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지만 보게 되는 피라미드 현실의 재현
  • 정덕현 | 대중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03 18:37
  • 호수 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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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연습생들의 가혹한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에 대중들이 몰입하는 이유

Mnet <프로듀스101>은 논쟁적인 프로그램이다. 걸그룹 연습생들의 오디션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가져왔지만, 이 프로그램이 다루는 내용들은 지금껏 나온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보다 세다. 처음 자신들을 소개하며 무대에서 준비한 퍼포먼스와 노래를 들려준 그들은 즉석에서 A에서 F까지 등급을 부여받았다.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당락은 어쩔 수 없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지만, <프로듀스101>은 합격과 불합격이 아니라 구체적인 순위가 매겨진다. A부터 F까지 매겨지는 그 순위에서 우리는 현실의 많은 성적표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학교를 다니며 늘 봐왔던 것이기도 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늘 매겨졌던 인사고과이기도 하다. 우리가 쇠고기를 살 때 등급에 따라 다른 가격을 지불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사회의 어느 조직에 들어가면 그 쇠고기의 운명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불편함이 거기에는 존재한다.

 

게다가 그렇게 순위가 매겨지는 당사자들은 다름 아닌 어린 소녀들이다. 물론 그녀들은 저마다 걸그룹이 되기 위해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입에 달고 다니며 시키는 건 뭐든 소화해내려 애쓰지만, 그걸 보는 시청자들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걸 확인하는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그 소녀들이 처한 현실이 우리가 사는 현실처럼 가혹해질수록 불편함에 대한 질타는 이어지지만, 동시에 그 현실에 당하고 있는 소녀들의 고군분투에 더 깊은 몰입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4개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구조의 무대. 가장 성적이 좋은 A등급의 연습생들은 가장 주목받는 가운데 삼각형에 설 수 있었다. ⓒ m·net

 


실력 못지않게 호감도와 인성이 중요

 

<프로듀스101>을 대중에게 많이 알린 인물은 첫 노래 의 센터에 섰던 판타지오의 최유정이다. 그녀는 첫 등장에서 낯선 환경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노래와 춤을 가르쳐주는 제아·성은·치타·가희·배윤정 등이 혹독하게 소녀들을 몰아치는 건 그녀들이 더 좋은 무대를 선보이게 하기 위해서지만, A부터 F까지 나뉜 소녀들은 그 강한 압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D클래스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최유정의 모습은 시청자들이 낯선 현실에서 느끼는 그 모습 그대로였을 게다. 그러니 그녀가 피나는 노력으로 A클래스에 들고 드디어 센터 자리에 올랐을 때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프로듀스101>에 나온 연습생들은 의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그 삼각형의 무대가 갖고 있는 상징을 버텨내야 한다. 그 상징은 다름 아닌 피라미드 구조의 무한 경쟁이다. 4개의 삼각형으로 마련된 그 뮤직비디오 무대 위의 연습생들은 그냥 무작위로 세워진 게 아니다. 가장 성적이 좋으면 가운데 삼각형의 센터에 서게 되고, 성적이 낮으면 사이드나 뒤편의 삼각형에 서게 되며, 가장 성적이 좋지 않은 이들은 심지어 삼각형 무대 밑에서 병풍 역할을 해야 했다. 첫 개인 오디션의 결과로 이 무대의 위치 선정이 상벌로 내려졌다면, 두 번째 팀으로 치러진 오디션의 결과는 이제 총 101명의 연습생 중 40명이 탈락하는 본격적인 오디션의 상벌로 이어졌다. 물론 잘하는 연습생에게는 이 삼각형으로 놓인 의자 맨 꼭대기에 설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지지만, 62등부터는 가차 없이 프로그램에서 ‘방출’된다. 현실은 더 살벌해진다.


흥미로운 건 <프로듀스101>의 당락을 결정하는 이들이 심사위원이 아니라 국민 프로듀서라고 부르는 관객과 시청자라는 점이다. 만일 심사위원이 이 당락을 결정해버렸다면 무수한 논란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그 결정권을 대중에게 부여하면서 원천적인 문제를 해결했고, 여기서 뽑혀 구성된 이른바 자칭 ‘국민 걸그룹’이 다름 아닌 대중들의 선택에 의해 뽑힌 소녀들이라는 걸 확인시켜준다.

 

중요한 건 이 부분에서 기획사의 연습생들이 걸그룹으로 발탁되는 과정과 이 프로그램을 통해 걸그룹으로 데뷔하는 과정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기획사는 그것이 노래든 춤이든 외모든 어떤 실력을 갖고 있는 연습생을 발탁해 걸그룹으로 만들지만, <프로듀스101>에서는 실력 못지않게 그 발탁 과정을 통해 보여준 호감도가 큰 작용을 한다. 레드라인의 김소혜는 엉망인 안무 실력으로 선생님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녀를 도와주는 젤리피쉬 김세정의 도움으로 밤샘 연습을 한 끝에 배윤정 선생님을 눈물 흘리게 만든다. 61명을 뽑는 무대에서 그녀는 놀랍게도 22만여 표를 얻어 전체 11위에 오른다. 요즘은 기획사에서도 실력만큼 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방송 프로그램으로 하는 오디션에서 인성은 실력보다 더 중요해진다.

 

모욕·독설 꾹꾹 눌러 담으며 살아남으려 해


기획사에서 오래도록 연습생 생활을 해온 소녀들은 현실이 얼마나 더 참혹한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 어떤 모욕적인 순위 매김과 듣기 힘든 독설들도 꾹꾹 눌러 담으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다. 경쟁적인 현실이지만 정작 소녀들은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로 서로에게 공감한다. 자신이 아니라도 잘된 동료에게 기꺼이 박수를 쳐주고, 그녀들이 하는 가족 이야기나 자신을 도와줬던 고마운 연습생 언니 이야기에 눈물을 흘린다.

 

악역을 도맡은 제작진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래서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기획사에서 연습생으로 버티고 있는 소녀들의 현실보다 더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이 오디션에 참가한 연습생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존재가 방송에 나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한다. 이 지점은 <프로듀스101>이 서 있는 위치다. 이 프로그램은 대놓고 제작진이 악역을 할 테니 소녀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라고 말하고 있다.

 

모두가 쉬쉬하고 드러내길 꺼려했던 우리네 삼각형 구조의 경쟁 시스템을 보는 건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남는 소녀들을 지지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난다. 그래서 소녀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뽑아달라고(Pick me) 노래하고, MC는 “당신의 소녀에게 투표하라”고 주문을 외운다. 천진난만한 소녀들의 울고 웃는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그 주문이 웬만해선 외면하기 힘든 일이라는 걸 느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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