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화된 AI의 예술, 최상은 아니다
  • 정준모 | 前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24 21:29
  • 호수 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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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영역 예술에까지 파고들어온 인공지능의 작품을 바라보는 법

요즘 대세, 아니 신드롬은 드라마 <태양의 후예> 주인공 송중기이거나, 혹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AI)일 것이다. 이세돌 9단과의 바둑 대결에서 자신을 만든 인간을 4 대 1로 이긴 ‘알파고’의 위력이 대단하다. 이제 곧 공상과학영화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현실이 될 것처럼 호들갑이다. 인공지능이 조금 더 발전하면 판사나 금융권 투자 전문가는 물론이고, 예술가들의 자리까지 위협할 것이라 한다.

 

이미 IBM이 개발한 딥블루가 1997년 세계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프를 이기고, 2011년에는 IBM의 왓슨(Watson)이 인간 퀴즈 챔피언에게 승리했다. 2012년부터 병원에서 암을 진단하는 레지던트로 출발해 백혈병 진단을 담당하고 있는 왓슨은 의사들의 진찰 결과와 비교했을 때 82.6%에 이르는 정확도를 과시했다. 왓슨의 치료법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는 2.9%에 불과했다고 한다. 기술과 인술(仁術)의 겸비가 가장 중요한 의사의 역할도 인공지능이 대신할 정도로 발전한 셈이다. 증권 투자에서도 컴퓨터가 판단하고 결정해서 투자하는 경우, 사람이 하는 것에 비해 수익률이 월등하게 좋았다고 한다.

 

아론(Aaron)은 스스로 기존 이미지 데이터를 분석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헤롤드 코언이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 아론이 그린 그림.

 


‘예술’이라기보다는 ‘모방’ 또는 ‘복제’의 하나

 

게다가 스스로 학습 능력을 갖춘 알파고는 딥러닝(Deep Learning)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나를 가르치면 스스로 열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밤잠 안 자고 공부를 한다면 인간 중 그 누구도 그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인공지능의 발전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 혹시나 인공지능으로 인해 자신의 일자리를 잃지 않을까 고민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성이나 수리(數理)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예술 분야만큼은 사실 인공지능 영역 밖으로 치부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이 무서운 인공지능이 화가와 소설가, 음악가를 능가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한다. 절대적으로 인간 감성의 영역이라 여겨져온 예술 분야까지 인공지능이 대체할 것이라고 하니 그동안 인류의 역사를 지탱해온 원칙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또 인공지능이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고 했을 때 종래의 미학적 관점과 태도에서는 도저히 예술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인류의 가치관과 도덕률을 유지해온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것 정도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다.

 

1999년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 <바이센테니얼맨(Bicentennial Man)>은 코미디지만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로봇, 그리고 인공지능이 미래의 우리 생활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를 보여준다. 충실한 시종으로서 나를 주인님으로, 아내를 마님으로 모실 수도 있지만, 지능과 호기심을 가진 무시무시한 괴물이 될 수도 있다. 일자리를 뺏길지 모른다는 걱정보다 감정과 이성을 모두 지닌 로봇이 인류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더 두려운 것이다. 물론 현재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모든 면을 클론처럼 복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 능력 일부가 복제된 것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 발전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지라 은근히 이에 대한 포비아(공포증) 현상마저 나타날 조짐이 보인다.

 

과학은 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 하지만 예술의 상상력 또한 과학 발전에 크게 도움을 준 게 사실이다. 물론 발터 벤야민은 과학의 발전이 예술의 미래를 결코 밝지만은 않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특히 인공지능은 기계시대 원본 개념의 상실이 아니라 예술의 기본 구조를 깨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한다고 하지만 이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재의 시각으로는 ‘예술’이라기보다는 ‘모방’ 또는 ‘복제’의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미 작곡을 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했고 자율적인 학습을 통해 연주를 하는 피아노도 등장했다. 야마하가 만든 자동 연주 피아노 ‘디스크라비에(Disklavier)’가 그것이다. 또 2012년에는 캐나다의 작곡가 아르네 아인겐펠트가 아담 버넷, 필립 파스콰이어러와 함께 인공지능을 이용해 작곡한 작품을 내놓았다. 물론 이 콘서트에서 관객들은 인공지능이 작곡한 음악과 인간이 작곡한 음악을 구별할 수 없었다. 예일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하는 도냐 퀵은 ‘쿨리타(Kulitta)’라는 작곡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운드 클라우드를 통해 공개했다. 그리고 쿨리타가 작곡한 곡과 인간이 만든 곡 등 40곡을 섞어서 음악을 잘 아는 100명의 청중에게 들려주고 평가를 하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이 쿨리타의 음악과 인간이 만든 음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바흐의 곡을 쿨리타가 재조합해서 만든 곡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그는 이제 헤비메탈 밴드인 메탈리카와 모차르트를 서로 섞어서 새로운 음악을 만들려고 한다.

 

인공지능이 선보인 음악과 문학, 그림들


헤롤드 코언은 이른바 ‘아론(Aaron)’이라는,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을 1973년에 내놓았다. 그 후 아론은 진화를 거듭해 1980년대에는 3D 공간에서 물체나 사람을 배치하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직접 그림을 그리는 수준에 도달했다. 아론이 그린 그림은 1986년 코언의 기증으로 영국 테이트 미술관에 소장되기에 이르렀다. 또 1995년에는 미술품 경매를 통해 소장가의 손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가 이런 인공지능을 개발하게 된 것은 자신이 1960년대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였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벤자민 그로서는 쌍방향 대화형 그림을 그리는 로봇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화가다. 그림에 영향을 주는 대화, 배경 오디오, 자체 메커니즘은 그 소리에 따라 반응하면서 캔버스 위에 흔적을 남긴다. 또 독일 콘스탄츠 대학의 올리버 듀센과 토마스 라인드마이어는 로봇을 이용한 페인팅으로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이먼 콜맨은 처음에는 단순하게 사진을 변환시킨  소프트웨어로서의 그림을 만들고자 했는데, 점차 모델링과 포토샵으로 발전되어가면서 그림을 그리는 로봇 인공지능으로 이어졌다. 구글에서 검색어를 통해 관련 이미지를 얻고 그것을 조합해 회화적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도 있다.

 

문학에서도 이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인물들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를 빌려 만든 <트루 러브>라는 소설이 러시아에서 2008년 발매되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내년에는 영국에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 로봇 ‘몰리’가 등장할 것이라고 한다.

 

예술의 영역까지 이제 성큼 들어온 인공지능이다. 하지만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아무리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이 예술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이 외형적으로 형식상 예술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해도, 각기 다른 유전인자를 가진 인간들의 감성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이나 컴퓨터공학을 하는 이들과 예술이나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예술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아주 성실하게 복제하거나 무한 카피를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를 창조적인 예술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예술이라는 주장을 펼치겠지만 말이다. 

 

구글 딥드림이 그려낸 그림. 인공지능을 통해 추상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알고리즘을 사용하고 있다. ⓒ 구글 포토

 


AI 발달로 새로운 예술 형태 등장할 가능성

 

사람이라면 글을 쓰며 문장에서 단어를 어떤 순서로 배열하는가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융합할 수 있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인간은 비선형 구조로 생각하지만 프로그램은 선형 구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은 각각의 스타일을 이해하고, 다시 최적의 적절한 조합을 찾아내는 작업을 할 뿐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것은 그리는 사람과 그려진 그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과 정서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의 경우 일방적으로 최적화된 아름다운 색과 면, 그리고 형태의 조합으로 캔버스를 채우더라도 보는 이의 기호와 정서까지 채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런 이유로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수많은 계산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적의 예술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최상에 이르기는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물론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예술의 형태가 등장할 가능성은 크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이제 고전이지만, 그가 비디오아트를 처음으로 선보였던 1963년에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이렇듯 인간들은 새로운 도구로서 인공지능을 붓이나 비디오 대신 사용할 것임은 틀림없다. 물론 명령어만 입력해두면 자신이 알아서 하기 때문에 한가해질 예술가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미래의 최첨단 인공지능이 예술가를 대신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 윌리엄 모리스의 수공예운동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손맛’이라는 예술의 또 다른 질감 때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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