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빈말에는 '뼈'가 있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6.02.24 17:43
  • 호수 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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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서 인기몰이 중인 ‘허언증갤러리’가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

“편의점을 갔다 오다가 목성이 떨어져 있기에 얼른 주웠어. 첨엔 그냥 돌인 줄 알았는데, 혹시나 해서 하늘 보니까 목성 자리가 비어 있더라. 인공위성이나 별똥별은 주워봤는데 행성은 처음 줍는다. 일단 냉장고에 넣어놨는데 행성 주워본 적 있는 사람 있으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좀 알려주라.”

마블(Marvel)의 ‘갤럭투스’(마블 캐릭터 중 행성 파괴자로 잘 알려진 캐릭터)는 멀리 있지 않았다. 이 땅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방구석에 앉아 주워온 목성을 쳐다보며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생각하고서는 갤러리에 다른 행성 지배자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적어놓았다. 곧바로 댓글이 달린다. “그거 아이스박스에 넣으면 개쩔 걸요?” 숨어 있던 다른 갤럭투스들이 등장해 저마다 목성 경험담을 늘어놓는다.

행성도 주워올 정도니 어지간한 건 일도 아니다. 자신이 사실은 워런 버핏이라는 자기 고백의 글이 올라오고, ‘응팔’의 덕선이로 지금은 가장 핫한 스타가 돼버린 걸스데이의 혜리가 자신을 계속 쫓아다니며 사귀자고 한다고 한탄아닌 한탄을 늘어놓는다. “춰는 스티브좝스입네다.” 이미 작고한 스티브 잡스가 부활해 커밍아웃을 하는 곳이다.

진실을 말하면 안 되는 곳이 공감을 얻다

온갖 거짓말의 향연으로 도배돼 있는 이곳은 대표적인 온라인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의 ‘허언증갤러리’다. 요즘 주요 커뮤니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글이 바로 ‘허언증갤러리 근황.jpg’이다. 허언증갤러리는 지난 1월21일 디시인사이드의 메이저 갤러리로 승격됐다. 1월13일 마이너 갤러리로 시작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정식 갤러리가 됐다는 이야기인데, 그만큼 ‘핫’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진실은 개나 줘버려야 하는 쓸모없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안 되는 웃기는 게시판이다. 댓글도 역시 빈말이거나 거짓말이거나 말도 안 되게 과장돼야 한다. 안 그러면 “노잼이네~”라는 비아냥만 실컷 받고 올 것이다. 한마디로 웃기고 황당한 곳이다. 디시인사이드에서 ‘유식대장’으로 통하는 김유식 디시인사이드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이런 놀이는 인터넷 초창기부터 있었는데 허언증(虛言症)이라는 키워드로 카테고리화한 것은 처음이다. 속았다는 느낌에 허탈하지만 내가 더 속이고 싶다는 욕구를 들게 하는 시스템이다.”

도대체 어떤 황당한 말들이 떠돌아다니는지, 허언증갤러리의 주요 드립들을 구경하고 싶은가. 그러면 포털 사이트에서 ‘허언증갤러리 레전드’를 검색해보면 된다. 이곳의 거짓부렁 스케일이 어느 정도인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의 극작가 앙드레 말로가 소설 <인간의 조건>을 쓰면서 등장시킨 클라피크라는 인물은 허언증 환자였다. 이 소설에서 허언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도 열세 살짜리 레즈비언 여자아이가 허언증을 가진 거짓말의 달인으로 등장한다. 이 어린 허언증의 소녀는 다른 한 여자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었다.

보통 허언증은 정신질환의 증상으로 여겨진다. 작가들의 소설 속 인물처럼 우리 모두는 허언을 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런 허언도 사회적 맥락을 갖는다. “허언증 관련 상담이 2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났는데, 상담 중에 만난 허언증 환자들은 20~30대가 대다수”(최고야심리상담소 최고야 소장)라는 지적처럼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는 세대가 거짓의 유혹에 노출되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허언증갤러리는 이런 ‘헛말’들을 늘어놓은 놀이 버전이다. 모두가 거짓인 줄 알면서 더 큰 거짓과 과장을 생산하는 공간이다. 포털 유희, 언어 유희, 허세나 망상 유희를 위해 소비되는 공간이 허언증갤러리다. “모두들 자기 처지를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자기가 부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남들도 다 알지만 그런 식으로 자조적으로 노는 것 아니겠나.”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 거짓말 놀이를 유희로 받아들이면서도 빠른 확산 속도를 보이는 데 대해 우려하는 의견도 있다. 인간이다 보니 거짓말을 조금씩 할 수는 있지만, 이게 지나치면 일상적인 관용의 정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일정 부분 염려스러운 구석이 있다. 물론 대다수 사람은 이런 것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있다가 실제로 본인이 무언가 착각을 해서, 본인이 실제로 (가상의) 그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면서 어떤 유리한 상황이 생기게 되고 수없이 이런 일을 하게 되다 보면, 거기에 넘어가게 되는 사람이 생기게 될 수도 있다. 그때는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될 수도 있다.”(최명기 정신과 전문의)

“잠재적인 분노를 이런 식으로 풀어내는 것”

디시인사이드 허언증갤러리에는 목성을 주운 사람도 있다. ⓒ 디시인사이드

허언증갤러리의 확산 이유는 결국 공감이다. 그들만의 놀이에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웃고 이해해서다. 내가 원빈이 될 수도 있고 월가에서 일하는 금융맨이기도 하며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수재로 마음대로 변신할 수 있는 이곳의 놀이 기준은 ‘얼마나 황당한 드립을 센스 있는 필력으로 날리느냐’다. 그리고 놀이의 소재 중 상당수는 그들이 포기한 무언가를 겨냥한다. ‘취업’과 ‘연애’, 그리고 ‘부(富)’ 등 잡기 힘든 무언가를 소재로 삼는다.

“이번에 노벨수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제 나이 스물둘에 이런 영광을 안게 되었네요. 혹시 갤러리 회원 분들 중에 노벨상 수상 경력?있으신 분 계시렵니까? 9급 공무원 시험에 가산점 있나 궁금하네요.”

여기에 댓글이 달렸다.

“제가 노벨기술가정상을 받았는데 9급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면접 때 언급도 안 하더군요. 운 좋게 강남에 있는 치킨집 면접에서는 이 정도 수상 경력이면 봐줄 만하다면서 일단 6개월 계약으로 치킨 튀기고 있습니다.”

취업난에 공무원시험으로 내몰리는 젊은 세대의 고통은 이곳에서 허언으로 포장돼 유머로 변신한다. 심지어 ‘저 애인 생겼습니다’가 허언으로 인기를 얻는 게 씁쓸하지만 이곳의 특성이다.

인터넷에서 과하게 포장해 자신을 드러내고 뽐내는 글들은 항상 존재했다. 디시인사이드의 수많은 갤러리 중에서 허언증갤러리 이전에 꽤나 유명했던 곳이 ‘자랑갤러리’였다. 사람들이 대놓고 자기 자랑을 하는 게시판이었다. ‘OO인 것이 자랑~’이라는 제목의 글들은 다양한 자랑거리를 담았다. ‘마흔두 살에 첫 딸 낳은 게 자랑’이기도 했고, ‘누에고치에서 애벌레 본 게 자랑’이기도 했다. 가끔은 깜짝 놀랄 만한 자랑거리도 올라왔다. 그리고 이런 자랑거리가 인터넷에서는 더 빠르게 확산됐다. 스물세 살이라는 한 유저는 벤틀리를 모는 인증사진을 올렸고, 홍콩에서 산다는 유저는 레인지로버를 타고, 호텔에서의 아침 식사, 크롬하츠 시계를 인증하면서 부를 자랑했다. 그리고 이런 부(富)한 유저들의 인증글은 ‘자랑갤 레전드’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커뮤니티로 퍼져나갔다.

어떻게 보면 ‘허언증갤러리’는 이런 자랑갤의 거울 뒷면과 비슷하다. “현실적인 것들, 찌든 것들을 잠시 이야기를 던지면서 벗어내는 현상이다. 빠르게 확산되며 호응을 얻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감대를 느끼지 않으면 확대 재생산될 수가 없다. 문제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왜곡이 가장 큰 문제가 되겠지만, 놀이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런 속성을 모아서 갤러리로 풀어내는 것이다. 잠재적인 분노를 이런 식으로 풀어내는 건 건강한 것이라고 본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현실을 부정하고 또 다른 자신을 ‘빈말’로 만들어내는 허언증갤러리지만 현실을 마주하며 직설적으로 대하는 글도 적지 않다. 개념글로 등재된 ‘허언증갤 여신.jpg’란 제목의 글을 클릭해보면 어떤 여신이 나올까.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대선 공약이 등장한다. ‘반값 등록금 완전 실천!’ ‘이동통신 가입비 폐지, 통신요금↓’ ‘1년에 1000개씩 어린이집 확대’ 등의 새누리당 대선 공약 현수막 이미지도 함께 눈에 들어온다. 20~30대의 허언을 ‘이건 뭐야’라고 마냥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그들의 빈말에는 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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