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실제 위기 상황에선 한갓 무기력한 약소국 정부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6.01.28 18:57
  • 호수 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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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영변 핵시설 폭격’ 공식 통보 없었다”

믿기 싫지만 우리는 북한에 덜미를 잡혀 있다. 북한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모두가 쉬쉬하며 말을 아끼지만 이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들 짐작하듯이 그네가 지닌 핵(核) 때문이다. 지난 1월6일 원자폭탄 위력의 수백 배에 달하는 수소폭탄 실험이 이뤄진 이후 이런 현실은 더욱 분명해졌다. 제4차로 불리는 북한의 이 핵실험이 성공이니 아니니 하는 논란은 웃기는 얘기다. 가공할 핵무기 보유가 시간문제일 뿐인 마당에 이는 죄다 부질없는 자위조(自慰調)의 공론에 불과해서다. 

 

북한의 대외 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최근 홈페이지에 ‘고슴도치의 가시창(槍)’이라는 제목으로 12분짜리 애니메이션을 올렸다. 작지만 단단한 ‘가시창(핵무기)’을 지닌 고슴도치(북한)가 호랑이(미국)를 물리친다는 비유가 섬뜩하게 와 닿는 게 우연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에도 강력하고 실효성 있는 조치들이 도출되지 못한다면 5차, 6차 실험을 해도 ‘국제사회가 자신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주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는데, 딱하게도 박 대통령의 부정적 전망이 맞아떨어질 가능성은 농후하다. 

 

이런 한심한 사태는 미국을 나무랄 것도 없이 북핵에 대한 역대 우리 정부의 오판과 패착이 어우러져 쌓인 산물임은 물론이다. 보수 진영은 제15대 김대중(DJ) 정부의 ‘햇볕정책’ 결과라고 책임을 미룬다. 북한에 대한 퍼주기가 핵개발에 필요한 돈과 시간을 지원해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핵 우려에 대해 ‘통일되면 결국 우리가 핵을 갖게 되는 셈인데 무슨 상관이냐’는 황당한 반박 논리까지 들이대지 않았느냐는 얘기다. 맞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DJ 정부에 앞서 김영삼(YS) 정부는 북한의 핵 야욕을 뿌리 뽑으려는 미국의 시도를 차단했다. 국가원수가 수십만 명의 인명 살상과 천문학적 재산 피해를 걱정해 미국을 제지한 것은 백번 맞지만 ‘무력 포기’ 카드를 내보임으로써 핵을 체제 유지의 마지막 보루로 믿는 북한에 확신을 줬다.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맞닿은 북한은 이후 체제 유지에 대한 불안을 떨치고 핵개발에 매진했다. 그들 체제 특성상 미국의 경제 제재는 ‘불편’을 주었을 뿐이고 중국의 원조 등으로 고비를 넘겨 오늘에 이르렀다. 통일이라고 하면 남한이 북한을 접수 내지 흡수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온 한국인들이다. 하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은 게 아닌 지경에까지 이른 지금이다. YS를 보좌했던 박관용 비서실장의 당시 회고는 이렇다.

 

 

전면 전쟁 일보 직전까지 치닫던 1994년 위기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중재로 화해 무드로 급선회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돌연한 사망과 한국 정부의 조문 금지 조치 및 비상사태 선포로 다시 얼어붙었다. 김 주석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긴급국무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각료들. ⓒ 연합뉴스

 

“5월18일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 주재의 국가안보회의(NSC)가 열렸다. 영변 핵이 최종 확인된 데 따른 것이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폭격을 위해 2개 항공모함을 비롯한 기동함대의 한국 근해 진출 등을 보고했다. 페리 장관과 캐슈빌리 합참의장의 보고를 받은 클린턴 대통령은 폭격 시 북한의 예상 반응을 물었고 페리 장관은 주한 미8군 게리 럭 사령관의 보고를 인용, 개성 일대에 포진한 장사포 등으로 용산 등지에 포격을 가해올 것이며 100만명의 인명 피해가 날 것이라고 보고했다.”

 

YS의 거친 항의에 클린턴 美 대통령 당혹

 

박 전 실장은 미국 측이 이런 정도의 북핵 대응과 관련한 움직임을 알려주긴 했지만 부분적인 것이었다면서 북핵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가진 정보는 사실상 전무했다고 토로한다. 특히 북한이 IAEA(국제원자력기구) 탈퇴를 선언하면서 사태가 급변하던 6월14일 즈음에도 어떤 공식 결정 사항을 통보받은 바는 없다고 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 핵시설을 영상정보로만 감지했는데 박 전 실장은 “미국도 휴민트(인적 정보)를 통한 확인이 안 됐기 때문에 한국 측이 수집해 건네준 흙 성분 분석이 판단의 결정적 요소였다”고 했다. 그는 한국이 무기력했음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으면서도 YS에 대한 비판자들이 YS가 사태만 악화시켰을 뿐 제 역할을 못했다는 지적은 반박한다. 특히 YS와 클린턴 대통령 간의 통화기록 자체가 백악관에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청와대 긴급 대책회의 이틀 후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이 청와대로 뛰어와 대통령에게 급보를 전했다. ‘미 대사관 가족 등 주한 미국 민간인들의 소개(疏開)가 추진’되고 있다고 했다. 소개가 전쟁 직전의 준비 단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당시 시중에는 쌀과 음료수 사재기가 한창이었고, 일부 ‘가진 자’들의 해외 도피가 실제 이뤄지고 있었다). 설마 하다가 아연(啞然)한 YS는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를 부르라고 했다. 민심 동요를 우려해 대사 차량에 성조기를 달지 말고 청와대에 들어오라는 주문까지 했다. 사태의 급박함을 절감한 YS는 백악관과의 핫라인 연결을 지시했고 통화가 되자마자 ‘나와 상의 없이 어찌 전쟁을 하려 드느냐. 나는 단 한 명의 한국군도 동원하지 않겠다’고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당혹스러워하며 ‘한국 대통령과 협의 없이 어떻게 전쟁을 하느냐’고 답변했다.” 클린턴의 ‘당혹’과 관련해서는 YS의 저돌적인 ‘무대뽀’식 항변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최종 결정이 이뤄지지 않은 사실에 대한 상대국 대통령의 항의 때문인지 여부 등은 불확실하지만 YS가 1994년 6월의 상황에서 클린턴에게 항의 전화를 했고, 이후 북핵 처리 방안에 ‘무력 사용’이 거의 배제된 것만은 분명하다(이것이 북한에 무한 핵개발 의지를 고취시켰는지는 차치하고).

 

전쟁 의미하는 미국의 민간인 소개 계획 몰라


원체 민감한 사안이니만큼 전후를 더 따져봐야겠으나 갑갑한 것은 한국 정부가 국가 안위가 달린 지경에서도 제 역할을 못했다는 점이다. 그 자체가 전쟁을 의미하는 ‘민간인 소개’ 때도 그랬다.

 

“레이니 대사가 찾아와 ‘주한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떠나라고 했다’고 했다. 엄중한 일임에도 ‘지나가는 투’로 그랬다. 군사와 무관한 민간인들을 상황에 대비해 철수시키는 것은 미국 정부의 SOP(standard operating procedure)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발표할 생각이라고도 했다(찰스 카트만 부대사도 철수 대상을 꼽아보니 워낙 숫자가 많아 문제라고 언명한 바 있는데 그는 1993년 8월 부임 직후 비전투요원 소개 작전(NEO) 계획을 수립했다).” 정종욱 당시 외교안보수석(DJ 정부 중국대사)의 회고다. 박 전 실장과 약간 다른 구석이 있지만 약소국의 허망한 위상을 말하는 대목은 일치한다.

 

YS 대북 정책에서 비판받을 부분은 대책 없는 오기와 자만심이다. 상대를 강하게 몰아세우기는 했지만 막상 실제 상황에서는 무기력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1994년 6월의 위기를 넘긴 후 YS의 빗나간 대북 인식은 극에 달했다. 2000년 이전의 남북통일, 아니 자신의 재임 중 닥칠지도 모를 통일을 걱정함으로써 온 국민에게 잘못된 환상을 각인시켰다. 북한 위협에 대한 불감증 심화는 ‘무력 제재 포기’를 확인한 북한이 ‘안심하고’ 핵개발에 나서도록 만든 것 못지않게 위중한 과오일 수 있다.

 

 

영변 핵시설 정밀 폭격 추진 前夜  

미국 국방부는 1994년 초 북한의 플루토늄 10kg 보유 확인과 5월4일 핵물질 추출에 이어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하자 무력 사용 불가피로 선회했다. 선전포고로 본 것이다. 한반도에 패트리어트 미사일 포대, 북한의 생화학 무기 공격에 대비한 NBC 화생방 방호부대, 1000여 특수전 병력을 배치했고 1개 기갑사단의 무장에 필요한 아파치 헬리콥터 1개 대대와 에이브럼스 탱크 등을 수송해놓았다. 이를 직접 운용할 사단 병력만 본토에서 공수하면 즉각 전투태세 돌입이 가능하게 된다. 항공모함에는 정밀 폭격을 위해 크루즈 미사일을 탑재한 F117스텔스 전폭기 수십 대가 실렸다. 이는 북한의 침공 시 이를 격퇴하기 위해 한·미 양국이 공동으로 수립해놓은 ‘작전계획 5027’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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