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과학자 ‘유리 천장’ 여전하다”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3.24 21:17
  • 호수 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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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자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차기 회장…과학기술 외길 인생 다양한 분야 활동

세계여성의날인 지난 3월8일 시사저널 사옥에서 이뤄진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과의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문득 유행 가요가 하나 떠올랐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이제 여자분이신데 뭐가 그렇게~♪”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해인 2013년 6월에 발매된 4인조 아이돌그룹 걸스데이의 노랫말이다.

 

이 패기 넘치는 노랫말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달라진 여성의 지위를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의 머리 위에 가로놓인 현실의 ‘유리 천장’은 여전히 두껍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세계여성의날을 앞두고 발표한 ‘유리 천장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29개 회원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2013년 첫 ‘유리 천장 지수’ 발표 이후 4년 연속 꼴찌다. 참담한 성적이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차기 회장으로 선출된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은 2017년 3월부터 2020년 2월까지 3년 동안 과총을 이끌게 된다. ⓒ 시사저널 고성준

“한국의 여성 과학자가 겪는 관행적·사회문화적·심리적 장벽을 남성 과학자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최근 들어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커리어의 사다리를 오를수록 여성 숫자가 줄어들어 고위직에서는 가뭄에 콩 나기가 되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른바 ‘유리 천장’과 ‘새는 파이프라인(Leaky Pipeline)’ 현상이 여전하다. 가정과 일의 양립은 여전히 어려우며 출산·육아 등으로 경력 단절이 되기 쉽다. 왕성하게 연구 활동에 전념해야 할 나이에 현장을 떠나 공백이 생기면 돌아와서 경쟁력을 회복하기가 어렵다. 과학기술계 여성 정규직 인력의 비중이 매우 낮다.”

 

김 전 장관은 2월26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제51회 정기총회를 통해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과총은 1966년에 ‘과학기술단체 지원,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참여와 권익 신장, 국가 발전을 위한 과학기술 정책 개발’을 목표로 설립된 단체다. 과학기술 분야의 학회, 공공단체, 민간 기업체, 기업 부설 연구소 등 600여 개 회원 단체와 지역협의회 12개, 재외과협 17개 등을 포함한 방대한 조직이다.

 

한국 헌정 사상 최장수 여성 장관이자 존경받는 여성 리더로 꼽히는 김 전 장관은 50년의 역사를 지닌 이 기관의 최초 여성 회장이 된다.

 

“50년 만에 최초의 여성 과총 회장을 만들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후배 여성 과학자들이 ‘선배가 안 나가면 다시 또 10~20년이 걸릴 수 있다’며 등 떠밀어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돌이켜보면 과총 회장을 하려고 이때까지 그 모든 커리어패스(career-path)를 거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교수 출신이면서, 정부 일도 오래 했고, 국회에도 있어봤다. NGO(비정부기구)에서도 있었다. 과학기술 외길 인생을 걸으면서도 그 안에서 다양한 분야의 활동을 했다.”

 

1980년대부터 사회통합위원,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과학기술원로정책자문위원 등을 지낸 김 전 장관은 45년간 학계, 정부, 국회, 시민단체에서 일해왔다. 1999년 DJ 정권 당시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돼 2003년까지 임기를 꽉 채웠다.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을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했다. 당시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이 10명이었는데 여성으로는 유일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직기강팀의 후보자 명단에 오르게 됐다.”

 

“엘리자베스 1세와 메르켈 총리가 롤모델”


그는 여성이 잘 진출하지 않던 분야에 거침없이 나아갔다. 국회의원 시절, 당시까지만 해도 남성 의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국방위를 택했다. 국방위 간사를 하며 국방 R&D(연구·개발) 예산을 늘리고 군인복지기본법을 제정했다. 초선 의원으로서는 파격적으로 최초의 여성 국회윤리특별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여성이 극히 소수인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전통적인 남성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책 결정을 하는 고위직에 여성이 진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많은 사람이 최장수 여성 장관이었던 이력을 말하지만, 제가 훈장처럼 여기는 것은 제1·2회 연속 정부 부처 업무평가에서 환경부가 최우수 부처가 됐다는 사실이다.”

 

평소 목표 지향적으로 일한다기보다는 주어진 일을 그저 해나갈 뿐이라는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의 롤 모델이 궁금해졌다. 그는 영국의 골든에이지를 연 엘리자베스 1세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꼽았다.

 

“역사 속에서 엘리자베스 1세는 가진 거라고는 해적선 몇 척뿐이었던 영국을 당대의 일류 국가로 만들었다. 요즘 인물 중에서는 메르켈 총리다. 그는 동독 출신의 여성 과학자다. 사회적 약자로서 여러 불리한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리더십 있는 여성 지도자가 됐다. 독일 제국 성립 이후 최초로 총리직에 오른 여성으로서 이 혼란한 시기에 독일을 이끌고 있다. 메르켈 리더십은 주목할 만하다.”

 

김 전 장관은 평소 역사물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7세에 박사 학위를 받은 후 45년간 24시간이 모자라도록 쉼 없이 일해온 그에게 유일한 낙은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보는 것이었다.

 

김 전 장관의 본격적인 임기는 내년부터 시작된다. 올해엔 차기 회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특히 ‘통합형 혁신 사업’에 노력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보건·의료·교육·위생·환경·안전 등 사회적 목표 달성을 위한 통합형 혁신 정책에서 성과를 올리는 데 몰두하겠다는 다짐이다.

 

“올해 나이가 72세다. 과총 회장직은 제 인생의 피날레를 잘 마무리하기 위한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과총은 도약과 좌절 사이의 분기점에 서 있다. 정부·국회·언론과 소통해서 국가 경영에서의 과학기술의 위상을 높이고 과총의 위상과 품격을 높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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