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YS를 망친 ‘YS 대통령 만든 일등공신’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24 21:09
  • 호수 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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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없다”…아들 구속 지켜봐야 했던 현직 국가원수

김영삼(YS) 대통령 만들기 공신(功臣) 명부에서 빼뜨려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다. YS의 차남 김현철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지나치곤 하지만 공적(公的)으로는 반드시 올려야 할 이름이다. 그는 병약한 장남 은철과 달리, 대다수 추종자들마저 꼬리를 내리고 흩어졌던 유신 말기, 신군부 등장 초반에도 YS를 곁에서 지켰다. 물론 그를 공신으로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측도 있다. ‘일등공신’이란 표현 자체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현철은 공신 범주에 넣을 대상이 아니다. 그는 YS의 정치적 동반자다.” 현철은 ‘일개 공신’을 넘어서는 특별한 존재라는 게 상도동 사람들의 얘기다.

 

검찰에 출두하는 ‘대통령의 아들’. 그러나 죄명은 ‘국정 농단’이 아닌 조세포탈이었다. 최고 권력자인 YS도 성난 민심을 거부하지 못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장관·수석들은 현철 눈치 보며 사전보고​

“대통령 YS에게 큰 소리로 대들었던 게 단순히 아들이라서가 아니다. YS가 청와대 주인이 되는 데 자신의 공이 컸다고 자부한 현철은 스스로를 YS의 정치적 동지로 자임했고, YS도 현철의 기여를 상당 부분 인정했다. 당연히 현철의 목소리는 컸고, 집권 이후엔 더욱 커졌다. 고집 세기로 유명한 YS도 자신과 외모까지 닮은 현철의 고집과 심통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대통령까지 이랬으니 거칠 게 없는 현철이었다. ‘김 소장(所長)’은 인사·돈 모두를 가능케 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과 동의어가 됐다(현철은 1988년 중앙여론조사연구소를 설립, 소장으로서 정보·자금을 관장).

 

‘김 소장’ 호칭은 어느새 ‘소(小)통령’으로 불렸고 그랬어도 하등 어색하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렇다.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도 현철의 ‘특수한 위치’와 ‘발호’를 인정한다. 현철의 눈치나 보는 한심한 수석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YS 집권 초기 청와대 비서실을 2년간 이끌었던 박 실장은 안기부와 검·경찰 등 공안기관도 현철의 비위(非違)는 피해가는 느낌을 받는 정도였다고 했다. 현철 인맥이 요소요소에 배치돼 있었으니 사실을 적시한 보고서가 올라올 리도 없었다.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자칫 현철에게 ‘찍힐’ 일을 하지 않는 것임은 빤한 노릇이었다. 되레 현철에게 정국 상황을 수시로 브리핑하고, 불리한 내용을 차단하거나 발설자를 색출하는 친위부대 역할까지 감당했다. 안기부 도청 전담 미림팀은 ‘현철의 촉수(觸手)’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현철의 비자금 120억원 등을 보관하다가 구속된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 오정소 1차장 등이 포진한 안기부는 ‘직할부대’였다.  언론도 현철에 관한 한 침묵했다. YS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당선을 도와준 모 언론사 사장을 초청해 식사를 함께하는 친밀감을 표시했는데 그 언론사가 현철의 국정 농단을 꼬집자 즉각 응징에 나섰다. 그러니 어느 언론이 개혁 칼을 휘두르는 대통령을 감히 거스르겠는가. 

 

“대통령에 대한 현안 보고 전 현철의 자문을 구하는 한심한 장차관과 수석들이 생겨났고, 이렇게 미리 얻은 정보를 갖고 대통령과 대화하는 현철은 똑똑한 아들이 됐다. 현철의 위상은 공고해졌고, 그런 현철 주변에는 승진·보직을 위해 뛰는 장차관, 공기업 사장(희망자)들로 넘쳤다. 못된 풍조는 국·과장으로 번졌다. 정부 입김이 닿는 관영 언론, 금융기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당수 국회의원과 정치 지망생들은 공천을 보장받기 위해 줄을 섰다. 지금은 다들 시치미를 떼지만 ‘나는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현철이 사람’이 민정비서실에만도 여럿 들어찼다. S 행정관 등 서너 명이 됐다. 나 역시 일개 행정관이었지만 S 등의 비위를 가려내 원대복귀 조치가 이뤄지도록 했다. 물론 은밀하게 추진했다. 잠복했다가 현장 사진까지 내가 직접 찍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몇몇을 솎아냈다고 해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보고서를 작성하면 최우선으로 현철에게 뛰어가는 군상들도 있었으니…. 현철은 당·정·청의 통괄자였다.”

 

“현철 앞에서 무릎 꿇고 충성 맹세한 장차관·의원도 적잖다. 점잔깨나 빼던 신한국당 L 의원도 그런 부류다. K 의원도 밥 먹다가 현철이 부르면 숟갈 던지고 달려갔다.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은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과 함께 만났던 오정소가 이틀 뒤 안기부 1차장이 됐다’고 털어놨는데 어디 그런 사람이 한둘인가.”

 

“현철과 줄을 대기 위해 현철과 같은 K2(경복고)를 찾아다니는 한심한 공직자들도 적잖았다. 김동진 육군참모총장(국방장관) 등은 K2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실세가 됐다. 자타가 인정하는 실력파 이석채 경제수석의 경우는 억울하지만 그의 소신조차 현철과 연결시켜 운위(云謂)됐다.”

 

 현철의 직할부대로 기능한 안기부


“안기부장·장관·은행장과 만나는 현철이 어떻게 비쳐지고 소문이 날까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물며 현철과 마주한 상대가 굽신거리는 모양새라면…. 현철의 과욕도 문제였지만 그를 부추긴, 간·쓸개도 없는 정·관·재계 인사들도 나을 게 없다.” 이런 유의 증언들은 한이 없다. 현철의 인사 주도 소문의 하이라이트는 이홍구 국무총리 임명 관련이다. 대선 주자로 떠오른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는 (1년 전 총리 기용 때) 현철이 임명 사실을 사전 입에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이미지 먹칠을 감수해야 했다.

 

“비서실장이 된 지 1년여가 지날 즈음 ‘김현철이 모든 것을 다 주무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정부 인사, 이권에 두루 개입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주변을 제일 잘 아는 홍인길 총무수석을 불렀다. 그에 대해서도 고약한 첩보들이 상당했기에 ‘이대로 가다간 너와 김 소장은 다친다. 구속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조심해라’라고 경고했다. 그랬더니 홍 수석은  대통령에게 김 소장 얘기는 절대 하지 말라고 펄쩍 뛰었다. 대통령의 애정과 믿음이 각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니 진위를 좀 더 확실하게 할 때까지 참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는 지경이 됐다. 어느 장관은 산하 공기업 사장을 임명할 때 현철을 찾아가 ‘추천할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등 몇몇 장관·수석들의 눈치 보기 행태는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인사 때는 항상 복수 후보를 추천토록 했는데 어느 날 한이헌 경제수석이 공기업 사장 후보 1명만 들고 왔다. ‘왜 단수로 올렸느냐’고 묻자 그는 ‘협의해서 결정했다’고 했다. ‘누구와 협의했느냐’고 다시 묻자 ‘김현철 소장하고요’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내가 서류를 집어던진 소동은 이런 때문이었다. 현철의 발호는 더 이상 방치할 상황이 아니었다. 여름 날 오후, 대통령 집무실로 올라갔다. ‘어려운 보고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김 소장을 통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소문이 전국에 파다합니다. 각하에게 누(累)가 될까 걱정입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은 무응답이었다. 특유의 아랫입술을 내밀며 입술을 다무는 모습에서 심기를 짐작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일주일 후 김 소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아버지께 내 얘기를 한 적 있습니까?’ 아차 싶고, 야속하기도 했다. ‘나는 대통령을 모시는 비서요. 모시는 분에게 드린 얘기를 어찌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소. 김 소장은 부자지간이니 직접 물어보소’라고 대꾸해줬다. 이 통화를 한 지 며칠도 안 지나 실장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떠날 때가 됐음을 절감했다.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나를 포함한 빅3(총리, 안기부장)를 교체해 면모를 일신할 때가 됐다’고 했더니 대통령은 ‘씰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이후 1994년 12월23일 개각으로 함께 물러날 때까지 마음은 내내 편치 못했다.” 박 실장의 회한에 찬 술회다.

 

대통령에게 직보(直報)했다가 비서실장이 날아간 사실은 비밀일 수 없었고 소통령의 위세는 더 당당해졌다. 비리 첩보 보고서에서 김 소장은 자취를 감췄다. 현철은 불가침 영역에 자리했다. 현직 대통령 아들 구속이란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다가올 수밖에 없는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아무리 현철에게 비판적인 보고가 차단됐다지만 YS가 국정 농단 행태에 귀먹었을 리는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 유학 보내는 방안 등이 강구됐는데 현철 본인이 발칵 화를 내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됐다. 한국을 들었다 놨다 하며 ‘먼 차기’까지 내다보는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제의였던 것이다. YS는 정치인이 되려는 현철의 고집을 헤아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에게 공천 여부를 타진했다가 퇴짜를 맞기도 했다. 어쨌거나 단군 이래 최대 금융 특혜라는 한보 사태만 없었더라도, 아니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의 폭로만 없었더라도 현직 대통령 아들의 구속과 이로 인한 국정 공백 사태는 없었을지 모른다. 청와대·검찰·안기부 등 권력기관이 일심동체가 돼 전 방위로 틀어막았을 터이니까.

 

여하튼 현철은 2차 검찰 수사로 120억원의 대선 잉여자금 관리, 기업체로부터 이권 청탁 등 66억원 수수 등이 드러나 특가법상 알선수재 및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수감(1997년 5월17일) 됐다. 천문학적 대출 사기에 비하면 턱없고 죄목도 엉뚱한 데다, 국민들이 진짜 궁금해하는 국정 개입 관련은 수사가 전혀 안 이뤄졌다지만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됐다는 사실이다.

 

현철씨가 구속된 지 사흘 후인 1997년 5월20일, 경제활성화를 주제로 한 시·도지사 회의를 주재하는 YS. 친자식을 감옥에 보낸 대통령이 국정을 제대로 살피기 어려웠음은 물론이다. IMF 사태라는 국가부도 비극이 우연만은 아니다. ⓒ 김영삼 회고사진집

 

비리 직보한 박 실장마저 물러나자 ‘현철 세상’

 

“현철에 대한 혐의 사실이 2차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나면서 백약이 무효가 됐다. 국가 최고 권력도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여론이 무서웠다. 영부인 손명순 여사는 아들의 구속으로 기울자 ‘당신이 무슨 대통령…’ 하며 연일 울고불고했다. YS를 닦달했다. YS 자신도 자식의 구속만은 피하려 했으나 서울대 교수들이 4·19 혁명 때처럼 시국선언과 가두시위를 계획한다는 보고를 받자 두 손 들었다. 민란(民亂)지경에 이르자 대통령도 다른 선택여지가 없게 됐다. 민정수석이 김기수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이 울고 계시다’며 달리 방도가 없겠느냐고 매달린 것도 이때다.”

 

“대통령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말 국가적 비극이었다. 이인제 의원이 독자 출마함으로써 정권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내주었고, 그 책임이 YS에게 있다고 하는데 사실 대통령은 이거고 저거고 따져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해 12월 닥친 IMF 사태도 이런 국정 마비 내지 공백 상태에서 벌어졌다. 당시 우리는 대통령 신변에 다른 변고가 있을까를 걱정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YS를 마지막까지 곁에서 보좌한 김기수 부속실장 등의 회고다.

 

“나에 대한 대다수 혐의는 허위다. 언론들은 소설을 썼다. 검찰은 그저 김현철 잡아넣기에 바빴다. 검찰 공소장이나 법원 판결문에 어디 ‘한보’라는 단어가 한 개라도 있는가. 결국 나는 별건으로 구속됐는데 대선 잔금이 있던 것은 맞다. 다음 총선과 대선에 쓰려고 내 사조직이 관리하고 있었다. 검찰총장은 내게 ‘정국이 시끄러우니 일단 조그만 건으로 잠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했었다. 검찰에 들어가던 5월15일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이틀 조사받고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했더니 ‘미안하다. 내가 힘이 없다’고 했다.” 막판까지도 자신이 구속되리라곤 예상치 않았던 현철의 말이다. 아버지 YS에 대한 섭섭함 등이 잔뜩 배어 있다. 현철은 집권당 내에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기 위해 공천에 관여했고 자금도 확보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그간 정치적 입지와는 정반대 편의 민주당 지지로 선회 등 일련의 돌출도 정치에 대한 그의 집념을 읽으면 대충 이해가 간다.

 

아직도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항변하는 게 딱한데…. 그의 변명·주장이 어떻든 YS 정부를 망친 것은 확실했다.

 

 

5조7000억…단군 이래 최대 한보 금융 특혜 사건 


1997년 1월 한보가 부도 처리되자 의혹의 시선은 청와대로 향했다. 대통령이 대선 당시 기업체들로부터 ‘통상(通常)의’ 자금을 받은 것 외에는 전혀 무관함을 강조하면서 눈총은 현철에게로 옮겨갔다. 한보철강 설비 도입 과정에서의 2000억원 리베이트설(說) 등을 일절 부인하는 현철은 자신을 한보 몸통으로 지목한 국민회의 설훈 의원 등 6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반격에 나섰다.

 

청와대와 검찰·안기부 등의 범정부적 ‘성원’에 힘입은 현철은 한보 부도 이후 꼭 1개월 만인 2월23일 무혐의로 풀려났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 담화를 내는 것으로 사태를 얼버무리려 시도했지만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의 폭로로 허사가 됐다. 한 언론사 사장 인사에 개입하는 녹화 테이프는 현철의 국정 개입을 웅변하는 결정적 증거였다. 검찰을 ‘마피아’에 빗댄 중소기업인의 일간지 광고까지 나오고 민심이 들끓자 검찰은 ‘김현철 게이트’에 대한 수사에 ‘재착수’했다. 청와대도 더 이상 제지할 형편이 못 됐다. 

 

현철의 금고지기 박태중 회사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박이 대선 직후 132억원을 인출한 사실이 밝혀졌고 현철이 대선자금 수백억 원을 챙겼다는 게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럼에도 국회 청문회에 나온 현철은 모든 연루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나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이 한솔에 은닉한 70억원이 발견되는 등 구체적 혐의가 잇달아 드러났고 검찰은 5월15일 현철을 대검찰청으로 소환하고 이틀 후인 17일 서울구치소에 수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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