고 있는 ‘트루 스토리’를 보자.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그가 일찌감치 읽고 있었다는 증거다. <냉장고를 부탁해>(JTBC)·<수요미식회>(tVN) 같은 ‘쿡방’이나 최근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JTBC)·<내 방의 품격>(tVN)같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집방’ 역시 정보와 예능이 섞인 콘텐츠 예능이라고 볼 수 있다. 김구라는 아마도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트렌드에 자신이 가진 정보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가진 비평이라는 무기 십분 활용

최근 몇 년 동안의 예능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스타 예능 MC들의 위상이 상당 부분 추락한 걸 실감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듯 이제 유재석·강호동이 나오면 무조건 대박이 나는 그런 시대는 지나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라의 행보는 다른 예능 MC들에게 상당한 의미를 던져줄 것으로 보인다. 정보를 탑재한 콘텐츠 예능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단지 웃기는 재능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상당한 지적 능력이 요구되고, 때로는 스스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과거처럼 예능 MC가 프로그램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시대도 이미 지나갔다. 국민 예능이라고 하는 <무한도전>에서 독보적 위치를 보여주는 유재석이라도 이제 <동상이몽> 같은 프로그램에 들어오면 모든 걸 이끌기보다는 자신의 영역과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예능 MC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프로그램을 잘 선택하는 선구안과 그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정확히 읽어내고 그것을 수행해내는 능력이다. 김구라는 자신이 갖고 있는 비평이라는 무기를 통해 이 두 가지 덕목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물론 그에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위기의 시점에서 그것이 오히려 하나의 기회 요소로 바뀔 수 있었던 건 그의 남다른 선구안 덕분이다. 직설의 시대에 ‘시대의 입’으로 부상했고, 지상파에서 비지상파로, 또 스타 MC에서 스타 PD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콘텐츠의 시대에 그는 콘텐츠 예능이 가능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트렌드가 궁금하다면 김구라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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