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가 건설 위해 ‘마녀사냥’ 나서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2.24 17:57
  • 호수 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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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모디 정부, 진보 대학 JNU 학생회장 폭력 선동과 음모 혐의로 구속
2월16일 인도 JNU 학생들이 정부의 탄압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 EPA 연합

필자는 지난 2월12일부터 일주일간 인도 ‘자와할랄 네루 대학교(JNU)’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 이 기간 동안 벌어진 JNU사태는 연일 ‘타임즈 오브 인디아’ ‘힌두스탄 타임즈’ 등 인도 최대 일간지의 1면을 장식했다. 보수 언론과 정치권으로부터 “반(反)민족주의자” “테러리스트” “매춘부”라고 낙인찍힌 인도 JNU 재학생과 교수들을 직접 만났다.

“여러분이야말로 인도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2월15일 오전 11시쯤,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위치한 JNU 교정에 700여 명의 학생이 모였다. 이들의 시선은 중앙 계단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한 노신사를 향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검소한 옷차림을 한 이 남자는 ‘진화론’을 쓴 찰스 다윈의 고손(高孫, 손자의 손자) 펠릭스 패들 박사였다. 이 대학 사회인류학과 초청교수인 그가 강의실 밖으로 나선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대학의 학생회장 카나이아 쿠마르(Kanhaiyar Kumar)가 폭력 선동과 음모 혐의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경찰이 문제 삼은 것은 2월9일 JNU에서 열린 아프잘 구루의 추모 행사다. 파키스탄 분리주의자인 구루는 2001년 인도 의회 테러에 가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인도 정부는 사형 집행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3년 구루를 처형했다. 인도 정부가 파키스탄과 카슈미르 지역 분쟁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같이 인도에서 가장 민감한 이슈와 연관된 행사가 대학에서 개최됐고, 참가한 학생 중 일부가 인도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쳤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JNU는 순식간에 인도 정치의 ‘태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JNU, 인도판 ‘역사교과서 논란’으로 눈엣가시

2012년 인도 정부가 실시한 대학 평가에서 JNU는 4점 만점 중 3.9점을 기록했다. 조사 대상이 된 인도 대학 중 최고점이었다. 하지만 쿠마르 구속을 기점으로 보수 언론과 정치인은 “JNU는 테러리스트와 반민족주의자, 매춘부의 학교”라며 JNU 때리기에 나섰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1969년에 설립된 JNU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학풍으로 유명한 인도의 명문대다. 교수와 학생 중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회문제를 지적하고 토론을 시작한다. 이 때문에 2002년 일어난 인도판 국정 역사교과서 수정 논란 당시에도 JNU는 보수 매체와 정치인들의 표적이 됐다. 당시 보수 성향인 인도 인민당(BJP) 정부는 수천 년간 광대한 지역에 뿌리를 내려온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축소하고 힌두교의 브라만 계급위주로 수정했는데 이에 가장 먼저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사람이 바로 로밀라 타파르(Romila Thapar) JNU 고대사 교수였다.

타파르 교수는 정년퇴임 이후에도 여러 정치 사안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내고있다. 그녀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도 즉각 반응했다. 타파르 교수는 온라인 매체 ‘더 와이어’에 실린 기고문에서 “(정부는) 나라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기만 하면 폭력 선동이라는 극도로 심각한 혐의를 뒤집어씌운다”며 “네루가 폐지를 검토한 폭동 선동죄 법안을 철폐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학생과 교수 중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회문제에 비판을 제기하는 학풍은JNU 특유의 캠퍼스 문화와 깊이 관련돼 있다. 국립대인 JNU는 재학생에게 무료로기숙사를 제공하며 학생 대다수가 24시간 캠퍼스에 상주한다. 이 때문에 학생들 간의 결속력이 강하며 특히 정치 단체의 활동이 활발하다. 교수들도 학생들의 정치참여와 토론을 적극 권장한다. 학생회장의 구속 소식이 전해진 직후 JNU의 교수들은 긴급회의를 열고 강의가 끝난 후 쿠마르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비슈누프리아 두트 예술·미학단과대학장은 학회에 참가한 국내외 교수와 학생들에게 사태를 설명하면서 “오늘 JNU 역사에 남을 큰일이 벌어졌다. 인도는 민주주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학회 일정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 AP 연합

변호사가 학생과 기자 폭행, 경찰은 수수방관

JNU 재학생들은 힌두 민족주의자인 나란드라 모디 총리가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눈엣가시로 여겨온 JNU를 시범 케이스로 삼아 모디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사태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쿠마르가 파키스탄 분리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여당 산하의 대학생 단체 회원의 증언만을 근거로 쿠마르의 구속 수사기간을 계속 연장하고 있다. 내무장관 라지나트 싱 역시 JNU에서 열린 문제의 집회는 파키스탄 무장테러단체 라슈카르에타이바를 이끄는 하피즈 사이드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아무런 증거도 대지 못했다.

그럼에도 JNU에 대한 인도 국민의 혐오는 점점 커져가는 중이다. 연극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크루파 데사이는 “교문 밖을 나서면 사람들의 시선이 험악하다. 릭샤를 탔다가 기사로부터 ‘테러리스트’라고 모욕을 당한 친구도 있다”며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게 될까 걱정된다”고 전했다. 같은 대학의 히말라야 고헬은 “이번 사태는 민족주의 위기가 아니라 헌법과 민주주의 위기”라며 “학생회장이 석방될 때까지 계속 시위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디 정부와 보수 언론의 JNU 때리기는 나날이 심각해져가고 있다. 구속된 학생회장 쿠마르에 대한 청문회가 처음 열린 2월15일에는 법원 앞에 한 무리의 변호사와 BJP의 국회의원이 나타나 경찰이 보는 앞에서 JNU 구성원은 물론 취재를 위해 나온 기자들을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튿날 언론인들은 단체로 규탄하는 성명을 내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이를 비웃듯 17일에는 법원 앞과 법정 안에서 피고인 쿠마르가 두 차례나 아무 제재없이 판사복을 입은 남성들에게 구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삼권분립이 제대로 이뤄진 나라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주일간 JNU 사태를 통해 본 인도 사회의 모습은 강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학생회장 구속, 동맹휴업, 경찰의 캠퍼스 진입 등 이곳 학생운동의 양상이 한국의 1980~90년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안전망 확충, 격차 해소 등 해결이 시급한 사회 갈등으로부터 시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삼권분립과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무시하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모습이 한국의 오늘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JNU에서 만난 학생들 중에는 K팝이 좋아서, 또는 한국 영화를 감명 깊게 봐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방문을 계획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광화문 거리에 서서 보게 될 광경은 현재 인디아 게이트 앞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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