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게인 1988 바둑! 응답하라 1988 바둑!”
  • 정용진 | 사이버오로(바둑 전문 사이트) 총괄이사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1.12 12:24
  • 호수 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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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이 환기시킨 한국 바둑의 위상…2016년의 ‘최택’은 누구일까
에 등장하는 천재 바둑기사 최택 6단은 이창호 9단을 빼닮았다. 어눌한 말투와 행동, 시계방 주인의 아들이란 점이 닮았다. ⓒ 한국기원·tvN

이세돌과 커제(柯·중국)가 제2회 몽백합배 최종전(결승 5국)을 벌이던 2016년 1월5일, 포털 사이트 네이버와 다음에서는 그날 내내 ‘이세돌’이 검색어 1위에 올랐다. 프로기사가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 1위에 오른 건 매우 드문 일이다. 1980년 조치훈 9단이 일본 명인을 제패했을 때, 1989년 조훈현 9단이 응씨배에서 우승하며 초대 ‘바둑황제’로 등극했을 때, 이창호 9단이 2005년 제6회 농심배에서 기적 같은 5연승 신화를 썼을 때에 못지않은 관심이 쏠렸다. 워낙 큰 승부이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바둑계에서 봤을 때의 얘기이지, 별 흥미가 없는 젊은 세대까지 이처럼 관심을 보인 데는 아무래도 지금 tvN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 드라마의 영향이 큰 듯하다.

<응팔>의 극중 인물 최택 6단(박보검 분)은 이창호 9단을 실제 모델로 한 캐릭터여서 바둑팬은 물론이고 바둑을 잘 모르는 젊은 층에까지 화제가 되고 있다. 이창호는 전주 중앙시장통에자리한 ‘이시계방’의 아들이었다. 이러한 설정에서부터 최택 6단이 바둑에서 보이는 활약상과 어눌한 말투며 행동까지 이창호 9단의 행적과 모습을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적절히 버무린 팩션(faction) 드라마이니만큼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다.

우선 이창호 9단은 1975년생이다. 따라서 1988년에는 13세의 중학생에 불과하고(드라마에서는 고등학생), 1986년 11세에 프로 입단을 해 3년 만인 1989년 여름 제8기 KBS바둑왕전(방송 속기전)에서 우승하며 첫 타이틀을 따는 놀라운 행보를 보이긴 했어도 1988년에는 무관(無冠)이었다. <응팔>에서 보이는 활약상은 1990년 이후의 얘기다. 그렇지만 1988년 시점에 타이틀만 아직 획득하지 못했을 뿐 이미 이창호는 그해에 최고의 활약을 보인 기사에게 주는 바둑대상 MVP를 수상했다. 75승 10패의 성적을 거둬 승률(88.2%), 다승(75승), 최다 대국(85국), 연승(25연승) 4개 부문 1위를 기록했고, 3단에 지나지 않은 햇병아리란 사실이 무색하게 6개 기전 본선에 올랐거니와 최고위전과 패왕전 2개 기전에서는 도전권을 따내 향후 한국 바둑계에 밀어닥칠 쓰나미를 예고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1988년 무렵의 국내 바둑계 현황은 어떠했을까 돌이켜보자. 세계 바둑사에서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지을만한 획기적인 해가 1988년이기 때문이다. 프로바둑 세계대회가탄생한 원년이 1988년이다. 그해 4월, 일본이 매년 개최하는 후지쓰배를 선보였고, 4개월 후 대만의 거부 잉창치(應昌期) 회장이 우승 상금 40만 달러를 건 응씨배를 출범시켰다. 이전까지는 바둑강국인 한국·일본·중국이 국경의 방책을 높이 세운 채 간혹 교류전이나 치를 뿐이었다. 이때까지 일본 바둑은 세계 바둑의 메이저리그로 행세했고, 실제로도 바둑의 수법과 문화에서가장 앞선 선진국이었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모방하는 단계였다.

<응팔> 극중 인물 최택 6단의 모델인 이창호

1970~80년대 한국 바둑의 1인자는 조훈현 9단이었다. 그냥 가장 잘 두는 1인자가 아니라 모든 타이틀을 동시에 전부 거머쥐는 전관왕을 1980년(9관왕), 1982년(10관왕), 1986년(11관왕) 세 차례나 달성했을 만큼 독보적인 1인자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당시 일본은 한국 바둑을 중국보다 뒤떨어지는 변방국으로 취급했고, 조훈현은 골목대장일 따름이었다.

대신 한국민에게 큰 위안을 준 존재는 1980년대 일본 3대 타이틀인 명인·본인방·기성전을 차례로 움켜쥐며 열도를 호령한 조치훈 9단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바둑 붐이 크게 인 적이 세 번 있는데, 그 첫 번째 바람이 바로 조치훈이 명인에 올랐던 1980년이다. 두 번째가 1989년 조훈현이 응씨배에서 우승했을 때이고, 세 번째가 1990년대 이창호의 등장에 따른 관심 증폭이었다. 지금 최정상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이세돌 세대 이후의 기사는 모두 ‘이창호 키즈’들이다.

1988년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의 수는 95명(여자 2명)이었고, 이 중 9단은 5명에 불과했다. 2015년에는 프로기사의 수만 310명(남자 255명, 여자 55명)이고, 9단만 71명에 이른다. 과거와 견주면 격세지감이다. 1988년 당시의 기전 수는 13개였으며(조훈현 8관, 서봉수 3관, 유창혁이 1관이었고, 이창호는 이때까지 무관), 13개 기전의 우승 상금을 다 합해도 1억3000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왕위전 우승 상금이 가장 많은 1600만원이었다. 1988년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한 해 전(1987년) 랭킹 1위인 조훈현 9단이 벌어들인 연간 상금 총액이 9950만원이었으니 그의 독주가 어떠했는지 실감할 만하다.

최근 바둑의 위상과 인기, 예전만 못해

27년이 지난 2015년 한국이 개최하고 있는 기전 수는 세계대회 5개(단체전까지)를 포함해 25개이며, 기전의 총 예산 규모는 80억원에 달한다. 우승 상금 총액은 20억원. 외형만 놓고 보면 엄청난 확장을 보였다. 그렇지만 기전의 우승 상금이나 전체 예산규모가 커진 것은 세계 대회가 늘어난 결과이지 제한 기전이나 이벤트 기전을 빼면 국내 기사들이 모두 참가하는 국내 기전의 수는 6개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후원사들이 홍보 효과에 연연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바둑계에도 ‘빈익빈 부익부’ ‘풍요 속의 빈곤’ 현상이 도드라지고 있는 것이다.

랭킹 1위가 한 해 벌어들인 총상금 액수만 놓고 봐도 바둑의 위상과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걸 알 수 있다. 1987년 조훈현 9단이 획득한 상금 총액이 1억원에 육박했는데(이듬해에는 1억원을 돌파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27년이 지난 2015년 랭킹 1위 박정환 9단의 총상금 수입이 8억1300만원, 2위 김지석 9단은 5억원을 조금 넘겼다. 얼핏 보기에 많이 늘어난 것 같지만 1984년 프로야구 최고 투수인 최동원 선수가 받은 연봉이 4700만원(이것도 보너스를 합한 특급 대우)이었고,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씨름판의 이만기 선수가 4600만원을 받았던 걸 헤아리면 1980년대 바둑계 정상급 기사의 수입은 스포츠스타보다 윗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억억 소리 나는 프로스포츠 선수의 연봉과 프로기사의 상금 수입을 비교하는 자체가 난센스가 돼버렸다.

1988년은 우리나라가 서울올림픽을 개최한 해다. ‘응답하라’ 드라마가 굳이 1988년을 지목한 것도 뭔가 역사의 분기점이 될 만한 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의 관점으로1988년은 바둑계에도 새로운 기운이 감돈 획기적인 해였다. 그해 가을, 당시 22세 방위병인 유창혁 3단이 신예 기사로는 처음으로 대왕전에서 조훈현을 3-1로 무너뜨리는 파란을 일으켰고, 13세의 이창호가 최고위전과 패왕전에서 스승 조훈현에게 도전하는 기가 막힌(?) 사건을 일으켰다. 세계 바둑사에 유례를 찾을 길 없는 사제 도전기 첫판이 1988년 크리스마스이브 날 부산 광안리 시사이드호텔에서 펼쳐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바야흐로 15년 철옹성을 구축했던 조훈현 왕국이 흔들리는 조짐이 일었고, 그해 바둑계를 총정리하는 바둑연감은 ‘신예들이 일으킨 반란의 해’로 기록했다.

세계 바둑대회가 첫선을 보인 1988년은 그간 중국 바둑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오던 한국 바둑이 단숨에 세계 정상으로 올라 설 발판을 잡은 ‘기회의 해’이기도 했다. 4월 세계 최초로 열린후지쓰배에서 조훈현은 1회전 탈락의 쓴맛을 보았으나, 8월부터 시작한 응씨배에서는 한국 바둑의 자존심과 명운을 걸고 투혼의 승부를 펼쳐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2로 뒤진 벼랑 끝 상황에서 특유의 강신무(降神舞)를 펼치며 중국이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衛平) 9단을 상대로 3-2 뒤집기 역전 우승을 했다. 혈혈단신 악전고투 속에 일군 기적 같은 드라마였다.

이세돌 이후 한국 바둑, 중국에 밀려

1989년 조훈현 9단의 응씨배 우승을 신호탄으로, 한국 바둑은 마치 오랫동안 물을 기다려왔던 고기처럼 세계 무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조훈현을 선봉으로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로 이어지는 태극 라인업이 1993~94년 1회 진로배를 시작으로 응씨배, 동양증권배, 후지쓰배 등 8연속 세계 대회 우승을 거두며 2년 연속 세계 바둑을 천하통일했다. 한국 바둑의 기세는 2000년대 들어서도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2000년 8월 조훈현 9단이 후지쓰배를 다시 석권한 때부터 2003년 7월 이세돌 9단이 후지쓰배에서 우승하기까지 3년간 세계대회 20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한국 바둑사를 크게 구분한다면 조훈현 9단의 응씨배 우승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그 분기점이 1988년이다. 그렇지만 이세돌 이후 한국 바둑은 근래 중국 바둑에 밀리고 있어안타깝다. 한국 바둑도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어게인 1988! 응답하라 1988!’을 외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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