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만능시대 역행하는 작은 축구클럽의 혁명
  • 서호정 |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24 21:28
  • 호수 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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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L ‘빅4’ 철옹성을 완전히 허물어뜨린 라니에리 감독의 레스터시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는 축구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클럽 소유권을 가장 먼저 외국 자본에 개방했고, 중동·러시아·북중미·아시아의 돈이 몰려들고 있다. 당초 맨체스터시티(맨시티)는 명문 맨체스터유나이티드(맨유)와 같은 연고지를 쓰면서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오가던 평범한 클럽이었지만, 태국과 중동 자본을 거치면서 지난 5년간 두 차례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빅클럽으로 변신했다. 이런 분위기를 좇아 프랑스의 파리 생제르맹, 스페인의 말라가 등도 자본의 힘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했다. 런던경영대의 스테판 지만스키 교수는 “리그 평균연봉의 4배를 쓰면 우승을 하고, 2.5배를 쓰면 2위를 한다”는 통계를 발표해 ‘돈이 곧 실력’이라는 평가를 뒷받침했다.

 

자본주의의 위력이 더욱 강해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리미어리그엔 이른바 ‘빅4’ 시대가 열렸다. 자본으로 무장한 4개의 큰 클럽인 맨유·아스널·첼시·리버풀이 우승 경쟁을 도맡은 것이다. 최근 들어 맨시티가 리버풀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리버풀·토트넘 등도 그들과 대적하기 위해 지분을 해외 자본에 매각하며 돈을 끌어들이고 있다. 지난 10년간 맨유(5회)·첼시(3회)·맨시티(2회)가 리그 우승을 돌아가며 해낸 사이 프리미어리그가 1년간 쓴 이적료는 1조7000억원으로 10년 사이 3.5배 증가했다.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 전체에 ‘황금만능시대’가 펼쳐졌다.

 

모든 전문가가 내려올 거라고 봤던 레스터시티는 30라운드가 끝난 지금까지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영국 스포츠 전문 매체 ‘스카이스포츠’는 남은 8경기를 치르고도 레스터시티가 우승할 거라고 전망했다. ⓒ PA WIRE연합

 


돈 투자는 13위, 하지만 성적은 1위

 

그런데 그랬던 프리미어리그에서 2015~16 시즌 정반대 현상이 일고 있다. 누구도 우승 후보로 거론하지 않았던 팀이 3개월 넘게 리그 선두 자리를 점하고 있다. 바로 레스터시티다. 지난 시즌 레스터시티는 14위였다. 그것도 강등권과는 고작 승점 6점 차이였다. 불과 2년 전 그들은 2부 리그에 있었다. 아니 7년 전에는 아예 3부 리그에 있던 팀이었다. 132년의 팀 역사에서 물론 1부 리그 우승은 단 한 번도 없다. 최고 성적이라곤 무려 87년 전인 1928~29 시즌 거뒀던 1부 리그 2위가 전부다.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오가는 전형적인 ‘에스컬레이터 팀’이었던 레스터시티는 어떻게 빅4 체제를 부수며 우승에 다가설 수 있었을까?

 

지난 2월 초. 레스터시티는 리버풀·맨시티와의 2연전을 앞뒀다. 지난해 12월14일 홈에서 첼시를 꺾으며 선두에 오른 레스터시티는 아슬아슬하게 선두를 이어왔다. 중·하위권 팀에는 확실히 이겼지만 상위권 팀들을 상대로 이기지 못해서 대다수 전문가는 이 돌풍이 금세 사라질 것이라고 봤다.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알렉스 퍼거슨 전 맨유 감독도 “바람은 결국 잦아들기 마련이다”라는 말로 이 돌풍이 곧 종말을 고할 것으로 내다봤다. 레스터시티의 바로 뒤에서는 손흥민의 소속팀 토트넘과 지난 11년간 우승을 못한 ‘빅4’ 아스널이 무섭게 추격해왔다.

 

하지만 모두가 고비라고 얘기했던 2연전에서 레스터시티는 리버풀과 맨시티를 연파했다. 이어진 아스널 원정에서는 1-2로 석패했지만, 이후 4경기에서 3승 1무를 거뒀다. 그사이 유럽 클럽대항전을 병행하는 다른 팀들이 부진에 빠졌다. 30라운드를 마친 현재 레스터시티는 2위 토트넘에 승점 5점 차로 앞선 채 1위를 달리고 있다. 시즌 종료까지 남은 8경기만 버티면 레스터시티는 ‘내려올 팀은 결국 내려온다’는 모두의 예상을 비웃으며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된다.

 

레스터시티의 변화는 2010년 면세점을 기반으로 하는 태국의 소매유통기업 ‘킹파워’의 회장인 비차이 스리바다나프라바가 인수하면서부터 시작됐다. 2002년 경기장을 신축하며 생긴 부채로 선수 영입이 어려워졌던 레스터시티는 하부 리그를 전전했다. 2조5000억원 규모의 자산가인 비차이 회장은 레스터시티를 인수한 후 투자를 시작했고, 팀은 전력을 가다듬으며 2013~14 시즌 2부 리그에서 우승을 하고 1부 리그로 승격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레스터시티의 돌풍은 맨시티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비차이 회장의 투자는 어디까지나 승격을 목표로 하는 팀의 수준이었다. 올 시즌 레스터시티가 쓴 이적료는 486억원으로 프리미어리그 전체 13위 수준이다. 현재 리그 6위에 머무르고 있는 맨유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이보다 10배 많은 돈을 이적료로 썼다. 레스터시티는 선수단 몸값도 리그 평균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1100억원 규모로 첼시의 6분의 1 수준이다. 씀씀이와 비교하면 엄청난 효율의 성적인 셈이다.

 

레스터시티의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선수가 공격수 제이미 바디다. 3년 전 레스터시티가 2부 리그 팀이었을 때 바디를 영입했는데 이적료는 불과 12억원이었다. 올겨울 K리그 클래식의 전북 현대가 울산 현대로부터 공격수 김신욱을 영입할 때 지불한 이적료가 20억원인 것과 비교해봐도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바디는 6년 전만 해도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8부 리그에서 선수로 뛰며 급료 5만원을 받던 무명 선수였다. 5부 리그에서 엄청난 골을 넣어 레스터시티로 온 바디는 2부 리그에서 16골로 득점 10위를 기록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다. 그런 바디가 지금은 1부 리그 29경기에서 19골을 넣으며 프리미어리그 득점 1위를 달리고 있다. 11경기 연속골을 넣어 뤼트 판 니스텔로이가 보유했던 프리미어리그 최다 연속골 기록을 경신하며 ‘바디 열풍’을 일으켰다. 빅클럽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의 현재 이적료는 3년 전보다 무려 45배 오른 540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65세 노감독과 루저들이 만든 인생역전


돌풍의 또 다른 주역인 리야드 마레즈도 2014년 레스터시티로 이적할 당시 이적료가 7억원 수준이었다. 프랑스의 작은 클럽 르아브르 소속이던 마레즈는 현재 도움 2위(11개)를 기록하고 있다. 기술이 뛰어나 이제는 스페인의 양대 명문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영입 경쟁에 나섰다. 바디의 공격 파트너는 일본 국가대표인 오카자키 신지다. 독일 분데스리가의 슈투트가르트와 마인츠를 거쳐 지난여름 레스터시티에 입단했다. 비슷한 시기 레버쿠젠을 떠나 토트넘에 입단한 손흥민의 이적료인 400억원의 3분의 1도 안 되는 120억원의 이적료로 영국에 건너왔다. 그러나 알토란 같은 5골로 중요한 순간마다 승리를 도와, 리그에서 3월18일 현재 2골을 넣는 데 그치고 있는 손흥민보다 효과가 큰 영입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들 외에도 레스터시티는 다른 팀에서 실패하고 온 선수투성이다. 골키퍼 카스퍼 슈마이켈은 왕년의 명골키퍼인 피터 슈마이켈의 아들로 각광을 받으며 맨시티에서 데뷔했지만, 아버지만 못하다는 혹평을 들었다. 하부 리그를 전전하다 2011년 입단한 레스터시티에서 그는 주전으로 거듭났고, 올 시즌 리그 정상급 골키퍼로 올라섰다. 미드필더인 대니 드링크워터와 측면 수비수 대니 심슨은 박지성이 활약하던 시절 맨유가 키운 유망주였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해 버림을 받았다가, 레스터시티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마크 알브라이턴, 로베르트 후트 등도 비슷한 인생 경로를 거쳤다.

 

이들을 한데 모아 강팀으로 만든 것은 올해로 만 65세인 노감독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는 세리에A 유수의 팀들을 거치며 ‘리빌딩의 대가’로 불렸다. 그의 능력이 가장 빛났던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이었다. 그가 맡고 있던 첼시가 러시아의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인수되자 유명 선수가 모이기 시작했다. 라니에리 감독은 안정된 팀 빌딩을 통해 자칫 따로 놀 수 있는 스타들을 결집시켰다. 2004년 그가 떠난 후 부임한 무리뉴 감독은 첼시를 이끌고 성과를 냈지만, 사실 그 과실을 키운 숨은 주역은 라니에리 감독이었다. 그는 첼시를 떠나 발렌시아, 유벤투스, 로마, 모나코 등을 거쳤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2014년 그리스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지 4개월 만에 부진한 성적으로 경질되면서 라니에리 감독의 커리어는 땅에 떨어졌다.

 

그때 라니에리 감독에게 손을 내민 팀이 레스터시티였다. 구단주의 나라인 태국을 방문하던 중 벌어진 선수들의 ‘섹스비디오 스캔들’과 ‘동양인 비하’로 인한 책임을 물어 팀을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킨 나이젤 피어슨 감독을 경질한 레스터시티는 노감독의 경험에 신뢰를 보냈다. 1부 리그로 다시 승격해 겨우 잔류에 성공한 팀을 맡은 라니에리 감독의 목표도 처음엔 ‘잔류’였다. 그러나 개막전 승리를 시작으로 레스터시티는 패배를 모르는 팀이 됐다. 리그 반환점을 돌 때까지 레스터시티는 고작 2패만 기록했다. 4-4-2 포메이션에 기반한 ‘선(先)수비 후(後)역습’ 전략은 특별할 게 없지만, 공수 전환 속도가 무척 빨랐고 무엇보다 끈끈한 팀 컬러를 갖게 됐다.


 

퍼거슨 “레스터시티가 정말 우승할지도”

 

그 배경에는 라니에리 감독의 리더십이 있다. 그는 다른 팀에서 상처 받고 온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작은 부진으로 선수를 빼는 일은 없으며, 큰 실수를 해도 절대 질타하지 않는 믿음을 보여줬다. 경기가 끝나면 결과에 관계없이 소박한 피자 파티를 여는가 하면, 경기 전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평소 듣지 않는 록과 힙합 음악을 틀어 눈높이를 맞췄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카리스마나 아르센 벵거 감독의 전술, 주제 무리뉴 감독의 심리전은 없지만, 진심으로 소통하는 리더십이 돈으로 우승을 살 수 있다는 축구계의 현 상황을 거스르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초반 돌풍을 일으킬 당시 “지난 시즌 기록한 승점 41점을 돌파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던 라니에리 감독은 12월 중순 리그 1위에 오르자 “4위 이상을 기록해 챔피언스리그에 나가고 싶다”고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3개월이 지난 지금 팀은 여전히 1위를 지키고 있고, 그 역시 평생 이루지 못한 1부 리그 우승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돌풍은 결국 끝날 것이다”라고 공언했던 퍼거슨 전 감독도 최근 “레스터시티가 정말 우승을 할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발언을 뒤집었다. 지난 10년간 빅4의 아성을 깬 팀은 토트넘이 유일했다. 그런 토트넘도 고작 4위가 한계였다. 과연 레스터시티는 남은 2개월 동안 지금의 자리를 지켜내며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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