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장관 임명 후 두고두고 속앓이
  • 정리=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6.01.20 21:24
  • 호수 137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통령 ‘홀로 인선’의 함정…막판에 서둘러 넣고 빼다 보면 허점 불가피
박관용 전 국회의장 ⓒ 시사저널 임준선

1992년 12월19일, 제14대 대통령 선거 바로 다음 날이었던 이날 오전 하와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족한 잠 보충이 시급했고 그 못지않게 당선자 주변의 요란법석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하와이 공항에 도착하자 이내 한적한 이웃 섬으로 날아갔다. 그리곤 한 주일 내내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쌓인 피로를 대충 씻어낸 후 서울로 돌아오자 난리가 났다. 대선 기간 중 고락을 같이했던 최병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후일 한나라당 대표)이 뛰어와 ‘당선자가 당신 어디 갔는지 불러오라고 야단쳐 여러 사람 고생했다’며 빨리 YS를 만나보라고 했다.

선거가 끝난 지 열흘 만에 YS의 상도동 자택을 ‘방문’했다. 내가 상도동 자택을 찾은 것은 그날이 내 생애 두 번째다. 몇 차례의 선거 과정에서 ‘홍보위원장’을 맡아 그를 돕기는 했지만 자택과는 무관했다. 상도동 직계가 아니었기에 아예 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첫 방문은 1991년 전당대회에서 YS가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을 때다. 3당 합당 초기 나는 YS가 민자당 공천을 받을 가능성은 3%도 안 된다며 탈당까지 주도했었는데 결국 대선 후보 자리를 따냈고, 때문에 그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대통령 당선 후 처음 얼굴을 대하는 이날 YS의 환대는 정말 뜨거웠다. “아니, 으데 갔었노. 와야 할 사람은 안 나타나고 필요 없는 놈들만 득실대니”. 거실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민망스러워하는 표정들은 아랑곳없이 당선자의 치하가 이어졌다. 앞으로 YS의 직계 그룹으로부터 수십, 수백 차례 들어야 했던 “고생은 누가 하고 엉뚱한 X가 안방을 꿰찼다”는 시기와 질시의 예고편인 셈이었다.

“YS가 대통령 당선 후 맨 처음 함께 식사를 한 사람이 C 언론사 사주다. 당선자는 그 사주에게 선거 기간 중의 전폭적 지원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면서 당신과 내가 제일 수고가 많았다고 했다고 한다. 하기야 그게 아니라도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 최병렬의 귀띔은 이후 그대로 현실화됐다. 동갑내기 동기생이자 대선 때 각각 기획-홍보 위원장을 맡아 대선본부의 중요 임무를 수행했던 우리는 신속 대응을 위해 아예 같은 사무실을 쓰며 상황에 대처했을 정도로 절친했다. 나는 아예 그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들여놓고 상황을 정리했었다.<이때 곁에서 기획-홍보 위원장의 논의 사항을 정리하고 지침을 전달한 인물이 전병민이다. 전병민은 1993년 2월17일 YS 청와대의 정책기획수석으로 발표됐으나 고하 송진우 암살범의 사위라는 이유로 일부 언론이 문제 삼자 3일 만에 취소됐다>

차기 각료 예상자 이름이 분분하게 오르내리던 1993년 1월 중순 당선자가 홍대 앞 한정식집 동촌으로 불렀다. 고생한 사람들 밥을 사주나 싶어 갔더니 나 한 사람뿐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당선자가 입을 열었다. “비서실장으로 누가 적당할 것 같소?”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김덕룡 의원이 적임일 듯합니다.” “그 사람은 다른 할 일이 있고…당신이 하지.” “대통령을 모시려면 행정을 잘 알아야 하는데 저는 행정 경험도 없고, 오랫동안 야당만 해와서 파괴는 할 줄 알아도 건설은 모릅니다. 비서실장 하려면 금배지(국회의원)를 떼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빅3(국무총리·비서실장·국정원장)라고 말하지만 이름뿐인 총리보다 누구나 탐을 내는 정권 초기의 비서실장을 맡는 게 편치 않음을 모를 리 없는 나였다. 그럼에도 당선자는 “잘 생각해보라”며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 최병렬 등 가까운 지인들에게 자문을 구하면 한결같이 수락하라고 권유했다. 2월15일 밤 상도동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고 당선자를 만나니 “당신이 하라”고 했다. 거듭 사양하자 “대통령 명령”이라고 일갈했다. 사흘의 여유를 달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2월17일 아침 서교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카운터 직원이 “축하합니다”라고 했다. 차에 오르니 청와대 수석 인사 뉴스가 쏟아졌다. 권력의 세계에서 이건 축하받을 일이 아니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청와대는 더 이상 권부(權府)가 아닙니다.” 민자당사 앞에서 기다리던 보도진에게 내가 던진 첫마디였다.

어차피 맡은 비서실장이니 정말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30년 군사정권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문민 시대를 여는 만큼 할 일도 많았다. 그 우선은 역시 인사(人事)였다. 주지하듯 YS의 사람 욕심은 대단했다. 좋다는 인물이 있으면 꼼꼼히 따져보고 반드시 데려오도록 했다. 맨몸으로 세를 규합해 대권의 꿈을 이룬 YS에게 인사는 만사였고 그런 그를 지켜준 것은 언론이었기에 여론과 평판은 그가 결정을 하는 데 핵심 요소였다. 당선자 시절 YS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 찾기와 집권 초 개혁 정책 수립에 다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 비선 조직도 최대한 활용했다. 초대 황인성 총리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조각(組閣) 작업은 철저하게 YS 몫이었다. 청와대 수석 임명 때도 내가 거든 부분은 경제수석 정도다. 개혁을 위해서는 학자 출신인 박재윤 교수가 관료 출신인 한이헌보다 낫지 않겠느냐는 정도였다. 문제는 보안을 특히 강조하다 보니 에러가 나게 마련이라는 사실이었다. YS는 장관 후보자를 불러 식사를 함께하면서 “얘기가 새나가면 없던 일로 하자”는 다짐을 잊지 않았고 그를 떠나보낸 후 전화를 걸어 재다짐을 받기도 했다. 안기부장(국정원장)이 막판 김덕 외대 교수로 바뀐 것은 대표적 사례다. 또 여론을 중시하다 보니 의외의 패착은 불가피했다. 주위의 진언에 귀를 기울이지만 일단 필(feel)이 꽂히면 막무가내인 점도 흠집을 내게 만들었음은 부인키 어렵다.

“자, 명단을 보면서 의견을 얘기하지.” YS가 그간 정리해놓은 각료 명단을 탁자 위에 펼쳤다. 양복 안쪽 포켓에서 이름 몇몇이 적힌 쪽지도 추가로 꺼내면서 낙점 배경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내무장관에 김XX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선거 때의 공은 인정하더라도 ‘모양새’가 아니라고 했다. “국민이 웃습니다.” “그래요?” 여론에 민감한 YS다웠다. “그러면 누구로 하지?” “경찰 총수 출신으로 당 사무차장인 이해구가 어떤지요?” “좋지.” 애당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유흥수 의원이었지만 나와 경남중 동창이라는 시비가 우려돼 유사 경력자인 이해구 차장을 추천했는데 선선히 수용됐다. 발표 당일 새벽 1시가 지나서야 본인에게 통보된 이유다. 현철의 ‘냄새가 물씬 밴’ G부 K 장관은 일단 넘어갔다. “각하 총무처장관에 S 의원은 곤란합니다. 정부 살림을 도맡은 부서라서 엄청 바쁜데 지역구 관리에만도 분주한 의원 겸직 장관이 하기는 어렵습니다. 임명장·상장 수여식에도 배석해야 합니다.” “그럼 누구로 할까?” “최창윤 총재비서실장 어떻습니까?”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적당한 자리가 없어 고민했는데.”  “체신부장관도 그렇습니다. 요즘 체신부 업무가 우정 사업이 아닌 전무(電務) 중심인 만큼 윤동윤 차관을 승진시키는 게 나을 듯합니다.”  “그렇게 하지.”

이렇게 최종 검토 작업이 끝날 즈음 공석(空席)이 발견됐다. 각료 발표 때 빠질 수 없는 국가보훈처장이 아예 누락된 것이다. “남재희 의원이 어떨까요? 인품과 학식이 훌륭하고 고생도 많이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요, 실장이 승낙을 받아 와요.”

 

이제는 고인이 된 김영삼 대통령(왼쪽)과 이야기 중인 박관용 비서실장. ⓒ 연합뉴스

마지막 서울시장 대목에서 YS 특유의 고집이 발동했다. “서울시 예산 규모만 해도 그렇고 종합 행정을 하는 자리인데 시민운동만 해온 사람은 곤란합니다.” YS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냐, 잘할 게야.” 이랬던 40대 나이의 김상철 시장 후보자는 그린벨트 훼손 시비에 휘말려 임명된 지 일주일 만에 하차해야 했다. 이것으로 조각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남재희 의원 자택을 방문, 보훈처장 수락을 권고하자 남 의원은 손사래를 쳤다. 상이용사 등이 수시로 항의를 하고 들이닥치는 자리이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민간인이 아니라 군 장성 출신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맞다 싶었다. 부랴부랴 돌아와 당선자와 협의해 당초 비상기획위원장에 내정된 이병태 전 호놀룰루 총영사로 대체했다. 그래서 비상기획위원장은 아예 공란이 됐는데, 아무도 지적을 하지 않아 흐지부지 넘어갔다.

자칫 본인의 명예에 누가 될 수도 있음에도 흘러간 조각 비화를 회고하는 것은 각료 인선의 엄중함을 말하기 위해서다. 당시 김 시장 외에도 박희태 법무부장관, 박양실 보사부장관 등이 조기 하차했는데 YS가 그토록 꼬치꼬치 캐고 따져봤는데도 그랬다. YS 정부의 경우 하나회 숙정, 금융실명제 도입 등 일련의 개혁 시책으로 집권 초반의 기틀을 닦았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새로 출범하는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게 분명하다. 인선의 엄밀함은 당연함에도 여러 정권, 최고 지도자의 간과 내지 핵심에서 비켜나 있다.

앞서의 이병태 보훈처장 부분은 특히 곱씹어볼 대목이다. 그는 10개월 후 제31대 국방부장관으로 영전됐는데 그가 꼭 1년 동안 장관으로 재임한 1994년은 20여 년이 흐른 지금껏 한국 안보의 최대 취약점으로 지적되는 ‘북한 영변 핵시설 폭격’ 소동이 있던 해다. 비단 국방부장관 개인의 ‘하자’ 때문만은 아니라 할지라도 대통령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국방 책임자의 존재는 불행을 키웠고, 그 씻을 수 없는 후유증은 이 나라에 멍에가 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어장관’(어쩌다 장관)에 임명한 그를 갈아치우지도 못한 채 “저 XX”라는 욕설로 답답함을 달랬다. 대통령의 군부대 시찰 때 배석조차 못했던 국방 책임자가 존재한 딱한 사연과 헷갈리는 ‘북핵 폭격 파동’ 전말은 나라 장래를 위해서도 반추해야 한다.

 

이 시대 최고의 議會人…현대 정치 산증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생존한 최고 원로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정일권 이후 이른바 빅3(국무총리·비서실장·국정원장) 출신으로 국회의장을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다. 김영삼·김대중·김종필 3김 시대가 막을 내린 오늘날 현대 정치를 제대로 증언하고 그 반성의 토대 위에서 우리 정치가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드문 합리주의자일지 모른다. 정치가 국민적 비판을 넘어 매도와 포기 지경에 이른 오늘이기에 그의 존재는 더욱 소중하다.

그는 한 지역구(부산 동래)에서 내리 6선을 했다. 의회인(議會人)을 자임할 만하다. 6선을 하는 동안 같은 정당 소속으로 선거를 치른 적이 없는 사실도 굴곡진 한국 정치사를 웅변해준다. 오랜 야당 생활을 거쳐 문민정부 청와대의 비서실장, 집권당(한나라당) 사무총장·부총재·총재권한대행을 지내고 국회의장을 역임한 족적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야당 출신으로 제16대 후반 국회의장에 있을 때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의사봉을 잡았던 그는 “최선은 아니었지만 이 나라 의회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했다”고 외쳤었다. 그런 그이기에 지금의 어지러운 정치판을 더욱 안타까워한다. 시사저널은 포스트 3김 이후의 나라 장래를 위해 그의 귀한 경험 공개를 요청했다. 통일 문제까지를 포함해 국정을 직접 연출하고 조율도 한 그의 기억과 자료를 값지게 사용해달라고 간청했다.

회고록 1부는 ‘YS 정부 인사 비화’ ‘북핵’ ‘현철씨의 국정 농단’ 등을, 제2부에선 ‘이회창 등장과 대선’ ‘YS와 DJ’ ‘노무현 정부 출범’ 등을, 제3부에선 ‘MB(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출현 전야와 갈등’ 등을 다룬다. 증언에는 생존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기에 회고록 전개 형식은 달라질 수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