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다
  • 박준용 기자 (juneyong@sisapress.com)
  • 승인 2016.03.09 10:40
  • 호수 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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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부활한 필리버스터…흥행은 성공, 마무리는 흐지부지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3월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테러방지법 수정을 위한 무제한 토론 마지막 주자로 나섰다. © 시사저널 박은숙

“참신한 소재로 흥행했지만 결말이 허술한 드라마였다.” 야권이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기 위해 8박 9일 동안 했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 대해 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 의원이 남긴 총평이다.

필리버스터의 시작은 다소 갑작스러웠다. 2월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정보기관의 권한 강화를 골자로 하는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하자 같은 날 더민주는 의원총회를 열고 본회의 시작 20분 전에야 필리버스터 실행을 확정했다.

이렇게 이뤄진 필리버스터는 정치권뿐 아니라 국민 대다수에게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한국 정치에서 43년 만에 부활했기 때문이다. 1969년 3선 개헌을 막기 위해 신민당 소속 박한상 의원이 발언한 이후 첫 등장이다. 이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당 국회의원이던 1964년, 임시국회 때 자유민주당의 김준연 의원 체포동의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무제한 토론을 진행했던 일화가 ‘전설처럼’ 정가에 알려져 있었을 뿐이다.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접한 필리버스터는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드라마 <어셈블리> 등 정치물에 극적 요소를 가미하는 도구로 나왔다.

생소함은 긍정적 반응을 불렀다. 필리버스터가 야권 지지자로부터 “신선하다”는 반응을 이끌어낸 것. 야권은 특히 온라인에서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는 토론 주자로 나선 의원의 영상이나 발언 내용이 퍼져 나갔다. ‘정치인은 본인 부고(訃告) 기사 외에는 끊임없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이 좋다’는 속설을 감안하면 토론 주자 개인이나 야당 입장에서 모두 환호할 일이었다.

野 의원, 포털 검색어 상위권에

문용식 더민주 디지털소통위원장은 “온라인상에서 기대 이상의 폭발적인 호응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면서 “필리버스터를 통해 테러방지법의 독소 조항을 몰랐던 시민들에게 이 법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렸다”고 말했다. 일부 시민은 “역사의 현장을 보는 일이니 실제로 봐야겠다”며 직접 필리버스터 장면을 방청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을 방문했다. 이 때문에 본회의장 방청석이 가득 차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토론자로 나선 의원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초선 의원도 주요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렸다. 특히 관심을 끈 대목은 의원들의 장시간 발언 기록 경신이다. 첫 토론자였던 김광진 더민주 의원(5시간33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64년 세운 5시간19분의 발언 기록을 깨며 화제를 모았다. 은수미 더민주 의원은 10시간18분 동안 발언해 이 기록을 다시 깼고, 신민당 박한상 의원의 최장 시간 발언 기록(10시간15분)도 넘어섰다. 정청래 더민주 의원(11시간39분)이 이를 다시 깼고, 마지막 주자로 나선 이종걸 더민주 원내대표가 12시간31분의 신기록을 세우며 3월2일 마무리했다.

토론자로 나선 의원의 인상 깊은 발언이 언론에 다수 소개된 점도 야권이 얻은 성과다. 김광진 의원은 테러방지법에 대해 “무차별적 권한을 추가 부여해 ‘괴물 국정원’을 만들려는 의도”라고 발언해 주목받았다. 은수미 의원은 김용남 새누리당 의원이 발언 도중 “그런다고 공천 못받아요”라면서 삿대질하자 “김용남 의원은 공천 때문에 움직이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라고 반박했다. 정부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테러방지법 통과를 압박한 데 대해 홍종학 더민주 의원은 “1400만명이 해고가 될까 떨며 삽니다. 이게 진짜 국가 비상사태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배재정 더민주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전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방문해 학생들과 손가락 하트를 만드는 사진을 들고 나와 “이런 사진이나 찍고 있습니다. 국가 비상사태라면서요”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야권은 여기까지만 좋았다. 야권이 필리버스터를 3월10일 임시국회 회기종료까지 끌고 갈수록 부담이 커졌다. 선거구 획정안이 처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선거구 조정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4월13일에 있을 총선이 미뤄질 수도 있었다. 여권은 이런 상황을 활용해 야권이 제시한 ‘선거구 획정안 우선 통과’안을 거절했다. 그러면서 “필리버스터 때문에 선거구 획정이 지연된다”고 야권을 압박했다. 부담을 안고 가던 야권의 필리버스터는 결국 회기 종료 때까지 지속되지 못했다. 3월1일 더민주는 “총선 승리를 위해 필리버스터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테러방지법과 선거구 획정안은 3월2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월24일 오후 10시간18분 동안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진행한 후 동료들의 격려를 받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필리버스터 중단…군사작전식 후퇴로 ‘잡음’

더민주의 필리버스터 중단은 야권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토론 중단에 대한 설명과 명분이 부족했다는 비판이 당 안팎에서 터져 나왔다. 이학영 의원은 “힘이 없어 쓰러질 때 쓰러지더라도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다”며 “생각과 말까지 억압하는 법을 만들어 장기 집권을 꿈꾸는 세력에게 무참히 짓밟힐 수는 없다”고 반발했다. 배재정 의원은 “황당하다. 지지해준 국민과 의원들의 진심에 등 돌려선 안 된다”고 밝혔다. 조국 서울대 교수도 SNS를 통해 “지지층이 뜨겁게 반응하며 결집하고 있는 이런 (필리버스터를) 아무 설명과 설득 없이 중단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언 몸을 녹이려고 모닥불을 피워 열기가 오르려고 하는데 화재 날지 모른다며 소화전으로 다 꺼버리는 격”이라고 밝혔다. 시민들의 반응도 부정적이었다. CBS가 의뢰해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필리버스터 중단에 반대하는 의견이 44.4%로 찬성(39.4%)보다 많았다.

더민주는 필리버스터를 중단하는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잡음을 냈다. 김종인 대표를 비롯한 당의 비상대책위원회가 “필리버스터를 중단해야 한다”고 이종걸 원내대표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불거진 것. 김 대표는 “선거 망치면 책임질 거냐”고 언성을 높인 것으로 전해졌다.

야권은 필리버스터의 인기에 비해 씁쓸한 결말을 안고 총선을 맞이하게 됐다. 정치 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이 시점에서 필리버스터를 중단해야 한다는 김종인 대표의 판단은 적절했다. 선거구 획정 문제가 맞물려 있기에 총선 일정이 흔들리는 책임을 야권이 뒤집어쓸 부담이 있었다”면서도 “필리버스터의 출구를 찾는 과정이 군사작전을 하거나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갑자기 이뤄졌다. 열기를 계속 살려가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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