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구의 길은 여전히 스페인으로 통한다
  • 서호정 |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31 18:44
  • 호수 1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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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강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몰락 이유

2014년 FIFA 브라질월드컵. 당시 스페인은 조별리그에서 네덜란드와 칠레에 일격을 맞으며 탈락했다. 2008년과 2012년 열린 유럽선수권(유로)을 연달아 제패하고, 2010년엔 남아공월드컵까지 정복하며 최고 정점에 섰던 ‘무적함대’ 스페인이 조기에 침몰하는 대이변이 일어나자 언론들은 ‘왕이 죽었다’라는 표현으로 그 충격을 세계에 전했다. 이케르 카시야스, 사비 에르난데스, 카를레스 푸욜, 다비드 비야 등으로 대표되던 황금세대가 노쇠화하고 세대교체가 늦어지며 예상치 못한 실패가 빚어진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스페인 축구의 전성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난 지금, 스페인 축구는 여전히 절정을 누리고 있다. FIFA 랭킹 1위 자리는 벨기에에 내줬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스페인 축구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은 대표팀이 아닌 클럽팀이다. 클럽 축구에서 스페인은 역대 최고의 시기를 맞고 있다. 과거 챔피언스리그를 5연속 제패했던 레알 마드리드 같은 특정 팀의 독보적인 성과가 아니라 다수의 팀이 클럽대항전에서 동시에 성과를 내는 중이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맞붙은 FC 바르셀로나와 아틀레틱 빌바오의 대결. 바르셀로나는 챔피언스리그에서, 빌바오는 유로파리그에서 8강에 진출했다. ⓒ AP연합

 

외국인 선수 제한이 자국 선수 육성으로


최근 16강전이 끝난 유럽축구연맹(UEFA)의 양대 클럽대항전인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리그는 스페인 클럽의 초강세로 정리됐다. 챔피언스리그는 리그 우승팀을 비롯한 리그 최상위 3~4개 팀, 유로파리그는 각종 컵대회와 리그 차순위 팀이 출전하는 대회다. 스페인은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리그 8강에 각각 3팀씩이 올랐다. 챔피언스리그에는 FC 바르셀로나·레알 마드리드·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유로파리그에는 세비야·비야레알·아틀레틱 빌바오가 각각 8강 진출의 기쁨을 맛봤다. 올 시즌 클럽대항전에 나선 스페인의 7개 클럽 중 발렌시아만이 유일하게 탈락했다. 그나마 발렌시아가 유로파리그에서 탈락한 이유도 16강에서 같은 스페인 클럽인 빌바오와 격돌해서다.

 

이번 챔피언스리그 8강에는 스페인 3개 팀 외에 독일이 2팀(바이에른 뮌헨, 볼프스부르크), 잉글랜드·프랑스·포르투갈이 각각 1팀(맨체스터 시티(맨시티), 파리 생제르맹, 벤피카)씩 올랐다. 특징적인 것은 수년 전까지 강세였던 잉글랜드 클럽들의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는 이번에 단 한 팀도 8강에 진출시키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올 시즌만이 아니다. 스페인 클럽들은 챔피언스리그에서 무려 네 시즌 연속 3팀이 8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 두 시즌 동안 정상에 선 것도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였다. 유로파리그도 세비야가 2연속 제패한 것을 비롯해 최근 네 시즌 동안 세 차례나 스페인 클럽이 우승컵을 가져갔다.

왜 유럽 축구의 길은 여전히 스페인으로 통하는 것일까? 첫 번째는 뛰어난 선수층에 있다. 클럽팀과 대표팀의 차이는 개방성이다. 대표팀은 동일 국적이라는 제한이 있지만, 클럽팀은 국적 제한 없이 선수진을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독이 되는 경우가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대표적이다. 프리미어리그에는 외국인 선수 제한이 없다. 그렇다 보니 자국 선수를 육성하기보다는 수준급의 외국인 선수를 마구 끌어들였다. 육성에는 돈 외에도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필요한 선수를 곧바로 영입해 전력을 정비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프리미어리그는 이 효과를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제대로 누렸다.

 

‘티키타카’ ‘제로톱’ 등 세계 축구 전술 주도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무분별한 외국인 선수 영입으로 자국 선수의 기량 발전이 막힌 것이다. 때문에 잉글랜드는 리그 성적은 좋지만 대표팀은 월드컵과 유로대회에서 연거푸 실패하는 모순에 빠졌다. 최근 들어 ‘홈그로운(자국 육성)’ 제도를 대폭 강화하고 있지만 단기간에 나아질 순 없다.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오른 잉글랜드 클럽 중 맨시티는 조 하트와 라힘 스털링만이, 아스널은 대니 웰벡과 시오 월콧만이 자국 선수였다. 특히 맨시티는 선발 라인업 중 필드플레이어에 단 1명의 잉글랜드 선수도 없는 사실상의 다국적 팀이었다.

 

반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는 외국인 선수 제한(4명) 규정을 두고 있다. 유럽연합(EU) 규정에 따라 EU 가입국 선수는 외국인 선수에 해당하지 않지만, 이 제도적 특성이 자국 선수 육성에 이점을 준다. 잉글랜드 팀들과는 반대로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은 6명 이상의 자국 선수가 명단에 들었다. ‘홈그로운’은 앞으로도 대세다. 현 FIFA 회장인 지아니 인판티노가 UEFA 사무총장 시절 도입한 재정 페어플레이 제도로 인해 아무리 많은 이적료를 쥐어도 구단 수입 총액 이상을 쓸 수 없어서다. 그래서 맨시티나 파리 생제르맹 등 그동안 육성보다는 영입으로 전력 강화를 하려던 팀에는 비상이 걸렸다. 반면 뛰어난 유스 체계를 갖춘 스페인 클럽들은 자체적인 선수 보강으로 여유롭다. 빅클럽의 유스 출신이지만 성인팀에서 자리 잡는 데 실패한 선수들은 중하위권 팀으로 임대되거나 완전히 이적해 기량을 발휘하는 ‘낙수 효과’도 이어진다.

 

게다가 스페인은 세계 축구의 인력 시장으로 불리는 남미 축구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곳이다. 같은 언어와 문화권인 덕에 남미 선수들이 좀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프리미어리그가 상대적으로 높은 급여를 앞세웠지만, 짓궂은 날씨와 기름진 음식으로 인해 남미 선수들은 늘 고전한다. 현재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는 가장 강력한 공격 조합인 메시·수아레스·네이마르의 ‘MSN 트리오’도 남미 축구의 대표인 아르헨티나·우루과이·브라질의 에이스들이 뭉쳐 만든 시너지 효과의 결과물이다. 세비야는 남미의 유망한 선수를 싼값에 데려와 성장시킨 후 비싼 이적료를 받고 큰 클럽에 보내며 구단 재정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유명해 ‘거상(巨商)’이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축구의 스타일도 중요하다. 선수들에게 어떤 맞춤옷을 입히느냐는 중요한 과제다. 바로 전술과 전략의 문제다. 프리메라리가는 축구 지도자들 사이에 전술 1번지로 통한다. 특정 스타플레이어에 의존하기보다는 팀의 대응을 강조하는 것이 스페인 축구의 전통이다. 바르셀로나나 레알 마드리드처럼 월드 스타들이 모인 팀도 치밀하게 계획된 전술에 맞춰가며 점유율에 근거한 높은 공격 비중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축구를 추구한다. 스페인 지도자들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아름다운 축구’가 그것이다.

 

정밀한 연계 플레이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티키타카’, 상대가 잘하는 것을 봉쇄하며 압박을 벗어나는 ‘탈(脫)압박’, 정통 스트라이커 없이 공격을 펼치는 ‘제로톱(펄스 나인)’ 등 지난 수년간 세계 축구의 전술적 경향은 모두 프리메라리가가 주도했다. 이에 맞서 독일 분데스리가는 압박의 지점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전방 압박’을 구사하고, 이탈리아 세리에A는 한층 진화된 일자 스리백 전술로의 회귀 등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프리메라리가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은 더 세련되고 파격적인 전술로 다른 리그의 대응을 넘어섰다.

 

현재 주요 리그의 빅클럽에서는 스페인 국적, 혹은 프리메라리가 출신 지도자들이 지휘봉을 잡고 있다. 바이에른 뮌헨은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전성기를 쓴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맨시티는 레알 마드리드와 비야레알을 이끌었던 칠레 출신의 마누엘 페예그리니 감독이 이끌고 있다.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우승에 도전 중인 토트넘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도 프리메라리가의 에스파뇰에서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인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은 한 치의 틈도 없는 강력한 수비와 압박 전술, 치밀한 세트피스 전략으로 새 흐름을 일으키며 첼시, 인터 밀란 등이 영입을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마지막은 지속적인 방향성에 있다. 프리메라리가는 분데스리가와 더불어 감독보다 단장의 힘이 더 막강한 곳으로 유명하다. 단장은 클럽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맞춰 팀을 운영한다. 선수를 영입하는 것과 적절한 타이밍에 이적시키는 판단도 단장이 주도한다. 팀의 리빌딩에서 감독 개인의 호불호나 의견이 아니라 단장을 중심으로 한 기술 파트가 재정 상태를 파악한 후 총체적인 논의를 통해 최선의 답을 찾고 계획적으로 운영해나간다.

 

단장 주도의 스페인, 감독 주도의 잉글랜드


이런 방식이 집중되는 팀은 비야레알·세비야·빌바오 같은 중소 클럽이다. 비야레알은 인구 5만여 명의 작은 도시를 연고로 하지만 800여 명의 선수를 육성하는 유소년 아카데미가 있고 20명의 스카우트가 스페인 전역은 물론이고 남미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재능을 발굴한다. 세비야에서는 프란치스코 몬치 단장이 감독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다. 선수를 보는 눈이 탁월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지난 2000년부터 선수 이적으로 4000억원에 가까운 이익을 팀에 안겼다.

 

프리메라리가와는 반대로 감독에게 여전히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잉글랜드는 최근 부침을 겪고 있다. 첼시·맨유·리버풀 같은 명가들은 감독이 중심이 된 리빌딩에 크게 실패하며 좌충우돌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 모두 실패했다. 아스널은 올해로 취임 20년째를 맞은 벵거 감독이 우승 도전에 번번이 실패하자 장기 집권에 불만을 가진 팬들이 퇴진 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레스터시티와 토트넘이 의외의 선두 싸움을 하고 있는 이유에는 두 팀의 경쟁력 상승도 있지만 선두권 팀들이 자멸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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