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지상파의 ‘응답’이 필요한 시점이다
  • 하재근 | 대중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1.25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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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시장 판도를 재편한 <응답하라 1988>…케이블이 지상파를 넘어서
ⓒ tvN

tvN의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이 케이블TV 역대 시청률 기록을 경신하며 지난 1월16일 종영했다. 마지막 회가 유료 플랫폼가구 평균 시청률 19.6%, 순간 최고 시청률 21.6%를 기록한 것이다. 이전 기록은 <슈퍼스타K2>(Mnet)가 기록한 평균 18.1%, 순간 최고 시청률 21.2%였다.

시청률 말고도 <응팔>은 많은 기록을 남겼다. 지상파 프로그램들을 제치고 6주 연속 콘텐츠 파워지수 1위에 올랐는가 하면,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이 집계한 TV 화제성 드라마에서도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그동안 케이블 프로그램의 광고 단가는 지상파보다 낮았지만, <응팔>은 지상파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무한도전>(MBC)과 같은 수준의 광고료를 받았다고 한다. 광고는 물론 완판됐고, 주문형 비디오 매출까지 합쳐 총 220억원 규모의 수익을 거둬들였다. 이 또한 역대 케이블 최고 기록이다.

케이블판 ‘주말 가족드라마’로 자리매김

출연진들의 광고 출연도 잇따랐다. 이 작품으로 인해 출연진이 찍은 광고만 무려 55개에 달하며, 이 숫자는 프로그램 종영 후에 더 늘어나고 있다. 여주인공인 혜리의 경우 이 작품으로 모델료가 두 배로 상승하며 60억원 정도의 광고 매출을 올렸다. 네티즌의 언어생활도 바꿨다. 1980년대 유행어였던 ‘웬뇰’이 다시 살아나 ‘웬열’로 쓰이고 있다.

산업계에도 파급 효과가 있었다. 프로그램 방영 중에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의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5% 증가했다고 한다. 가나초콜릿, 치토스, 빠다코코낫비스켓, 꼬깔콘 등의 매출도 늘어났다. 크라운맥주도 다시 출시됐고, 떡볶이 코트, 페이크 목폴라 등의 복고 패션 상품도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 삽입곡들도 잇따라 히트했고, 이미연이 찍었던 가나초콜릿 광고나 한석규가 찍었던 빈폴 광고, 이종원의 리복 광고 등이 그대로 다시 제작됐다. 그야말로 각계에서 ‘응팔’ 광풍(狂風)이 분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처음에 <응답하라 1997>(응칠)로 시작됐다. 그리고 <응답하라 1994>(응사)를 거쳐 <응답하라 1988>(응팔)에 이르렀다. 1997년에서 시작해 현대로 온것이 아니라, 점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점점 더 많은 연령대의 시청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1980년대는 1990년대보다 확연히 옛날처럼 느껴진다. 연탄불, 석유곤로 등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년층 시청자들까지 <응팔>에 빠져들었다.

이전 ‘응답하라’ 시리즈는 청춘남녀의 러브라인에 집중했지만 <응팔>은 달랐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1980년대 골목길을 재현한 세트를 지어놓고, 그곳에 이웃으로 사는 다섯 집의 이야기를 담았다. 러브라인을 넘어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에 집중한 것이다. 그 전까지 ‘응답하라’ 시리즈가 마지막 회에 여주인공의 남편을 공개하면서 끝을 맺었다면, 이번엔 마지막 회가 되기 전에 미리 남편을 공개한 것도 작품의 무게중심이 러브라인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 tvN

<응팔>의 진정한 주인공은 골목이었다. tvN은 이 옛날 골목을 수십억의 예산을 퍼부어 만들었다. 이제는 사라진 골목문화를 재현하는 데에 공을 들인 것이다. 요즘은 골목길이 자동차로 가득 차고, 골목길 너머에 누가 사는지도 잘 모른다. 과거엔 골목길에 사람이 있었고, 골목길 너머 이웃 간에 교류가 있었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골목길 평상(平牀)이다. 주인집, 셋집, 큰집, 작은집 할 것 없이 평상에 모여 앉아 수다도 떨고 때론 크라운맥주도 함께 마셨던 그 시절의 정취가 그려졌다. 과거 저녁때만 되면 어머니들은 골목길에 대고 밥 먹으라고 크게 외쳤고,그러면 아이들이 어디에선가 나와 자기 집을 찾아들어가곤 했다. 그런 풍경도 재현됐다. 이처럼 아련한 풍경이 중년층을 확실히 불러들였고, 이 작품은 일종의 케이블TV판 주말 홈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윗세대 시청자를 확보하면서 젊은 층 시청자도 물론 놓치지 않았다. 1980년대는 1990년대와 더불어 대중가요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대다. 그때의 가슴 저리는 노래들에 젊은 시청자도 공명했다. 무엇보다도 ‘응답하라’ 시리즈만의 전매특허인 순수한 첫사랑과 ‘남편찾기’ 게임이 이번에도 통했다. 다만 제작진이 너무 반전에 신경 쓰느라 그랬는지, 마지막에 엉뚱한 사람이 남편으로 귀결돼 시청자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만약 이 무리한 반전만 없었다면, 순리대로 남편이 정해져 시청자의 로맨스 판타지를 충족시켜줬다면, <응팔>은 마지막 회 평균 시청률 20%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웠을 것이다. 억지 반전 스토리 때문에 케이블TV 시청률 20% 돌파 기록은 다음 기회로 넘겨졌다.

<응답하라 1988>의 기록적인 인기는 단순히 한 드라마의 히트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지상파의 기득권이 완전히 붕괴됐음을 확인해준 사건이다. 그 전부터 젊은 시청자들이 지상파를 이탈하고 tvN의 ‘응답하라’ 시리즈나 <미생> 등에 호응을 보내면서 지상파의 위기가 이어졌는데, 이번에 중년층으로까지 시청자층이 확대되면서 케이블TV 드라마의 입지가 확실히 다른 차원으로 올라섰다.

지상파의 기득권 완전 붕괴 확인시켜

그동안 tvN에선 ‘금토 드라마’만 주목받았었지만, 요즘은 ‘월화 드라마’인 <치즈 인 더 트랩>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리하여 젊은 층 사이에선 tvN이 ‘신흥 드라마 왕국’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드라마 왕국은 과거 MBC가 들었던 호칭이다. 김혜수·이제훈의 컴백작인 <시그널>과 고현정, 노희경 작가의 컴백작도 tvN에서 방영된다. 이젠 톱스타들이 지상파와 케이블TV를 나란히 놓고 선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응팔>은 지상파 드라마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을 선보였다. 지상파는 스타에 의존하지만, <응팔>은 신인을 캐스팅해 스타로 키워냈다. 지상파는 ‘악녀’ ‘복수’ ‘신데렐라’ 등이 난무하는 극단적인 구도에 의존하지만, <응팔>은 악인도, 신데렐라도 없는 골목길 이웃 스토리로 성공을 일궈냈다.

단지 시청률 수치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기존 드라마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참신한 구도를 선보인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지상파는 <미생>의 충격으로 인해 변화를 모색한다고 했었지만, 최근 방영되는 작품들을 보면 여전히 과거의 흥행 공식에 안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황 변화에 응답을 거부한 셈이다. 그사이 케이블TV가 쑥쑥 자라 이젠 지상파 턱밑까지 치고 올라갔다는 것을 <응팔> 신드롬이 보여줬다. 지상파의 응답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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