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 갈 곳 없는 취준생들
  • 이예원 인턴기자 (.)
  • 승인 2016.02.04 11:40
  • 호수 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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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마련한 ‘명절 대피소’로 피신…시급 센 ‘단기 알바’ 나서기도

서울 소재 사립대 졸업을 앞둔 김승혜씨(가명·26)는 이번 설날에 고향인 대구 방문을 포기했다. 지난해 하반기에 지원한 대기업 신입사원 공채에 전부 떨어져 ‘취업 재수’를 하는 마당에 가족과 친척들의 얼굴을 보기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다. 김씨는 “취업에 성공했으면 기쁜 마음으로 가겠지만, 지금은 차마 어른들께 세뱃돈을 받을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민족 대명절인 설날이 다가오는 가운데 김씨처럼 가혹한 취업난에 시달리는 취업준비생들이 느끼는 명절의 온기는 훈훈하지만은 않다. 이번 설날은 앞뒤로 주말과 대체휴일까지 있어 연휴가 5일간이나 이어지지만, 취업준비생들은 기쁘기보다는 부담만 더 느낀다고 토로한다. 최근 취업 포털 사이트 잡코리아가 성인 남녀 240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구직자(72.7%)가 기혼 여성(71.6%)을 제치고 설날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느끼는 집단인 것으로 나타났다.

1월14일 서울 노량진의 한 학원에서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공부 흐름 끊길까 ‘스터디’ 그대로

취업준비생이 느끼는 명절 스트레스는 얼어붙은 청년 취업 현장의 현실을 반영한다.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2015년 12월 및 연간 고용 동향’에 따르면, 2015년 연간 청년층(15~29세) 실업률은 9.2%로, 1999년 통계 기준이 변경된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체감 청년 실업률은 이보다 훨씬 높은 20~30%대에 이른다는 말이 나온다. 취업준비생에게는 눈앞에 닥친 취업이라는 벽으로 인해 명절에 가족과 보내는 휴식마저 ‘사치’가 되고 있다.

많은 취업준비생이 하는 취업 스터디는 명절이라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취업 스터디는 보통 4~6명 정도가 함께 진행하는데, 스터디원 대다수가 가족과 시간을 보낼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아 스터디가 설 연휴에도 대부분 차질 없이 진행된다. 서울 강남역에서 매주 월·수·금요일에 다른 3명과 함께 어학 스터디를 하는 대학생 조민재씨(가명·28)는 “설날 당일은 물론 대체휴일에도 기존과 같은 시간에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며 “내 코가 석 자인 취업준비생에게 명절은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연휴 기간에 직접 모이기 힘든 경우 ‘화상 스터디’를 하기도 한다. 고향에 내려가기는 하지만 스터디를 아예 안 하면 불안하다는 이유에서다. 언론사 입사 스터디를 하는 민동우씨(가명·27)는 설에 고향인 부산에 가게 돼 설 연휴 기간에만 스터디원들과 화상 스터디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민씨는 “월요일에는 시사상식 퀴즈를 함께 푸는 날인데, 명절이라고 쉬면 공부 흐름이 끊길까 봐 불안하다”며 “화상 채팅으로 같은 시간에 평소처럼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집에 있기가 꺼려지는 취업준비생들은 스스로를 ‘떠돌이’라고 자조하며 명절에 떠날 곳을 찾아 나선다. 이들은 설날에 가족들과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마음이 불편해 어디라도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취업준비생 윤성준씨(28)는 평소 집에서 인터넷 강의를 수강하며 공부하는 편이지만 이번 설 연휴에는 도서관으로 ‘피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추석에는 집에서 친척들과 시간을 보냈는데, 친척들로부터 받는 질문이 부담스럽고 스트레스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윤씨는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다들 ‘요즘 뭐하니’ ‘취직 안 하니’ ‘공무원시험 봐라’ 등 한마디씩 하시는데 계속 듣고 있자니 힘들었다”며 “이번에는 근처 도서관이나 카페에라도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집 떠나 ‘명절 대피소’ 찾기도

이 같은 현상이 학원가로 확산돼 취업준비생을 위해 ‘명절 대피소’라는 이름의 자습실을 개방하는 곳도 있다. 파고다어학원은 연휴 기간에 설날 당일을 포함한 3일간 전국 8개 지역에서 ‘명절 대피소’를 운영한다. 지난

명절 스트레스를 받는 취준생들은 연휴에 집을 떠나 피신할 장소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 시사저널 고성준

해 추석에 이어 두 번째다. 취업준비생들에게 어학원 내 자습실을 개방하고, 빵과 음료 등 간식도 제공한다. 해당 어학원의 홍보 담당자는 “명절에 집에 있기 싫거나 공부할 공간이 마땅치 않은 학생들을 위해 학원의 공간을 활용해 대피소를 마련했다”며 “지난해 추석에 1000명 이상이 방문했는데 이번 설에는 더 많이 올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부 취업준비생은 설 연휴 기간을 맞아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한다. 취업 준비로 소요되는 학원비와 어학시험비 등이 부담돼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다. ‘특수 알바 시즌’으로 분류되는 설 연휴 기간은 시급이 평소보다 높게 지급되거나, 하루 일당이 현장에서 현금으로 지급되는 경우가 많아 경제적으로 궁핍한 취업준비생에게 좋은 기회가 된다. 설 연휴 기간 중 3일간 집 근처 농산물 마트에서 단기 알바를 할 계획이라는 김민철씨(가명·28)는 “토익시험 응시료만 해도 한 번에 4만원이 넘으니 취업 준비에 돈이 너무 많이 든다”며 “설 단기 알바는 시급이 세서 놓치기 아깝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매년 되풀이되는 가혹한 취업 현실이 가족과의 유대마저 약화시킨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전문가들은 취업준비생 주변의 가족이나 친척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소영 용산구 정신건강증진센터 팀장은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취업준비생은 심리적으로 옥죄인 상황에서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계속 느낀다”며 “주변에서 이들을 감시한다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격려와 지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갈수록 악화되는 취업난에 이제는 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각종 제도를 만들고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는 있지만 청년들이 체감하는 취업난은 점점 더 혹독해지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은 “지금까지 정부는 취업난이라는 증상을 잠깐씩 경감시키는 처방만 해온 셈”이라며 “중소기업의 경쟁력 확보, 최저임금 인상 등 청년 노동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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