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 젊었다면 대통령 한 번 해보지 뭐. 하하”
  • 인터뷰 서영수 영화감독·정리 김회권 기자 (.)
  • 승인 2016.01.14 18:17
  • 호수 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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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영화배우→정치인…영화처럼 살며 사랑받은 배우 신영균

새로 연재되는 ‘서영수의 티타임’은 서영수 영화감독이 묻고 영화인이 답하는 와이드 인터뷰입니다. 때로는 배우를, 때로는 제작자를, 또는 감독을 초대해서 그들이 걸어온 길과 생각들을 축적하는, 일종의 ‘영화인 라이브러리’ 입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서영수 감독은 한국에서 1984년도 최연소 영화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현재 미국시나리오작가협회 정회원이면서 차(茶)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이 사람을 보면 그냥 ‘배우’ 같다. 신영균 (재)신영균예술문화재단 회장은 젊었을 때 정말 멋있게 생긴 배우였다. 선 굵은 얼굴이 증명하듯 남성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감독들은 “신영균이 아니면 안 돼”라고 고집을 부렸고 그래서 300여 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인기 배우이자 다작(多作) 배우다. 192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이제 89세다(해 바뀌기 전 인터뷰를 했을 당시에는 88세였다). 그런데도 블루톤이 살짝 나는 슈트에 흰색 드레스셔츠를 입고 영국식 윈저노트로 넥타이를 맨 그의 모습에는 빈틈이 없다.

한 인생에서 한 번 하기도 힘든 일을 그는 여러 개 했다. 서울대 출신의 치과의사였고, 잘나가는 연극배우였다가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배우가 됐고, 사업가의 면모도 보이더니 국회의원 배지도 달았다. “사업의 욕망이 있었다”고 고백하듯 그는 영화계에서 ‘재벌’로 불렸다. 하지만 그 재벌은 기부를 위한 재단을 만들었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에서는 예술인을 위한 상(아름다운예술인상)도 만들었고 장학 사업도 벌인다. 실제로 서울 명보극장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상당의 재산을 이미 2010년 기부했다. 정말 멋있는 할아버지다.

2015년 12월의 어느 날, 아직 추위가 덜 느껴지는 한낮에 신영균 회장을 만났다. 그와 만난 곳은 바로 올림픽대로가 눈앞에 펼쳐진 강동구 암사동의 한 그릴카페였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원래 신 회장이 살던 곳이다. 지금은 딸이 운영하는 이곳에는 얼마 전 이병헌-이민정 부부가 왔다 갔다고 했다. 알고 보니 결혼식 때 신 회장이 주례를 선 사이였다.

 

 

ⓒ 시사저널 임준선

서  고향이 북한이시다. 고향에 대한 추억이 많겠다.

 신  고향이 황해도 평산이다. 황해도에 유명한 분이 많다. 역사를 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도 황해도 평산이고 김구 선생도 황해도시다.

 서  서울에 온 건 언제인가?

 신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에 왔다. 그때는 해방되기 전이었는데 건너오는 데 불편한 건 없었다. 그런데 오고 나서 문제가 생겼다. 북한에서 농사짓고 쌀을 갖다 먹고 공부했는데 38선 때문에 막혀버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서  이번 ‘아름다운예술인상’에서 유아인이 상을 받았다. 유아인이 출연한 작품 중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

 신  두 작품 다 봤다. <사도>와 <베테랑>. 젊은 친구가 연기를 정말 잘하더라. 가능성 있고 인물도 좋고. 연기를 일단 열심히 한다. 패턴이 자연스럽다. 인물이 이쁘장하지만 카리스마가 있더라. 게다가 그 친구는 스물아홉 살밖에 안 된다. 나는 서른 살에 데뷔했다.

검객과 군인. 신영균은 남성미가 강한 배역에서 매번 당시 감독들의 캐스팅 우선 순위에 오른 배우였다. ⓒ 신영균 제공

 서  어떤 기록에는 29세 데뷔라고 나와 있더라.

 신  내가 29세에 결혼을 했고 30세에 서울 회현동에 치과 개업을 했다. 병원에 환자만 오니 갑갑하고 그랬는데 연극하는 친구들이 와서 연극 한번 하자고 자꾸 그러더라. 서울대 다닐 때 연극부장을 했었다. 그래서 명동 한복판 국립극단에서 연극 <여인천하>를 했다. 상놈 역을 맡았는데 양반들이 강에 가서 고사 지내고 그러니까 밥을 다 버리면 그걸 갖다가 먹는 그런 비참한 역할을 했다. 그러다 조긍하 감독의 <과부>라는 작품으로 데뷔했다.

 서  연기자로 성공할 수 있겠다거나 재능을 발견한 계기가 있었나?

 신  연극은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인정을 받았다. 대학교 다니면서 주연을 했다. 그러면 왜 내가 치과대학을 들어갔느냐. 연극을 하면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전국을 다니며 공연을 했는데 하루는 대전에서 공연이 끝나고 트럭 위에 세트를 바로 다 실은 뒤 대구로 갔다. 밤중에 가는 거다. 그래야 세트를 설치하고 바로 공연을 하니까. 그런데 그때가 겨울이었다. 트럭, 그때는 목탄차였다. 그 목탄차 위에 타고 가는데 눈 때문에 미끄러져서 자동차가 뒹굴었다. 그 당시 연극하는 사람들은 지방을 다닐 때 가족을 데리고 다녔다. 어린아이들까지 휘말리고 “여보!” 부르고 난리가 났는데 그 장면이 너무 비참했다. 아, 내가 연극배우만 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치과대학에 들어갔다. 대신 2년을 늦게 들어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2년 동안 연극하고 돌아다닌다고. 하하.

 서  그런데 평생 연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신  밥 먹기 위해 선택한 건 치과였고 하고 싶은 건 연기였다. 연기하겠다니 마누라가 반대하더라. 우리 와이프는 내가 치과의사인 줄 알고 결혼했지 딴따라면 안 했다는 거다. 보니까 그 당시 배우라고 하면 인기 생긴 다음 바람피우고 스캔들 나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속으로 걱정해서 반대했던 거야. 절대로 그럴 일 없다고 약속했다. 자랑 같지만 그 약속을 지켰다. 내년에 와이프와 결혼 60주년을 맞는다.

 서  결혼 50주년 때는 1억원을 기탁한 걸로 알고 있다.

 신  호텔에서 200~300명 초대해서 하는 것보다, 차라리 1000명과 나누는 게 낫지 않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밥 한 끼라도 대접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베풀고 기부해보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하다. 어떤 사람은 물어본다. 500억씩 기부한 거 어떠냐고. 내 재산 중에 나는 명보극장을 가장 아꼈다. 우리 시대에는 서울에 10개밖에 극장이 없어서 도저히 극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서  명보극장은 최고의 극장이었다. (영화 개봉 때) 저도 굉장히 어렵게 잡아서 들어간 기억이 있다.

 신  그 당시는 제작사가 지금처럼 기업이 아니라 장사꾼이었다. 이들이 인기 배우 신영균을 써라 그래야 장사가 되는 거다. 그래서 몇 편씩 겹치기 출연을 하게 됐다.

 서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을 만들고 나서 가장 아끼는 명보극장과 함께 제주도에 있는 박물관을 기부했다.

 신  당시 명보극장을 팔라는 이야기가 나오더라. 극장터가 재개발 지역이라 그랬다. 그래서 가족회의를 한 번 했다. 그랬더니 아들이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게 명보극장인데 그걸 팔면 영원히 없어진다”고 했다. 단성사도 그렇고 국도극장도 결국 없어졌다. 그리고 명보극장은 충무로 중심에 있다. 영화계를 위해서도 살리는 게 어떠냐고 아들이 말했다.

 서  명보극장이 이순신 장군 생가(生家) 터라고 하더라.

 신  맞다. 아주 역사가 깊은 곳이다. 매각하고 500억원을 만들어서 재단에서 쓰면 펑펑 쓸 수 있지만, 거기서 나오는 임대료로 재단을 유지하고 명보극장은 영원히 가야 한다 싶었다.

 서  대종상 1회, 2회, 4회 남우주연상 수상자셨다. 아름다운예술인상을 하기 2주 전에 대종상 시상식이 열렸는데, 이번 대회에 많은 수상자가 불참했다.

 신  대종상이라는 게 50년의 역사가 있다. 전에는 문화부장관이 직접 나와서 시상도 했다. 정부에서 이걸 관장해서 할 때는 괜찮았는데 진흥위원회로 갔다가 영화인협회로 갔다. 영화인협회는 영화인이 움직이는 단체인데 그 자체가 돈이 없다. 어디서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도 어렵고. 그러니 매번 스폰서 받느라 애를 쓰고 다니고 그러다 착오가 생기는 거다.

 서  심지어 없애자는 사람도 있더라.

 신  대종상을 일단 정부에서 다시 가져가든지, 다시 지원을 해주든지, 아니면 진짜로 믿을 수 있는 어떤 단체에서 맡아서 해주든지, 방법을 찾지 않으면 현재의 상태에서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전에는 TV 방송에도 시상식이 안 나왔다. SBS의 주요 주주로 있었을 때는 SBS에서 하다가 KBS에서 이어서 방송했다. 김인규 당시 KBS 사장이 많이 도와줬다. 그런데 지금은 KBS도 고민하고 있다더라.

 서  지금이 관(官)이 주도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이 영화제의 출발이 관이었으니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신  관에서 해줬으면 좋겠는데 기피하는 것 같더라. 오세훈 서울시장 때도 만나서, 부산에는 부산영화제가 있듯이 서울시에서 대종상을 맡아서 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부산영화제가 성공하니까 서울시에서도 뒤쫓는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랬는지 생각을 좀 더 해야겠다고 하더라.

 서  지금의 젊은 연기자들은 재테크에 밝아서 강남에 부동산 한두 채씩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선배님 시절에는 그런 걸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사업가로 성공했다. 어떤 비결이라도 있나?

 신  선배들을 보니까 고생만 하고 가더라. 그러니 그 후손들도 고생을 하더라. 난 사업에 어느 정도 취미라고 할까 욕망이라고 할까, 그걸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제과점도 하고 극장도 하게 됐다. 맨 처음에 돈 없을 때 금호극장 2번관을 샀다. 그때 500만원 정도였는데 같은 황해도 사람이 나에게 동업을 하자고 하더라. 그게 성공했다. 그때는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이니까.

ⓒ 시사저널 임준선

 서  예술인 복지 차원에서 강남에 집을 마련하는 걸 추진했다는 얘기도 있더라.

   영화배우협회 회장을 했을 때 당시 영화배우 중에 집 하나 없는 사람이 많았다. 근데 그때 서울시장을 내가 잘 알았다. 그래서 영화인들을 위해 대지를 하나 내줄 수 있느냐고 하니 강남에 5만평을 주겠다더라. 그때 강남은 배 타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내가 돈들 내라고 회원들에게 공문을 보냈다. 구봉서씨하고 몇 명은 냈는데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거 잘못하면 내가 욕먹겠다’ 싶어 결국 관뒀는데, 아마 그때 샀으면 큰 부자 됐을 거다. 하하.

 서  정치인(15~16대 신한국당(새누리당의 전신)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냈다)으로서 안타까웠던 점은 없나?

 신  나한테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치과의사, 정치, 사업, 배우 중에 뭐가 제일 하고 싶으냐고. 내가 가진 직업은 사실 다 좋은 직업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정치를 하고, 의사였고, 또 사업을 해도 사람들은 다 영화배우 신영균이라고 부른다. 역시 영화배우가 가장 좋다.

 서  20년만 젊었다면 정치를 계속했을까?

 신  아마 대통령 욕심이 있다면 했을 거다. 하하. 그런 의욕과 애국심, 그리고 포부를 가지고 해야 된다고 본다. 국회의원만 하고 말겠다고 하면 다른 일 하는 게 낫다. 근데 내 나이가 이제 곧 90인데 뭘. 하하.

 서  다시 해보고 싶은 배역이 있다면 뭘까?

   내 영화가 대략 300편이다. 특히 내가 열심히 해서 수상했던 작품이 있다. <연산군>이나 <빨간마후라>, 그리고 첫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상록수> 같은 작품.

 서  <빨간마후라>나 <상록수>의 역할은 반듯한 느낌인데, <연산군>에 대해 매력을 가지는 이유가 궁금하다.

 신  연산군이 폭군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이 폭군이 된 원인이 있다. 효자라서다. 어머니가 억울하게 사망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다. 폭군에 대한 포커스가 아니다.

 서  신필름(고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영화사)과 신영균을 정의 내린다면?

   신상옥 감독이 나에게 관심을 많이 줬다. 당시에는 전속제도라는 게 없었는데 전속으로 나를 묶었다. 그래서 영화계에서 난리가 났다. 나를 쓰고 싶어도 못 쓰니까. 그런 인연이 있다. 신 감독이 연출했던 <연산군>도 당시 대한민국 연기자라면 다 해보고 싶은 캐릭터였다. 그런데 신 감독이 중심을 잡고 끝까지 신영균이 해야 한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었다.

 서  연극을 했던 게 영화에 도움이 많이 됐을 것 같다.

   난 연극을 했기 때문에 연기 동작이 크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에서는 오버액션이라고 했다. 그런데 신 감독은 “연산군은 오버액션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 카메라를 대면 마음대로 움직이라고 한다. 그래서 연기자들이 편했다. <연산군> 주인공은 대사가 많다. 어머니를 처참하게 돌아가시게 만든 간신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는 장면 같은 게 있다. 그런데 옛날에는 동시녹음을 안 하니까 뒤에서 누가 불러주고 그러는데 그거 들으며 연기를 하면 집중이 안 된다. 그래서 난 다 외워서 했다. 어딜 가더라도 대본은 가지고 다녔는데 그걸 본 옆에 있던 선배 배우가 그러더라. “얀마, 왜 대사를 외우냐”고.

 서  선 굵은 연기를 많이 하다가 1969년에는 멜로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 번>에 출연했다. 공전의 히트를 했고 한국 멜로영화의 역사를 새로 썼다.

 신  나는 멜로보다 사극 같은 게 좋다. 그런데 당시 정소영 감독이 이건 꼭 신영균이 해야 된다고 하더라. 시나리오를 보니까 괜찮았다. 그 영화에 지금은 엄청 유명해진 김수현 작가가 관여했다. 연기자로 봤을 때 당시 김수현 작가가 잘 썼다고 본다.

 서  기회가 있다면 배우로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

 신  난 지금도 사극 중 좋은 작품이 있다면 해보고 싶다. 나이를 먹었지만 분장을 하면 보완이 될 거라고 본다. 그리고 내가 고향이 북한이니까 이산가족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해보고 싶다. 실감이 날 거 같아서. 액션도 관계없다. 하하하. 영화배우 중에서 내가 젊었을 때 말을 가장 잘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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