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없애달라던 ‘쪽대본’을 중국이 없애버렸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6.03.09 11:48
  • 호수 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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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후예>, 중국 시장 진출 위해 100% 사전 제작…국내 드라마 시스템 변화에 기대감
ⓒ KBS

주목받는 캐스팅이었다. 송중기와 송혜교, ‘송·송 커플’의 호흡도 좋고, 스토리 전개도 빠르다. 둘은 우연하게 병원에서 만났지만 (송중기는 특전사 대위, 송혜교는 대학병원 전문의), 이뤄질 듯 이뤄지지 않고, 싸운 뒤 화해한 듯 보여도 이내 냉랭한 관계가 반복됐다. 그리스 현지에서의 촬영 분량이 많다더니 그 덕에 영상미가 빼어나다. 어쨌든 잘빠졌다는 평가가 맞는 드라마다. 최근 KBS 2TV에서 막 시작한 미니시리즈 <태양의 후예>(극본 김은숙·김원석, 연출 이응복) 얘기다. 시청률은 가파르게 올라가는 중이다. 방영 3회만인 3월3일에 시청률 23.4%(닐슨코리아 기준)를 기록했다. “<추노>는 20%를 4회만에 돌파했다. 페이스가 훨씬 좋다.”(KBS관계자)

이야기가 밀도 있고 꽉꽉 찰수록 드라마가 재미있어지는 법. 2월24일 첫 방송을 한<태양의 후예>지만, 이미 지난해 12월에 쫑파티를 끝냈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냐면 이 드라마, 100% 사전 제작 드라마다. 지난해 6월부터 촬영을 시작했고, 이미 편집까지 다 끝난 후속 회차들이 전파를 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쪽대본과 밤샘 촬영에 익숙한 시청자들이 들으면 어리둥절할 얘기다.

<태양의 후예> 덕분에 드라마 현장에서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드라마 사전 제작’이라는 숙원이 중국 때문에 이렇게 간단히 이뤄질지 몰랐다.” 맞다. 이게 다 중국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광전총국)이 방송 심의를 담당한다. 중국에서는 보통 드라마 방영 6개월 전에 프로그램 방영 계획을 보고해야 하고, 3개월 전에는 완성된 드라마를 제출해 심의를 받아야 한다.원래 TV에만 적용했는데, 지난해 1월부터는 인터넷까지 사전 심의를 확대했다.

채우기 어려운 사전 제작 드라마의 조건들

타격은 한국 드라마가 입었다. 한국 드라마는 국내에서 방송된 후 수 시간 내에 자막을 씌워 중국 내 ‘아이치이’ 같은 동영상 사이트에 보내는 방법으로 상품을 수출했다. 그런데 광전총국이 정책을 바꾸면서 몇 시간이 아닌 수개월의 간극이 생겨버렸다. 그 때문에 드라마 수출이 어려움에 처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에서 먼저 방영하고 난 후 완성본을 가지고 광전총국 심의를 받으면 빨라야 6개월 후에 중국에서 방송될 수 있다. 그런데 그사이에 이미 자막까지 입힌 불법 다운로드가 퍼져버린다. 이미 본 사람들이 수두룩하니 원래 편당 10만 달러를 받을 작품이라면 고작 1만 달러밖에 받지 못한다.”(한 외주제작사 관계자)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만큼 중국 시장은 중요하다. 얼마 전 사드 배치 논의가 전국을 들끓게 만들었을 때다. 외교 전쟁이 한창 벌어졌던 그때, 청와대나 국회만큼 이 문제를 예의주시했던 곳이 바로 방송국이었다. 보도국이 아니라 드라마국 얘기다. “사드 이야기로 한창 시끄러울 때 우리 드라마국도 그 일 때문에 무척 심각했다. 왜냐면 중국이랑 외교 관계가 경색될 경우 드라마 판매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한국 드라마는 지금 중국이 없으면 망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한국 경제의 중국 의존도가 심한 것처럼 국내 드라마 시장은 한국 경제의 축소판이다.” (KBS 드라마국의 한 PD)

이 정도로 중국 시장이 중요하다 보니 중국 광전총국의 사전 심의제를 벗어날 묘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나온 게 ‘사전 제작’이다. 방송사들은 중국식 법에 따르기로 했다. 방영 6개월 전에 방영 계획을 보고하기 위해 시스템 자체를 바꿔버렸다. 운동선수도 아닌 드라마 배우들이 매번 링거투혼을 펼치면서 경기하듯 드라마를 찍는 상황이 <태양의 후예>에는 없다.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한국 시스템은 선진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런 사전 제작을 하면 현장에서는 모두가 환영한다. “편하다. 정말 많이 편하다. 배우들도 피곤하지 않고 컨디션을 보장해주고 그러니 배역에도 몰입을 더 잘하는 것 같다. 어떤 배우는 하루 일하고 하루 쉬고 하니 낯설어 적응이 안 된다고도 하더라.” (연기자 매니지먼트사)

현장에서도 <태양의 후예>를 눈여겨본다. 앞으로도 사전 제작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드라마가 선순환 고리의 스타트를 순조롭게 끊어주길 기원한다. 모범적인 사례다 보니 내부에서도 관심이 많다. 초치기로 드라마를 만들다 보면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도 인간이다 보니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어렵다. 캐릭터가 깨지기도 한다. 배우들도 연기에 집중할 수 없다. 다른 KBS PD의 이야기다. “김은숙 작가가 스타 작가지만 매번 좋은 컨디션에서 좋은 대본이 나올 수는 없지 않나. 그런데 이번(<태양의 후예>)에는 자신의 기량이 잘 나온 거 같다고 하더라. 이미 편집이 다 된 작품을 본 사람들 이야기로는 1~2회가 제일 재미없다고 한다.” 뒤집어 말하면 뒤로 갈수록 재미있다는 얘긴데, 이런 흐름이라면 이번 사전 제작은 성공적일 것이다.

모든 드라마가 사전 제작으로 만들어진다면 시청자들은 좋으련만, 아쉽게도 올해 100% 사전 제작이 되는 미니시리즈는 5편에 불과하다. 한 해 70여 편의 미니시리즈가 제작되는 현실에서 극히 소수만 이런 은혜를 입는다. 사전 제작 드라마의 조건 때문이다. 올해 사전 제작으로 만들어질 5편을 보자. <태양의 후예>(송중기·송혜교), <함부로 애틋하게>(김우빈·수지), <화랑 : 더 비기닝>(박서준·박형식·고아라), <사임당, 더 허스토리>(이영애·송승헌), <보보경심 : 려>(이준기·아이유).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중국 시장을 노리는 드라마여야 한다. 둘, 중국에서 통하는 연기자가 반드시 주인공으로 캐스팅돼야 한다. 셋, 그리고 이들이 “출연할게요”라고 결심할 수 있는, 그리고 투자자들이 “저 이름이라면 돈을 벌어다주겠군”이라고 믿을 수 있는 스타 작가와 연출가가 뒤를 받쳐줘야 한다. 이게 사전 제작에 필요한 막대한 제작비를 수월하게 조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고, 앞선 5편은 그런 조건을 갖췄다.

사전 제작이 절대선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 보니 좀 더 좋은 작품을 만들려고 하다 보면 드라마 제작 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제작비가 늘어나게 된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파악해 드라마에 반영할 수 없다는 것도 단점이다.”(외주제작사의 한 관계자) 이런 주장을 일축하는 측도 있다. “제작비는 제작 일수가 짧을수록 덜 드니 쪽대본 시스템이 제작비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이는 단견이다. 오히려 관리가 안 되면 초반에 갔던 장소를 뒤에 또 가서 찍어야 하는 등 비효율적인 측면이 있다. 시청자들의 반응? 시청자들은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좋아하지, 그런 반응에 민감하게 왔다 갔다 하는 거 좋아하지 않는다. 사전 제작을 하고, 그래서 완성도가 높아야 모두가 먹고살 수 있다는, 그런 공정한 시장이 이제야 자리 잡는 것이다.” (방송사 관계자)

 

중국의 동영상 사이트인 아이치이에서는 를 한국과 같은 시간에 동시 방송하고 있다. ⓒ 아이치이닷컴

<태양의 후예> 성공 여부가 향후 방향 가름

제작비 등 외적인 환경을 제외한다면 사전제작이 드라마의 질을 높이는 데 긍정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다만 ‘앞으로 확대될 수 있을까’ ‘중국 시장 진출을 노리지 않는 드라마라도 미리 만들어 둘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네 사전 제작이 아래로부터의 요구로 시작돼 뿌리내린 시스템이 아니어서다. 오히려 중국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위로부터의 방책에 가깝다. 그렇다보니 만약 중국이 또 정책을 바꾼다면? 사전 제작 형태가 버림을 받을 위험도 있다.

물론 사전 제작에는 중국 말고도 또 다른 변수가 있다. 시청자의 눈높이다. <태양의 후예>와 같은 성공사례가 나오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이미 케이블 드라마의 성공 사례에서 보듯이 사전 제작을 잘 활용한다면 침체돼 있는 지상파도 활로를 뚫을 수 있다. tvN의 <시그널>을 본 사람들에겐 이제 지상파의 웬만한 드라마는 눈에 안 차는 상황이 됐다. 반면 <태양의 후예>는 잘 만든 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한 회 한 회 이야기가 꽉 차 있다. 시청자는 지금 지상파에도 이런 드라마를 요구하고 있다. 완성도에 대한 요구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

흥미로운 점은 앞서 소개한 2016년 100% 사전 제작 라인업 5편 중 3편을 KBS가 편성했다는 점이다. 중국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서 KBS가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도 이유겠지만, 내부에서는 ‘지상파는 진부해’라는 시청자들의 시선 탓에 KBS 드라마국이 위기감을 가졌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해법을 찾으려 시도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아직은 일부 선택받은 드라마만의 특권이지만 ‘쪽대본’과 ‘생방송’이라는 열악함을 버리고 우리 드라마는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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