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를 만화가로 만든 ‘만화가 중의 만화가
  • 김병수 | 목원대 만화애니메이션과 교수·만화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1.12 13:03
  • 호수 137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고탁’의 아버지 故 이상무 화백…국산 만화 자존심 지켜
‘독고탁’의 아버지 故 이상무 화백의 발인식이 1월5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 연합뉴스

2016년 1월3일 이상무 화백의 별세 소식이 떴다. 1946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고(故) 이상무 화백은 1966년 잡지 ‘여학생’에 스승인 박기준 선생의 작품 <노미호와 주리혜>를 이어받으면서 데뷔했다.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만화작가로 ‘독고탁’을 주인공으로 한 야구 중심의 스포츠만화를 주로 창작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골프만화를 많이 창작했다.

‘독고탁’을 만나다

필자가 처음 이상무 화백의 작품을 만난 것은 1970년대 후반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소년신문을 구독해주었는데, 주인공 이름을 작품 제목으로 한 <독고탁>이라는 야구만화를 연재 중이었다. 매일 연재하는 작품이다 보니 그림의 밀도가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드라마틱한 구성이나 긴장감은 요즘 넘쳐나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훨씬 강렬했다. 독고탁이 던지는 마구의 향배는 손에 땀을 쥐게 하기에 충분했다. 연재 분량은 왜 그렇게 짧은지. 신문 연재는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에 독고탁이라는 캐릭터는 그 어떤 만화의 주인공보다 선명하게 새겨졌다.

나이를 먹으면서 만화잡지와 단행본을 통해 이 화백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비둘기 합창> <울지 않는 소년> <아홉 개의 빨간 모자> <달려라 꼴찌> 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울고 웃었다. 이 화백의 장기는 유머와 도전이다. 사고뭉치지만 쾌활한 성격의 독고탁은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달려가는 캐릭터였다. 산업화의 물결 속에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당시 우리 국민을 대변하는 데 가장 적합한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다.

이상무 화백을 직접 만나다

필자가 이상무 화백을 실제 만나게 된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다. 2000년대 초반 만화과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특강 뒤풀이에서였다. 운동선수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에 다부진 눈매가 독고탁을 쏙 빼닮은 인상이었다. 술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소탈하고 격의 없이 까마득한 후배, 만화가 지망생들을 대하는 모습에서 만화는 사람을 닮고 사람은 만화를 닮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대다수가 독고탁 팬이었기 때문에 필자까지 나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굳이 보탤 필요는 없었다. 묵묵히 앉아 뛰는 가슴으로 이 화백을 음미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두 번째 만남은 10여 년이 지난 최근의 일이다. 2015년 2월1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달려라 꼴찌>의 복간을 기념해 열린 전시회에서 이 화백의 소감을 들었다. ‘소년중앙’ 별책부록으로 1982년부터 연재됐던 <달려라 꼴찌>는 당대 최고의 인기 만화였다. 그날은 2000년대의 독자들을 새롭게 만나는 뜻깊은 자리였다. 그에 앞서 이상무 화백은 2013년 원고 3만 332점과 단행본 650권 등 약 3만1000점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기증했다. 69세에 불과한 나이였지만 평생의 작품을 정리해서 만화계 유산으로 일찌감치 물려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화백을 만난 것은 타계한 다음 날인 1월4일 상가에서였다. 마침 그 자리에서이 화백을 만화계로 이끈 박기정·박기준 두 형제 작가를 함께 뵈었다. ‘이상무’라는 필명을 지어준 박기준 화백은 수많은 제자 가운데 이 화백이 단연 최고였다고 회상했다. 박기정 화백은 스승보다 먼저 가는 못난 제자라며 넋두리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아쉬움, 회한이 잔뜩 서려 있었다. 이 화백은 ‘독고탁’만 남긴 채 너무 일찍 갔다.

독고탁과 이상무

‘독고탁’을 빼고 이상무 화백의 만화를 논할 수는 없다. 최근에는 그런 경향이 거의 없어졌지만,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대다수 작가는 자신의 페르소나와 같은 캐릭터들을 갖고 있었다. 김형배의 ‘훈’, 이현세의 ‘까치’, 허영만의 ‘이강토’ 같은 캐릭터들은 하나의 작품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작품에 출연하면서 독자들에게 각인된 캐릭터였다. 역할은 다양하지만 성격이나 말투, 스타일은 유사했다.

1971년 처음 등장한 ‘독고탁’은 1990년대 이후 골프만화로 전향하기 전까지 이상무 화백의 유일한 만화 주인공이었다. 독고탁은 단순한 만화 주인공이 아니라 이후 등장한 한국 소년만화의 표준 모델 같은 역할을 했다. 독고탁에게는 까치(이현세)의 비장함과 하니(이진주)의 도전정신, 둘리(김수정)의 사고뭉치적인 성격이 혼재돼 있었다. 소년만화 캐릭터의 집대성이자 뿌리였던 것이다.

가난하지만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보잘것없지만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늘 한계를 초월하는 모습을 보이며 결말을 맺었다. 외모나 가정환경 그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은 없지만 거침이 없었다. 수려하고 멋진 주인공을 두고 왜 이상무 화백은 ‘독고탁’을 만들었을까? 한 인터뷰에서 그것은 역발상의 결과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주인공의 머리를 빡빡 밀어서 개성을 강하게 표현했지요. 이름을 정할 때도 ‘성(姓)을 두 자로 하면 안 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두 글자 성 가운데 가장 센 발음이 나는 것을 택했고, ‘탁’이라는 이름도 동적인 맛을 적절하게 주기 위해 정하게 되었죠.”

세상에는 수많은 만화가가 있지만 ‘만화가 중의 만화가’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독자를 만화가로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무리 인기가 많고 돈을 많이 버는 작가라 할지라도 독자를 만화작가로까지 끌어들이는 힘은 아무나 발휘하기 어렵다. 어린이부터 만화가 지망생에 이르기까지 무진장 베껴 그리게 하는 그림체와 캐릭터를 가져야 한다. 쉽게말해 당대 최고여야 한다.

필자 나이 또래의 만화가들치고 당시 이상무 화백의 독고탁을 흉내 내보지 않은 작가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일본 만화의 홍수 속에서 국산 만화의 자존심을 지켜냈던 토종 캐릭터 독고탁은 이 화백이 떠난 빈자리를 후배 작가들과 함께 여전히 지키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